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83)
083화. 예술, 새로운 영감의 원천 (2)
“그거? 뭐?”
자크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발루아 전시 후 가치를 높여서 팔 생각인 거 아닐까? 곧 메종&아트가 인정하는 신진 디자이너가 되면 브랜드 가치도 올라갈 테고. 미스터 한이 발루아 복원 디자이너로서 재평가도 될 테니까. 어차피 한 작품만 만드는 거 최대한 값어치를 높이겠다는 거지.”
“흠…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딱히 돈을 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고민도 하지 않고 알겠다고 했으니까.
“내 말이 맞다니까. 두고 보라고. 아마 우리 쪽에서 제시할 금액보다 배는 높게 요구할 테니까.”
그러나 자크의 말도 일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아니면….”
VIP 경매 후반으로 갈수록 두드러졌던 한 사람의 독점.
패들 넘버 27번.
그 사람이 이번 경매에 뿌린 돈만 2천만 달러(250억 원)에 달했다.
대리인으로 참석한 그 사람의 정체는 마담 르네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
‘그걸 미스터 한이 알 리가 없지.’
“아니면 뭐?”
“아니다. 뭐,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그나저나 궁금하네. 어떤 디자인의 가구를 만들어서 보낼지.”
“그렇지? 가능하면 좀 빨리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특별 경매 끝나면 발루아 내부가 썰렁해질 것 같거든.”
“하긴 그래. VIP 경매 때도 예상보다 더 고가로 낙찰되었으니까. 특별 경매도 유찰되진 않을 것 같네.”
이미 새로운 주인을 찾아 자취마저도 남지 않은 가구들의 빈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니콜의 눈이 돌연 반짝였다.
“멋지겠지?”
“응? 뭐가?”
“미스터 한이 직접 세팅한 인테리어라니. 어쩐지 이 장소와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아.”
니콜의 예상이 전혀 억측이 아님을. 자크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미스터 한.
그 남자는 항상 예상하지 못한 결과물을 가져오는 사람이었으니까.
* * *
루이비제 패션쇼 준비로 발루아 인근이 떠들썩하든 말든.
니콜은 오랜만에 주어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바쁜 일정에 만남을 미루었던 친구와 집 근처 브런치 카페에서 만나 배를 채우고, 뮤지컬도 한 편 봤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센강 변을 거닐며 수다를 떨다, 아침에 예약한 미쉐린 인증 별 3개 레스토랑에서 섬세한 프랑스식 코스 요리를 먹으며 곁들인 고급 와인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였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직도 휴식이 3일이나 남았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며 자유를 만끽했다.
풍미 좋은 아라비카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창을 활짝 연 니콜은 창틀에 기대 에펠탑을 배경으로 저물어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여유롭게 감상했다.
파리의 고풍스러운 풍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임대료가 비싸기로 유명한 파리 6구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샤라라라~ 샤라라라~
요정의 날갯짓 소리 같은 문자음이 울린다.
“벌써 집에 도착했나?”
친구가 남긴 안부 메시지인 줄 알고 기쁜 마음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으나, 문자의 발신자는 친구가 아니었다.
“아니, 이 남자는 주말도 없나?”
폴더폰을 그대로 접으려다, 메종&아트 가구 제안 때문인가 싶어 일단 내용만 확인하기로 했다.
아직 전시회까지 시간 여유는 충분하니, 내용만 확인하고 출근 후 의견을 전달하면 될 거다.
역시나.
메시지의 내용은 메종&아트에 전시할 아르누보 스타일의 가구와 관련된 자료를 메일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어떤 디자인일까?’
순간의 호기심이 휴식을 원하는 직장인의 소망을 이겨버렸다.
결국, 노트북을 켠 그녀는 한예건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고 곧바로 첨부 파일을 바탕화면에 다운 받았다.
비스켓을 챙겨 자리로 오니, 화면에는 파일 다운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림 파일. 흠… 몇 장 안 되니까, 확인만 하자.”
따딱.
마우스 더블클릭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스케치 사본.
“어? 발루아 응접실이잖아?”
출입문에서 응접실 내부를 바라본 방향을 그린 투시도는 자신의 기억 속 가구 배치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숨은그림찾기도 아니고.’
기존에는 없었던 격조 높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가구와 벽 장식.
화려한 꽃무늬 패턴의 카펫과 디테일이 섬세한 조명 등.
내용만 확인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달라진 것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결국, 꼼꼼히 눈에 담으며 분석을 시작했다.
나머지 스케치들은 샤또 메종 발루아의 식당, 거실, 침실의 내부였다.
모두 인테리어는 기존과 같으나 가구와 장식이 재배치되거나, 새로 생긴 가구가 많았다.
전시회에 추가할 아르누보 스타일 가구 위주로 5종류 정도면 충분할 거라 말했는데, 스케치에 새로 선보이는 것은 그 숫자를 까마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큰 가구만 족히 30점은 될 것 같다.
“설마…. 이걸 다 만들겠다는 건 아니겠지?”
남아 있는 가구와 장식품이 전시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었으나, 덜컥 걱정이 앞섰다.
“이러다가 지그프리드 빙의 별장을 복원한 역사박물관이 아니라, 미스터 한의 작품 전시관이 되겠는데?”
충분히 근거 있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하는 수 없이 니콜은 마담 르네에게 곧바로 연락을 취해 상황을 전달했다.
– 니콜이 보기에 어떤가요?
“미스터 한의 디자인대로 꾸며졌을 경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이 이상 완벽하게 어울리는 디자인을 못 찾을 정도로요. 하지만.”
– 문제는 지그프리드 빙의 별장이 될 수 없다는 거겠죠?
“네.”
무슨 생각인지, 수화기 너머의 마담 르네는 흥미롭다는 듯 작게 웃었다.
– 니콜, 우리가 왜 발루아를 전시회장으로 만들려고 했는지, 기억하나요?
“물론입니다. 미스터 한이 수집한 작품들을 우리 쪽에서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루아를 사들였기 때문에….”
대답하는 니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샤또 메종 발루아를 구입한 것도.
예건의 디자인에 반해 엄청난 보수 비용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니콜, 자신이었으니까.
결국, 자신이 한예건이란 사람을 위해 판을 마련해 준 셈인 것이다.
– 맞아요. 발루아를 상설 전시장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특별 경매를 위한 투자 금액을 회수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죠.
최후의 보루?
두 단어의 조합을 듣자, 니콜의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 말씀은?”
– 발루아를 통으로 매각할 방법만 찾는다면, 딱히 지그프리드의 별장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아!”
그제야 니콜은 자기 생각이 편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크리스티앙이 샤또 메종 발루아에 사용했던 부동산 매입 비용부터 복원을 위한 투자비, 남아 있는 작품들의 가치와 한예건이 새롭게 만들 가구, 소품까지 통째로 구매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큰돈을 지불하고 발루아를 소유하려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니콜이 말을 잃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그 해답을 주었다.
– 패들 넘버 27번.
“네?”
27번!
VIP 경매 작품 중 10여점 가까이 독식했던 존재.
그 번호를 떠올리자, 머릿속이 상쾌해졌다.
– 미스터 한에게 마음껏 디자인하라고 하세요. 하고 싶은 대로. 매각은 제가 책임지죠.
“아… 네.”
* * *
니콜에게서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 하고 싶으신 디자인, 마음껏 하시라는 마담 르네의 확답을 받았습니다. 마담 르네께서 곧바로 매각 진행하실 예정인 것 같습니다.
구구절절 확인하지 않아도, 문자 하나로 답이 되었다.
“오히려 잘됐네.”
남아 있는 장식품의 배치와 유무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오래된 작품들의 가치와 상관없이, 이 공간을 원하는 이가 있다는 의미니까.
“크리스티앙,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다니까.”
마담 르네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밀어줄 때는 확실하게 밀어주는 것을 보니.
유럽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녀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메종&아트 신진디자이너로 선정된 것도 그녀의 입김이 닿은 결과이지 않을까?
디자이너를 신뢰하고, 아낌없이 재산을 내어 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내 능력이 돈이 된다는 것을 그녀가 빠르게 인지한 것 또한 그녀의 탁월한 안목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터.
결국, 이 공생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피곤이 몰려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한 그였으나, 매번 죽기 살기로 디자인에 임했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잡기 벅찬 세상이니까.
묵직한 머리를 의자에 기대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스르륵.
밤새 그를 설레게 하던 상상 속 풍경들이 서서히 어둠에 잠식되었다.
얼마나 자 버린 걸까?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예건이 다급히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오후 2시가 넘은 시각.
예건은 외투와 가방을 챙기고 어디론가 향했다.
“이런, 중요한 약속을 잊을 뻔했군.”
오늘 논현동 상가 잔금을 치르기로 약속한 것을 상기한 것이다.
그는 곧바로 회사 인근 은행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덩치 큰 보안직원이 친절하게 용건을 물었다.
“환전하러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이쪽으로.”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번호표를 건네주었다.
월말에 은행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줄 미처 몰랐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히 앉아 있는 대기자 수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예건은 보안직원에게 자신의 번호표를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제가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흠…. 환전은 별도 창구가 없어서요. 한 시간은 더 기다리셔야겠네요, 고객님.”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보시다시피, 월말이라 손님이 많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보안직원은 미소 띤 얼굴로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예건은 어쩔 수 없이 출입구 근처에 서서 기다려야 했다.
무료하게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답답해 이참에 은행 내부 구조나 익혀야겠다 생각하며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언젠가 은행을 설계해야 하는 날도 오지 않겠는가?
공간의 형태와 배치, 사람들의 행위 및 동선, 공간이 주는 분위기 등을 익히는 것은 그가 평생을 습관처럼 해 오던 일들이다.
은행의 주출입구는 필히 2중으로 배치하고, 내측 문은 안쪽으로만 열리게 하며 가급적 무겁게 만든다.
도난 등의 위기 상황에 대비해 도둑이 쉽게 탈출로를 확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고객의 동선은 짧게 하여 체류 시간을 줄인다.
고객 공간과 업무 공간은 시각적으로는 열려 있어 행원과의 친밀감은 높이되, 대신 내부의 일 흐름은 최대한 고객이 알기 어렵게 해야 한다.
금고의 구조는 바닥, 벽, 천장 모두 철근 콘크리트조로 해야 하며, 그 두께는 30~45㎝에 달한다.
물론 도난 방지를 위함이다.
그 외에도 필요한 공간이 많다. 서고, 지점장실, 상담실, VIP 라운지.
[VIP LOUNGE]VIP 라운지는 은행의 우량 고객을 접객하기 위해 구분해 놓은 장소이다.
특히나 이곳 조은은행 강남점은 전용 고객 대기 공간, 별도의 상담 창구, 상담실까지 갖춰져 있는 제법 큰 규모의 별도 공간이었다.
‘주변에 큰 기업이 많아 VIP 고객이 많은 모양이네.’
마침 그곳에서 잘 차려입은 중년인이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슬쩍 내부를 확인하니, 대기하는 인원도 거의 없었다.
저곳이라면 빨리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회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얼핏 뉴스를 통해 평균 잔액 1억 정도면 VIP 고객으로 분류된다는 것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흠… 내 예금 정도면 VIP 고객에 속하지 않으려나?’
지난 6개월간 건림건축에서 꾸준히 급여를 입금했으며, 어제 크리스티앙에서 입금된 돈이 2,500만 달러(320억)에 달했다.
개인 고객 중 이만한 현금을 가지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을 터.
예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히 VIP 라운지 출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냉큼 보안직원이 예건을 막아섰다.
“실례지만, 어디 가시는 겁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