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67)
067화. 더 높은 곳으로 (2)
김수훈 대표가 예건의 1호팬이라 지칭한 것은 JJ엔터 이재정 대표였다.
항상 묵묵히 그의 곁을 따르는 김주한 이사도 함께였다.
“뭐야? 왜 실망한 표정입니까? 4개월만인데, 나 안 반가워요?”
예건은 말없이 김수훈 대표를 돌아보았다.
“하하하. 나는 아침 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군. 말씀 나누시고 가십시오. 또 뵙죠. 이재정 대표.”
“감사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대표님.”
김수훈 대표는 이재정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을 나갔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예건이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말을 건네자, 이재정 대표는 기가 차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하! 정말 너무하네. 프로젝트 잘 부탁한다고 했더니 프랑스로 내 빼놓고, 잘 지냈냐니….”
아침부터 잔소리가 맵다.
그나저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일까?
“업무에 관해서라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최종 설계안 대로 문제 없이 진행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매일 작업 진도도 확인하고 있고요.”
JJ엔터 사옥의 설계 납품까지 남은 기간이 약 2주 정도.
예건이 발루아 경매도 참여하지 않고 한국으로 곧바로 들어온 이유였다.
사옥의 실시 설계는 장현우 과장 지휘 아래 별도의 팀을 꾸려 진행하고 있는데다, 오만호 이사가 관리하고 있으니 예건이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마무리는 직접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들어온 거지만.
“흠흠.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 이야기 하시려고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예건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재정 대표가 씩 웃었다.
“하여튼 눈치 하나는 귀신 같다니까.”
“이 시간에 찾아오신 걸 보면 많이 바쁘신 것 같은데,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예건을 찬찬히 뜯어보던 이재정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전에 말했던 제안, 아직 유효해요.”
“무슨 제안 말씀이십니까?”
“우리 회사 들어오라는 거.”
“분명 관심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재정 대표의 입맛이 씁쓸했다.
넘어갈 때까지 찍어 보겠노라 결심은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찾아온 것은 한예건과 관련된 사업 소식이 사방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그가 공동대표로 있는 아르누보 갤러리에 대한 무드의 전폭적인 관심부터, 그가 최근까지 총괄책임자로 있었다던 샤또 메종 발루아가 크리스티앙의 특별 경매장으로 활용될 거라는 것까지.
물론 아직 공개적으로 한예건의 이름이 대중에 노출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기란 순식간에 폭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젊은 나이에 세계에서 주목하는 디자이너, 게다가 저 얼굴이 매스컴에 공개되기만 하면….’
문제는 아무런 준비 없이 타오른 인기는 쉽사리 꺼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연료를 열심히 때워줘야 한다. 인기가 꺼지지 않게.
“프랑스는 어땠어요?”
“뭐,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예술의 도시라 그런가?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게 저는 좋더라고요. 여러 나라가 붙어 있으니 활동하기도 편하고.”
“…….”
“한국, 너무 좁지 않아요? 알아보니까 한국에서 건축가로 성공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이던데.”
생각이 많아지는 예건의 눈빛.
그 순간을 포착한 이재정 대표가 기세를 몰아 제안했다.
“한국대 졸업 예정이라고 했죠?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2학년 과정으로 편입이 가능할 것 같던데. 어때요? 세계를 무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
세계를 무대로.
당연히 원하는 바다.
현재 한국의 건축사 제도는 유럽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결국, 이재정 대표의 말대로 유럽에서 활동하려면 유럽에서 인정받는 건축사 자격을 득해야 한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중에 가장 유명한 건축가 제라르 가뱅. 그 건축가가 에꼴 데 보자르 출신이라고 하던데, 우리 회사에서 당신을 전적으로 지원하죠.”
“지원이라면?”
“건축사 자격을 딸 때까지 학비, 숙소, 생활비까지 모두 지원할 겁니다.”
2학년 과정 2년, 3학년 과정 2년, 합해서 총 4년.
그것도 누락 없이 진급한다는 가정하에 나온 기간이다.
프랑스 유학 비용이 1년간 최소 1억 원 정도가 지출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재정 대표로서는 예건의 미래에 제법 큰 비용을 투자하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진급 누락이 된다면, 늘어난 기간만큼 추가되는 비용도 감안해야 했으니.
예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앞으로는 한국에서 활동을 이어갈 생각이었기에 그간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건축사 자격을 따기 위해 실무가 아닌 학점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전생에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그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완성한 도면에 자신의 도장을 찍지 못하는 상황도 큰 문제기는 했다.
실질적인 발루아 프로젝트 총괄디자이너는 한예건이었으나, 최종 인허가 도장은 브루노 건축사의 이름으로 찍히는 셈이었으니까.
당장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앞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건축사사무소를 차릴 생각이었기에 그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건 좀 고민해 봐야겠군요.”
예건의 말을 긍정이라 판단한 이재정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천천히 생각해 보고 연락 줘요. 아! 벌써 시간이. 나는 이만 갑니다. 프로젝트 마감 일정, 꼭 맞춰요.”
“네.”
예건은 이재정 대표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진학이라…. 이거 참 골치 아프군.”
전생의 경력만 합산하더라도 김수훈 대표보다도 더 오랜 설계 경력을 보유한 그였다.
예건이 가지고 있는 설계 지식이 조금 오래되기는 했으나, 부족한 지식은 책을 통해 충분히 습득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건축사 제도는 졸업 후 5년의 실무경험, 건축사 예비시험, 건축사 시험 등의 3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게다가 한국의 시스템은 국제 공인 제도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결국, 유럽에서 자격을 취득하는 것이 스페인에서 활동하기에 훨씬 유리하다는 뜻이다.
“늦지 않게 준비는 해야겠어. 이왕이면 세계 어디를 가도 꿇리지 않는 대학이 좋겠지?”
누구한테 조언을 구해야 할까?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 브루노 건축사밖에 없었다.
예건은 일단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 가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있었기에.
크리스티앙이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가졌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 * *
VIP 고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VIP 경매를 2주일 앞둔 샤또 메종 발루아.
니콜은 아침부터 손님맞이 준비로 바빴다.
이번 발루아 경매에 출시되는 예술품들은 대부분이 첫선을 보이는 만큼, 이번 VIP 대상 경매가 굉장히 중요했다.
전통 있는 부유층, 왕권을 장악해 나라를 손에 움켜쥐고 있는 권력자들, 트렌드에 민감한 신흥 사업가들까지.
예술품 한 점을 구입하는데 수천 달러를 아끼지 않는 그들은 소장가치가 확실한 특별한 것을 원한다.
출처와 유래는 예술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유명한 수집가의 명성을 가진 지그프리드, 그가 직접 작성한 수첩 속 스토리까지.
이번 경매품들은 예술적 가치와 특별함, 희귀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예술 작품이라면 신물 나게 보았던 니콜마저도 이번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가보처럼 생각했던 예술품들을 내놓을 생각을 했으니.
하지만 예건 때문에 자신의 거창했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또각또각.
니콜이 알폰스 무하의 일러스트 액자 앞에 멈춰 섰다.
그림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짙은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하필 조각상을 알폰스 무하의 일러스트를 참고해가지고.’
황금 천사상은 공개된 순간 샤또 메종 발루아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해가 전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레아 카리나는 자신도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니.
니콜은 경매 출품작에 대선 설명서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봄의 레아 카리나]봄꽃과 함께 어우러져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의 일러스트.
그 아래에는 제작 시기, 작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한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샤또 메종 발루아의 돔 지붕을 장식한 조각가 클로드 페르소나즈가 만든 천사상의 모델이 된 작품이다.]현존하는 프랑스 최고 조각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로랑 말레가 자신의 이름을 건 작품으로 승화시킬 정도로 예술적인 일러스트.
이 한 문장이 작품의 가치를 순식간에 올려 버린 것이다.
게다가 예건을 로랑에게 소개해준 것도 자신이었다.
“으으으~ 멍청하긴. 진짜 내가 못 살아!”
그녀 근처에서 함께 현장 점검을 하고 있던 직원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수석감정사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에요.”
자신도 모르게 흥분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진 니콜이 시간을 확인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벌써 1시네요. 오늘 방문하시는 VIP께서는 특별히 향에 민감하시니까, 크리드 제라르 컬렉션 제품으로 은은하게 부탁해요. 다른 향 섞이지 않게 각별히 신경 쓰고.”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황급히 자리를 떠나고, 니콜은 다시 한번 미련 가득한 눈으로 레아의 일러스트를 바라보았다.
‘제발 VIP 경매에서 팔리지만 말아다오. 제발!’
* * *
약속된 시간이 되고, 발루아 입구에 잘 빠진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멈춰 섰다.
풍채 좋은 운전사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곧이어 명품 브랜드 그룹의 총수 제라르 베니에가 차에서 내렸다.
그의 뒤를 빼어난 용모의 젊은 남자가 뒤따랐다.
마담 르네가 그들을 반겼다.
“베니에 총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잘 지냈소? 마담 르네. 초대해 주어서 고맙군요. 크리스티앙이 이번 특별 경매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정원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칭찬, 감사드립니다. 전시된 예술품 또한 마음에 드실 겁니다.”
마담 르네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들었소. 1896년 첫 출시된 루이비제의 모노그램 캔버스. 그중 티에리 비제가 손수 제작한 특별주문제품이 발견됐다죠?”
“네. 보관 상태가 매우 양호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회사 기록에서는 그 제품에 대한 정보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베니에 총수의 눈빛에 살짝 의구심이 어렸다.
하지만 마담 르네는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특유의 자신감마저 어려 있었다.
“괜히 귀한 자리를 만든 게 아니지요.”
“하하하. 크리스티앙을 못 믿는다면, 누굴 믿겠소.”
베니에 총수는 의심의 빛을 거두고 통쾌하게 웃었다.
“궁금하군요. 티에리 비제가 얼마나 대단한 예술품을 만들었을지.”
“아마도. 무엇을 상상하시든, 상상 그 이상이실 겁니다.”
“상상 그 이상? 하하하. 이거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내가 무조건 낙찰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군.”
크리스티앙은 이번 경매가 끝나고, 샤또 메종 발루아를 지그프리드 박물관으로 오픈할 계획이었다.
500여 점이 넘는 지그프리드의 수집품 중 그의 기록이 남아있는 건 120점.
그중 20여 작품이 이번 VIP 경매 대상이다.
VIP 경매에 낙찰되는 순간, 이 작품들은 완벽히 비공개될 예정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낙찰자만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루이비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들의 예술품을 소유하게 된다면, 루이비제는 자신의 우수성을 세상에 공표하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루이비제는 혈안이 되어 경매에 참여할 것이다.
마담 르네가 베니에 총수의 방문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에는 하나의 목적이 더 있었다.
대중적인 트랜드의 정점, 하이엔드 명품의 꼭대기에 서 있는 이 거부의 평가가 이번 경매에 있어 큰 이슈를 끌어모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니에 총수의 뒤에 서 있는 저 남성.
루이비제의 히트 제조기라 불리는 수석 디자이너 사샤 마르소.
그의 행보는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관심을 이끌고 있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럽시다.”
그때, 베니에 총수의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사샤 마르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마담 르네가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는 잠시 외관을 구경하다 들어가도 될까요?”
“흠?”
총수가 의아한 얼굴로 사샤를 바라보았으나, 사샤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주변을 탐색하기 바빴다.
“그러시죠. 니콜.”
“네. 마담.”
“마르소 님을 안내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마담 르네와 베니에 총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사샤는 입구의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