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7)
007화. 환영의 샘 (3)
재작년, 모형실 전담으로 옮기기 전까지 주효섭 과장도 설계부서 소속이었다.
주효섭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흐리게 떴다.
“예전에 정기택 상무님이 저희 팀 팀장으로 계실 때요. 저한테 전원주택 설계를 하나 맡기셨거든요.”
“전원주택 설계를? 그런 프로젝트가 있었나?”
주효섭은 당시 아파트 설계부서인 설계 5팀 소속이었다.
입사하자마자 아파트 단위세대의 화장실 실시 도면을 수정한 것을 시작으로 6년, 팀장급 상사가 대강 그려준 아파트 평면을 디테일하게 정돈할 수 있는 수준이 되고 나서야 과장 직급을 달게 된 주효섭.
당시 성장기에 있던 건림건축은 소규모 전원주택은 아예 설계 의뢰를 받지 않았기에, 주효섭은 팀장이 자신에게 주택 설계를 맡긴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팀장이 하라니 할 수밖에.
유명 대학의 교수였던 건축주는 자연 속에 하나의 풍경처럼 보이는 그림 같은 전원주택이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또한, 주변의 지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자연을 향한 시야는 넓게 열려 있되, 외부의 시선은 차단해 안정감 있는 주거 환경을 갖추길 바랐다.
효섭은 그런 건축주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디자인했고, 그 중간 과정들을 모두 정기택 상무에게 실시간으로 공유했다.
하지만 정 상무는 그의 작업물을 도통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효섭아. 내가 누누이 말했잖니? 그럴싸하게 형태만 만들 생각만 하지 말고, 건축주가 이곳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싶어 할지,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할지, 그걸 생각하면서 만들어야 한다고.’
‘…네.’
‘나는 도대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이걸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이후 효섭은 현장까지 방문해 가며 건축주의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하였고, 그걸 충분히 디자인에 녹여냈다고 생각한 작업물을 정 상무에게 보여주었으나.
정 상무는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며 좀 더 넓은 시야로 설계에 임하기를 그에게 요구했다.
‘주 과장, 좀 더 창의적으로 접근해 보는 게 어떨까? 여기는 아파트가 아니니까, 훨씬 더 다양한 평면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니?’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감은 떨어지고.
그의 오랜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획일화된 사고가 자유분방한 설계에 번번이 태클을 걸었다.
결국, 효섭은 스스로 만든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마감 기한을 며칠 앞두고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전원주택의 설계는 결국 정기택 상무가 마무리해야 했다.
자연을 향해 병풍처럼 펼쳐진 평면.
긴 평면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난 기다란 복도에는 사유의 공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건축주는 그 비효율적인 공간을 너무도 좋아했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정 상무님이 만든 평면을 보니까, 그제야 제가 뭘 잘못하고 있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아파트 실시만 계속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기능성, 효율성만 따지고 있었던 거예요.”
효섭이 모형팀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자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틀에 박힌 아파트를 벗어나 다양한 건축을 접하고 싶었다.
모형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3차원적인 공간을 경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간의 프로세스가 몸에 습득될 것 같아서.
“정 상무님께서 나중에 알려주셨어요. 제가 너무 일찍부터 공장의 부속품처럼 아파트 설계만 했던 것이 안쓰러워서,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더 몰아세운 거라고. 제가 서 있는 곳이 낭떠러지라는 것을 깨달으면, 스스로 바른길을 찾을 거로 생각했다고.”
공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경험하지 못하는 건축가는 제대로 날개를 펴지도 못하고 그대로 추락한다는 부연과 함께.
“크아~. 상무님이 그런 면이!”
“하하하. 저도 나중에 듣고 놀랐어요. 그것도 모르고 처음에 왜 나만 들들 볶냐고 속으로 얼마나 상무님을 원망했었던지.”
효섭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형팀 맡고 난 후에 이제는 조금씩 스스로 깨우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효섭의 눈가에 안타까운 빛이 어렸다.
“천재는 이길 도리가 없다는 걸 결국 깨달았어요.”
“천재?”
“네. 게다가 노력까지 하는 천재예요. 도무지 따라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주효섭이 오늘따라 흡연실에 자주 오는 이유였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건이 모형실로 오고 난 후로 자꾸 자신의 노력을 되돌아보게 된다.
예건은 처음 모형실에 왔을 때부터 인턴이라고 대충대충 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능마저 넘치는 녀석이 주어진 일을 100%, 아니 200% 넘게 해내는 것을 곁에서 지켜 보고 있으니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박 이사의 물음에 효섭이 눈을 빛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가우디. 어쩌면 멀리서 찾으실 필요 없으실 거 같아요.”
주효섭은 떨리는 입술을 질끈 씹었다.
예건의 스케치에서 보았던 천재의 면모를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에서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노란색 반투명 트레이싱 종이에 힘있게 단숨에 그려간 필치.
그걸 보며 몇 년 전 ‘가우디전’에서 보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러프한 스케치가 문뜩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과정을 뭐라 이성적으로 표현할 방법은 없었지만, 지난 이틀 한예건을 보면서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천재란 이런 놈들을 말하는 거구나.’
효섭이 멍하니 있자, 조급해진 박 이사가 그를 재촉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효섭이 휴대폰을 꺼내 찍어 놓은 사진 하나를 박 이사에게 보여주었다.
어제 이주홍 이사가 가져간 예건의 조형 스케치를 찍어 둔 것이었다.
“이번에 저희 모형실에 들어온 인턴이 그린 거예요.”
“오오~. 구도가 딱 잡힌 게 제법이네. 뭘 보고 그린 거야?”
“보고 그린 게 아니에요.”
“그럼?”
“이주홍 이사님이 가져온 컨셉 보고서를 보자마자 녀석이 단숨에 휘갈겨 그린 거예요.”
인턴이.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렸다고?
박 이사는 다시 한번 사진을 주의 깊게 살폈다.
건림건축도 1995년 즈음에야 CAD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도면화하기 시작했으니, 박 이사의 30대는 손 도면과 함께였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 잘 그린 스케치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다.
노란 트레이싱 종이 위에 플러스 펜으로 그린 필치는 힘이 넘치면서도 유려했다.
조형의 비율, 입체감, 마감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은 균형 잡힌 스케치.
언뜻 보면 대충 그린 것 같으나, 필치에서 느껴지는 기백은 장인의 면모가 엿보였다.
박 이사가 관심을 보이자, 주효섭이 먼저 권유했다.
“이사님, 모형 진행 상황 한 번 보시겠어요?”
효섭의 제안이 단순히 모형이나 보러 가자는 말이 아님을 알아챈 박노훈이 기꺼운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러지.”
“그럼, 이건 제가 잘 태우겠습니다.”
어느새 자신이 담배를 피러 왔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린 박 이사의 담배는 그렇게 주효섭 과장의 주머니에 자리를 잡았다.
* * *
아크릴과 라이싱 보드 패널의 접착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와~. 이렇게 만드니까, 진짜 디테일이 사네요.”
콘타 도색을 마치고 모형실로 돌아온 지연이 예건의 작업 과정을 옆에서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검은색 미술가용 앞치마를 입은 지연은 페인트 작업을 하면서 장갑도 끼지 않은 건지 손에 온통 하얀 페인트를 묻히고 돌아왔다.
예건은 혹시라도 그녀가 묻혀 온 페인트에 모형이 닿지 않도록 주의 깊게 신경 쓰면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도색은 다 끝났습니까?”
“프라이머 작업만 끝났어요. 앞으로 2번은 더 칠해야 할걸요. 지금 말리고 있어요.”
“도색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그래요? 그럼 30분 있다가 잠깐 쉴 겸 같이 가요. 저는 페인트칠할 때가 제일 재밌더라고요.”
완성된 모형들이 굉장히 곱게 채색이 되어 있는 걸 보았기에, 어떤 도구로 페인팅을 하는지 궁금하긴 했다.
코끝이 간지러운지 씩 웃으며 검지로 코를 긁는 지연.
그녀의 코끝에 생크림 같은 하얀 페인트가 콕 찍혔다.
아직 페인트가 안 말랐다는 사실에 놀란 예건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친 지연이 쑥스러운 듯 해맑게 웃었다.
어색함에 예건이 서둘러 시선을 돌리다 지연이 잘랐던 라이싱 보드에서 멈췄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죠? 힘들게 잘라 놓은 걸 쓰지 못해서.”
“어쩔 수 없죠. 예건 씨가 만들어 놓은 게 더 좋으니까.”
화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쿨한 성격인 모양이다.
어제 예건이 열선으로 조각품에 버금가는 조형물을 만드는 것을 본 이후로 지연이 예건을 보는 눈빛이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6개월 동안 매일 지겹도록 사용한 열선기였으나, 그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연은 내내 고민만 하던 속마음을 꺼내 물었다.
“그건 그렇고, 어제 그 열선기요. 어떻게 그렇게 잘 다루게 된 거예요? 저도 좀 가르쳐 주면 안 돼요?”
“흠…. 그냥 하다 보니까 되던데요.”
“에이~. 솔직히 말해 봐요. 전에 열선기 써 본 적 있죠? 한두 번 써본 솜씨가 아니던데.”
바른대로 말해도 안 믿을 거면, 왜 물어보는 건지.
이럴 때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상책이다.
“이거 다 하고 알려드릴게요.”
지연이 뭐라 한마디 더 하려다가 주효섭 과장이 박노훈 이사와 함께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박 이사님.”
“어, 지연 씨. 우리 프로젝트 때문에 수고가 많아.”
주 과장이 간식이 한가득 들어 있는 봉투와 원두커피가 든 종이 캐리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직원들을 소집했다.
“자자, 다들 와서 간식 먹어. 박 이사님께서 우리 모형팀 고생 많다고 쏘시는 거야.”
“하하하. 뭐, 주 과장도. 이게 뭐, 별거라고.”
“와~.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매일 파티네요.”
김준호 대리가 신난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테이블에 놓인 간식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커피에 조각 케익까지? 이사님, 잘 먹겠습니다.”
김 대리의 환호성에 지연도 쪼르르 테이블로 다가왔다.
“와! 티라미수도 있네요. 감사합니다. 이사님.”
주 과장이 아직 모형에서 손을 떼지 못한 예건을 불렀다.
“예건 씨도 좀 먹고 해.”
“네. 이것만 붙이면 끝납니다.”
예건이 하고 있던 작업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펴보고 있던 박 이사가 놀란 얼굴로 가까이 다가갔다.
“주 과장, 설마 이거 우리 커튼월(고층 빌딩에서 주로 사용하는 비내력 외벽)인가?”
“하하하. 맞습니다.”
원래라면 아크릴에 무광의 라이싱 보드가 체크 모양으로 붙어 있었을 커튼월 모형이었으나, 한예건의 아이디어로 빛나는 펄 광택과 함께 섬세한 줄눈마저 표현되어 예술 작품으로 변모한 것이다.
“자네가 기대하라고 했던 게 설마 이건가?”
“후후후. 저도 디테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새 예건의 곁에 바짝 붙어 선 박노훈과 주효섭이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정말 대단하군. 이렇게까지 표현할 수 있다니.”
박 이사의 미간에 진실의 주름이 잡혔다.
“아까 제가 보여드렸던 스케치 사진도 예건 씨 손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
잠시 고민한 박 이사가 결심한 듯 주 과장에게 물었다.
“예건 씨, 내일 하루만 우리 팀에 보내줄 수 있겠나?”
박노훈 이사의 물음에 김 대리와 이지연 사원이 놀란 토끼 눈으로 주 과장을 바라보았다.
예건이 빠르게 주변 건물 작업을 완료해 주었기에 조금 여유가 생기기는 했으나, 아직 디자인이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어 하루라도 본 건물을 완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 과장은 바로 답변을 하지 않고, 예건에게 물었다.
“예건 씨, 내일 잠시 설계 3팀 업무 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설계팀이란 말에 예건은 귀가 솔깃했으나, 완성되지 않은 모형이 조금 신경 쓰였다.
“제가 가서 뭘 해야 하는 겁니까?”
그 대답은 박노훈 이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하는 일과 전혀 연관 없는 업무는 아니야. 아직 디자인이 나오지 않은 입구 부분 때문이거든.”
“아….”
“환영의 샘 디자인이 막혀서 곤란했는데, 건축주인 병원 이사장이 건축가 가우디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얻었네. 그래서 가우디 스타일의 디자인 요소를 첨가할 수 있을지, 한 번 검토해 볼 생각이야.”
‘건축주가 가우디를 좋아한다고?’
예건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박 이사가 부연 설명을 했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가질 건 없네. 직접 디자인을 하라는 건 아니니까. 자네가 그린 스케치를 봤는데, 제법이더군. 그 정도 퀄리티의 아이디어 스케치면 충분해. 어떤가? 도와줄 수 있겠나?”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굴러 들어왔다.
그 누구도 이 일을 자신만큼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는 이는 없을 거다.
‘이건 기회야! 무조건 잡아야 해.’
예건은 기쁜 마음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가능합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