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73)
073화. 열정 (1)
팀원들이 예건의 눈치만 살피며 말하기를 꺼려하자, 하주연 대리가 총대를 맸다.
“여기서 바로 답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닌 것 같아요.”
“당장 의견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시기 어려운 분은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셔도 되고요. 그저 혼자 고민하기 보다는 팀을 이룰 분들과 함께 의논하고 싶어서요.”
예건이 자신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저렇게 많거든요.”
예건이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자, 경직됐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팀장님은요? 팀장님은 하고 싶은 일 없으세요?”
팀원 중에 가장 연차가 적은 윤민수 주임이 궁금한 듯 물었다.
“흠… 솔직히 제가 일을 가릴 입장은 아니라서요. 건림건축에 입사한지 이제 겨우 6개월밖에 안 됐잖아요.”
“아!”
윤민수의 얼굴에 동경의 빛이 어렸다.
예건의 말대로 인턴 2개월, 입사 6개월만에 하나의 팀을 운영하는 팀장이 된 격이니.
“그럼, 잘 생각해 보시고 이번 주 중으로 기획팀에 남고 싶으신지, 아니면 원래 팀으로 돌아가실 건지 의견 주십시오. 저한테 말씀하기 곤란하시면, 장 과장님께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네.”
다들 그 의견에는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예건은 급하게 몰아붙이기 보다는 여유를 갖기로 했다.
장 과장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 보니, 팀원들의 의견을 좀 더 들어보고 싶어하는 것 같고.
예건은 오늘 오전에 이재정 대표와 협의했던 내용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고, 회의를 마무리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죠.”
“네.”
팀원들이 옆 사무실로 돌아가고.
자리에 앉아 쌓여 있는 서류들을 내려다 보았다.
중요도와 시급성, 업무의 난이도에 따라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서류들.
프로젝트의 성격은 천차만별이다.
단순히 조언을 구하는 것부터 집중해서 전력을 투입해야 하는 프로젝트까지.
“사례가 있는 편이 결정하기 더 쉽겠지.”
예건은 엑셀로 표를 만들어 프로젝트별로 상세히 분류하고, 혼자서도 곧바로 지원할 수 있는 일과 팀원들이 필요한 업무를 분류했다.
팀원들의 도움이 필요한 굵직한 프로젝트만 10여 개에 달했다.
그중 대부분이 발주처와 협의 단계인 신규 프로젝트다.
예건은 이 리스트만 묶어 팀원 모두에게 메일로 전송했다.
왜 이걸 보냈는지 의아해할까 싶어, 첨언도 함께 적어 보냈다.
[기획팀에 의뢰 들어온 프로젝트 리스트입니다. 혹시나 결정에 도움이 될까 해서 보내 드립니다.]“자~ 이제 급한 일들 먼저 처리해 볼까?”
예건은 정리해 놓은 서류를 펼치며 디자인 코멘트를 시작했다.
* * *
지이잉-.
김상욱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하나 들어왔다.
설계 5팀, 송정환 이사였다.
김 대리의 표정이 사뭇 무거워졌다.
꽤나 싫은 표정이 역력했다.
[4층으로 잠깐 내려오지?] [네.]맨날 이런 식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 따위 가볍게 무시하는 일방적인 송정환 이사의 강압적인 태도.
김상욱은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맥없이 일어섰다.
설계팀이 집결해 있는 4층에 도착하니, 설계 5팀 팀원들이 그를 반겼다.
“올~. 김 대리, 잘 지냈어? 얼굴 좋아졌네~.”
“네, 과장님. 과장님도 잘 지내셨죠?”
“하하하. 여기야 맨날 똑같지.”
윤기 없는 퍼석한 피부,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떡 진 머리, 퀭한 눈.
어제도 철야를 한 모양이었다.
“이사님은요?”
“어. ‘열정’에 계실 거야. 그쪽으로 오라시더라.”
서 과장이 ‘열정’이라 부른 것은 미팅룸의 이름이었다.
4층의 미팅룸은 숫자 대신 성장, 재능, 기회 같은 처세술 서적에나 나올 것 같은 영어 단어를 붙여 놓았다.
아마도 그런 이름을 붙이자 주장한 이가 송정환 이사였던 것 같은데.
오래된 기억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네. 그럼, 가 볼게요.”
“야! 김 대리.”
김상욱이 뒤를 돌아보자, 서 과장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말했다.
“어, 그… 전에는 내가 미안했다.”
“…지난 일인데요, 뭐.”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다시 오면, 같이 잘 해 보자.”
“…….”
김상욱은 아무 대답없이 어색하게 웃고는 돌아섰다.
[Passion Room]문을 열려던 김상욱의 손이 멈칫했다.
‘여길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문이 안에서 벌컥 열렸다.
“어? 왔나? 왔으면 들어 올 것이지.”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눈길.
김상욱은 마지못해 미팅룸으로 들어갔다.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곧 끝난다고 들었는데.”
“네.”
“그래, 생각은 좀 정리가 되던가?”
“…….”
침을 꼴깍 삼킨 김상욱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퇴사할 생각입니다.”
“쯧.”
혀를 찬 송정훈 이사가 한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자네가 내 밑으로 들어온 게 벌써 5년이지?”
“…네.”
“이제 겨우 말귀를 알아들어 먹는 수준으로 힘들게 가르쳐 놨더니. 쩝.”
김상욱이 테이블 밑으로 쥔 손을 더 꽉 쥐었다.
‘젠장, 힘든 건 당신이 아니라 나였거든!’이라고 대꾸를 하고 싶지만, 목소리가 쉬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머리만 어항 속에 갇힌 기분이다.
입을 뻐끔거리면 금방이라도 물이 들어차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김 대리가 잠자코 있자 송정훈은 독사 같은 혓바닥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퇴사하면, 갈 곳은 정했고?”
“…아직.”
“뭐, 도면 치는 속도는 빠르니 어디 허접한 외주 업체 정도는 갈 수 있겠지. 하지만 괜찮겠어? 평면 계획 한번 해 본 적 없는 반푼이를 좋아할 회사는 없을 텐데. 자네가 해 본 거라곤 화장실이랑 계단 계획밖에 없잖아.”
날 그렇게 만든 게 당신이잖아!
고개 숙인 김상욱의 눈동자가 분노로 떨렸다.
하지만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저 말이 사실이니까.
설계 5팀은 공동주택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부서다.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아파트 설계 건수가 급속히 늘어나며, 설계 5팀의 공동주택 수주가 건림건축의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프로젝트가 밀려드니, 디자인의 완성도보다는 쳐내는 속도가 중요했다.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직원들의 업무 능력에 따라 담당하는 도면이 정해졌고, 당시 1년 차였던 김상욱은 화장실과 계단 설계를 맡았다.
화장실과 계단 같은 부속 시설은 디자인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없었다.
덕분에 해가 지날수록 도면을 그리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완성도도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작업이 빨리 끝난다고 여유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일이 빨리 끝날수록 업무의 양은 늘어났다.
남들과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
그것이 다른 이들은 따라올 수 없는 자신만의 차별화된 능력이라 생각한 김상욱은 아무 불만 없이 업무에 매진했다.
하지만 바쁜 일정에 정신없이 3년이란 시간을 채우고 겨우 숨통이 트여 돌아보니, 다른 팀으로 들어간 동료들은 어느새 프로젝트 하나를 맡아 계획부터 인허가, 실시도면 작성까지 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며, 겨우 할 줄 아는 게 화장실과 계단디자인뿐이라니!
김상욱은 그제야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송정환 이사에게 부서 이동을 요청했다.
하지만 팀의 전력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송정환 이사는 계속 그의 부탁을 미루며 강압적으로 업무를 배분했다.
그리고 4개월 전.
손목터널증후군이 생기고 나서야 미뤘던 퇴사를 결심하고 사표를 제출했을 때, 송정환 이사는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겨우 손목 아픈 걸로 퇴사를 고민하다니. 그런 약해 빠진 정신머리로 건축가가 될 생각이라면 차라리 빨리 그만두고 치킨집이나 차리는 게 낫겠군.’
그때를 떠올리니, 겨우 욱여넣었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김상욱은 겨우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자존심을 주섬주섬 챙기고는 고개를 들었다.
“송 이사님.”
김상욱의 분노를 다시 피어난 열정이라 판단한 송정훈 이사가 부드럽게 회유를 시도했다.
“그래, 자네가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지? 다음 프로젝트는 단위세대 설계부터 우리 김 대리가 차근차근 해 볼 수 있게 기회를 줄 테니, 일단 팀으로.”
“치킨집.”
“뭐?”
“퇴사하고 치킨집 차릴 거라고요!”
송 이사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 서늘해졌다.
“야, 김상욱! 너 인마 아무리 화가 나도, 그건 아니지.”
“방금 이사님께서 하신 말씀은 한국의 10만 치킨집 사장님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거 알고 계십니까?”
“뭐?”
송정훈 이사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송 이사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이깟 설계 때려치우고, 보란 듯이 치킨집 차려서 성공할 겁니다!”
대학 때, 설계 전공 교수님이 수업을 마무리하며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니들은 건축 때려치고, 치킨집을 차려도 웬만한 사람들보다 성공할 거다. 지금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 이번 학기 설계 과정을 떠올려 봐라. 직접 공간을 기획하고, 끝까지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 완성하는 것. 그게 바로 사업의 과정이다.
니들이 매번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만들어 내는 것. 지금 당장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에는 그게 다 살이 되고 피가 될 거야.’
김상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이 아니면, 이 지긋지긋한 열정의 지옥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후련한 마음으로 미팅 룸을 빠져나왔다.
그는 문에 적힌 ‘Passion’이라는 단어를 노려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사무실로 돌아온 김 대리는 서랍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사표를 꺼내 한 팀장에게로 향했다.
사직서라고 적힌 봉투를 내밀자 한예건이 눈을 크게 뜨고는 물었다.
“어? 김 대리님, 이게 뭡니까?”
“기획팀에 오기 전부터 퇴사할 생각이었습니다. 인사팀에서 팀을 옮겨줄 테니, 한 번만 더 고민해 보라고 해서 미뤘던 겁니다.”
“아… 그랬군요.”
한예건은 순순히 사직서를 받았다.
“그래도 사유는 알고 싶은데요. 인사팀에서 물어보실 것 같아서요.”
“퇴사하고 치킨집 차리려고요.”
“치킨집요?”
“네.”
예건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치킨을 아주 많이 좋아하시는 모양이네요.”
“…….”
맑은 얼굴로 물어보는 한예건의 질문에 김상욱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열 받아서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치킨을 맛있게 먹는 것 말고는 딱히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답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정중하게 물으니,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예건은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다.
아직 어린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인데도, 이상하게 거스르지 못하는 위엄이 느껴졌다.
김상욱은 뱃속에서 여전히 타오르는 화를 삭이며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 JJ엔터 프로젝트 상세도면은 누가 그리신 건가요? 음… 계단이랑 화장실요.”
화끈.
순간 송정환 이사의 얼굴이 떠올라 열이 올랐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뇨.”
예건이 고개를 저었다.
“굉장히 섬세하고 꼼꼼한 분이 작업하신 것 같아서요. 도면에 애정이 가득하더라고요.”
하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그림 같은 예술도 아니고, 기능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 도면에 무슨 애정이 담긴단 말인가?
하지만 잠자코 있었다.
자신의 노력을 조금이라도 인정받는 것 같아서. 위안이 되었다.
예건은 JJ엔터의 도면을 꺼내 화장실 도면을 펼치고는 화장실 입면도를 가리켰다.
“음… 이 타일 줄눈 부분 말입니다. 우리 회사 건축 도면은 화장실 타일이 들어가는 부분에 사각형 해치만 대충 넣고, 치수나 배치는 신경 쓰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이 도면은 타일 사이즈, 평면, 입면의 타일 줄눈 위치까지 맞췄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인테리어를 완성했을 때도 고려한 디자인인 거죠.”
김상욱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눈만 끔뻑였다.
“보통은 소홀히 하기 쉬운 부분이죠. 인테리어는 건축공사 범위가 아니니까, 대충 그려도 딱히 문제 될 것도 없고.
하지만 이 도면을 그린 분은 완성 이후까지 생각하고 디자인을 하셨겠죠. 어차피 인테리어도 건축 도면에 기반해 작업하게 되니까. 미리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놓은 겁니다.”
예건이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그 또한 완성을 고려해 설계한 것이니까.
“건축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분이 우리 기획팀에서 저와 꼭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순간, 김상욱은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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