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68)
068화. 더 높은 곳으로 (3)
사샤가 이곳에 온 것은 딱히 발루아 경매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었다.
“사샤, 자네가 내일 총수님과 좀 동행해 줘야겠어.”
“총수님과요?”
“그래, 발루아 경매장에 루이비제 1896년 주문 생산품이 전시된다고 하더군. VIP 경매 한정으로.
만약 총수님께서 낙찰받지 못하면, 언제 그 물건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는군. 사진 촬영이 불가능한 곳이라, 자네 기억력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이네.”
회장의 말대로 사샤는 한 번 본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가 건축을 전공했음에도 명품 브랜드의 수석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출중한 기억력이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곧 있을 S/S 시즌 런웨이 준비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수가 오라는 데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샤는 못 한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꾸역꾸역 삼키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1896년 생산된 모노그램 캔버스 여행 가방이라면 그도 박물관에서 직접 본 적 있었다.
같은 시기, 같은 디자인을 베이스로 한 여행 가방이 달리 특별한 게 있을까?
사샤는 큰 기대감 없이 총수의 차에 올랐었다.
그러나 마이바흐가 발루아의 입구와 마주했을 때, 피곤에 절어 흐릿하던 그의 동공에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음? 저게 뭐지?’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철재 장식 대문.
포도 덩굴과 물망초를 닮은 꽃,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 등 자연의 형태에서 모티브를 따온 형태미.
마이바흐가 멈춰 서자 풍부한 상상력으로 탄생한 출입문의 틈새가 벌어지며 길 양옆으로 정갈하게 다듬어진 초록의 정원이 그들을 환영했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의 눈길은 창밖의 대문디자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끊임없이 성장하며 주변을 잠식하는 강인한 생명력이 저 차디찬 금속에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멀어지는 대문을 아쉬워하며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눈 앞에 펼쳐진 건축물의 형태에 압도되어 버렸다.
“이게… 대체!”
총수와 함께 있다는 것도 잊고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그가 잇지 못한 감탄은 총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단하군. 이런 곳이 있는 것을 왜 여태 몰랐지?”
총수의 말대로였다.
사샤 역시 파리에 나고 자랐다.
파리의 역사적인 장소를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젊은 시절 그는 프랑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크리스티앙이 오랜만에 대단한 작품을 꺼내 놓았군.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줄 것이지.”
총수의 음성도 어딘가 들떠 있었다.
총수와 마담을 먼저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고 사샤가 급히 향한 곳은 건물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도로 정원의 한 가운데.
그곳에서 건축물을 살펴보며 연신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뒤늦게 쫓아온 니콜이 잠자코 그의 곁에 섰다.
정면을 향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샤.
사샤의 눈길이 건물을 살피다가 뭔가 떠오른 듯 허공을 바라보기를 수차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던 그는 20분을 훌쩍 넘기고서야 입을 열었다.
“경매 후에 이곳을 공개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혹시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될까요?”
“말씀해 보십시오.”
이어지는 사샤의 제안에 니콜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일자로 다물고 답했다.
“마담께 말씀 전달하겠습니다.”
사샤가 강렬한 시선을 보내며 빠르게 말했다.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조급하면 진다.
사샤는 겉으로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니콜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만 들어가시죠, 두 분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러죠.”
걸음을 맞춰 걷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가슴을 두드리는 심장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도 들릴까 싶어서.
* * *
“네? 루이비제 S/S 시즌 런웨이를 발루아에서 할 거라고요?”
– 네. 베니에 총수께서 직접 부탁하신 일이라고 하네요. 호호호. 분명 엄청난 이슈가 될 거예요.
“아….”
예건은 어안이 벙벙했다.
루이비제라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3대 명품 브랜드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럼 런웨이는?”
– 그건 경매 끝나고 진행할 예정이고요. 그 전에 발루아 관련해서 인터뷰가 먼저 들어갈 겁니다.
“오오~.”
– 그런데 정말 안 올 거예요?
어정쩡한 감탄사를 보태자, 니콜이 토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예건이 상의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니콜 혼자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VIP 경매는 부모님께서 가시기로.”
– 경매 때 말고요. 인터뷰하기로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니콜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유명해지고 싶다면서요?
“네.”
– 그럼 직접 매스컴에 더 적극적으로 홍보해야죠.
“그렇긴 한데. 지금 중요한 납품이랑 겹쳐져서. 하하하.”
– 하아- 뭐, 일 때문이라니 어쩔 수 없지만, 인터뷰는 꼭 했으면 하는데….
니콜이 아쉬운 소리를 했지만, 예건이 답이 없자 이내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의 뜻이 확고할 때는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 그럼,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예건은 눈을 반짝였다.
“지금은 프로젝트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어.”
발루아가 과거 자신의 실력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라면, JJ엔터 사옥 프로젝트는 현생에서 가장 공을 들여 디자인한 건축물이다.
당장 완성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설계를 대충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발루아와 달리 JJ엔터 사옥은 자신이 직접 현장에 상주하며 총괄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설계 도서에 놓치는 부분이 생기면 분명 그 문제는 퀄리티에 작든 크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완벽해야 해!”
예건은 눈을 부릅뜨고 테이블에 놓인 도면에 다시 집중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도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에서 직접 준비하는 인터뷰의 파급 효과가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리라.
“이것 참. 몸을 둘로 나눌 수도 없고.”
그러다 문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인터뷰, 영상으로 하면 안 되나?”
결심이 서자, 누구에게 협조 요청을 해야 할지는 금세 답이 나왔다.
JJ엔터를 답사할 때 보았던 미니 스튜디오가 생각난 것.
예건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곧장 이재정 대표에게 연락을 취했다.
“안녕하세요. 이 대표님, 부탁드릴 게 하나 있는데요.”
– 오~ 한 디자이너가 나한테 부탁을 다 하고…. 뭡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면, 적극적으로 돕죠.
이재정 대표는 스튜디오를 빌려주는 것을 흔쾌히 수락했고, 예건은 곧바로 인터뷰 촬영 일정을 잡았다.
“좋은 때다. 몸이 하나라도 기술을 잘 이용하면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니! 하하하.”
예건은 너무도 즐거웠다.
과거에는 비루한 체력과 한정된 시간,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일들이.
이번 생에는 과학 기술의 도움 아래 엄청난 속도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더 이상 끊임없이 머릿속을 유영하는 이미지들을 한계 속에 가둬둘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 땅이 원하고, 자신이 원할 때.
허공의 영감을 잡아 도면으로 그려내면 그뿐이니.
정말 마법 같은 시대가 아닌가!
* * *
발루아 건과 관련된 설계 과정 인터뷰를 영상으로 만들어 전달하기로 했다고 김수훈 대표님께 보고했더니, 이왕이면 국내용 인터뷰 영상도 같이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셨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하겠다고 했더니, 김연희 대리를 인터뷰어로 붙여 주었다.
JJ엔터 사옥, 미니 스튜디오에 자리 잡은 한예건과 김연희.
김연희는 유독 긴장한 얼굴이었다.
예건은 미안함에 평소보다 다정하게 말했다.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방송. 출연은. 처음이라. 호호호. 어차피 저는. 질문만 읽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하다 보면 나아지겠죠.”
그렇게 말하는 김 대리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발음을 정확히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더 안쓰러워 보였다.
“너무 긴장되시면, 천천히 심호흡을 해 보세요. 이렇게. 코로 숨을 들여 마시고 스으읍~ 하-.”
“스으읍~하- 스으읍~ 하-.”
몇 번을 심호흡을 따라 하고 난 후에야 백지장 같던 김 대리의 낯빛이 돌아왔다.
저 멀리 둘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촬영감독이 손을 들고는 웃으며 말했다.
“준비되시면 시작하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몇 번 더 호흡을 가다듬은 김연희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차분해진 모습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그녀 말대로 질문지에 적힌 것만 순서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었으니, 어려울 것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잠시 본인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건림 건축사무소 기획팀 팀장, 한예건이라고 합니다.”
“올해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샤또 메종 발루아라고, 프랑스 파리 루아르 계곡 인근 조그마한 고성의 복원을 맡았습니다.”
몇 번 대화가 오가니 딱딱하던 분위기가 훨씬 여유로워졌다.
긴장했던 김연희가 살짝 리액션을 가미할 수 있을 정도로.
“오~ 고성이요? 규모는요?”
“지상 3층 규모의 작은 고성인데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으로 비교하면, 한양 외곽에 양반이 살던 주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훨씬 이해가 잘 되는군요. 그런데 그 고성의 복원이 특별한 이유가 뭘까요?”
“발루아 성이 지그프리드 빙이 마지막 인생을 담았던 별장이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죠.”
“지그프리드 빙이라면, 19세기 말 유럽에 동양의 예술품들을 전파했다고 알려지는 유명한 수집가이자 무역업자죠?”
“맞습니다. 예술을 보는 탁월한 안목으로 아르누보 양식을 프랑스에 알린 수집가이기도 하죠. 발루아에는 그가 생전 가장 아끼던 예술품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예술품들이요.”
“오오!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던 예술품이라, 굉장히 기대되는데요. 혹시 사람들이 알 만한 예술가의 작품도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일러스트로 유명한 알폰스 무하의 작품과 특별히 주문 제작한 루이 비제(루이비제)의 여행 가방, 그리고 티파니의 비공개 보석, 현재는 자동차 브랜드로 더 유명한 카를로 부가티의 가구도 있습니다.”
김연희가 감탄을 자아냈다.
“루이비제에 티파니, 부가티까지. 세계 유명 브랜드들은 다 모여 있군요. 게다가 모두 비공개 예술품!”
“그렇습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예건의 역할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어떤 업무를 맡게 되었는지, 예건이 총괄디자이너가 된 이유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그가 얼마나 열정을 기울여 프로젝트를 진행했는지, 지난 4개월 동안 작업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김연희였다.
예건이 있던 사실을 담담히 말하는 것뿐인데도, 가슴이 벅차 괜히 목이 멨다.
“듣기만 해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셨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 데요.”
“네.”
김연희가 질문하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이거 어제는 못 봤던 질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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