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84)
084화. 예술, 새로운 영감의 원천 (2)
“VIP 라운지요.”
예건을 살핀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님, 혹시 전담 직원에게 미리 연락은 하셨습니까?”
“아뇨. 그런 건.”
“죄송하지만, VIP 라운지는 VIP 고객 외에는 사용이 어렵습니다.”
하긴 VIP 라운지에 대기 손님이 적다고 아무나 무턱대고 들어가려 하면, 직원 입장에서는 막을 수밖에 없겠지.
예건은 보안직원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그에게만 들리게 작게 말했다.
“25억 정도 환전하려고 그러는데, 그래도 힘든가요?”
“네? 2, 25억…. 아! 고객님, 제가 실례했습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황한 직원이 반쯤 허리를 숙이고는 어디론가 급하게 걸어갔다.
대기실 좁은 의자에 다닥다닥 앉아 있던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그를 향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건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VIP 라운지 입구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중후한 분위기의 남성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양복 상의에는 ‘임현승 지점장’이라고 적힌 명찰이 붙어 있었다.
‘지점장이 직접?’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일단 이쪽으로 가시죠.”
“네.”
그는 VIP 라운지를 그대로 지나쳐 지점장실로 향했다.
“아, 저는 그냥 VIP 창구에서 처리하면 되는데요.”
돌아서서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 보인 그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25억이나 되는 큰돈을 환전하시겠다고 직접 찾아오신 분은 고객님이 처음입니다.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한 일이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은행은 고객님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니까요.”
지점장이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도톰한 카펫 바닥과 고급스러운 색감의 오크 무늬목, 수입 원단으로 마감된 인테리어가 어딘가 중후하면서도 모던한 분위기의 세련된 집무실이다.
확실히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강남에 자리 잡은 지점이라 그런지, 디자인과 마감에 신경 쓴 태가 났다.
그곳에서 반가운 디자인의 소파를 발견하고는 예건이 미소 지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군요.”
“오! 맞습니다. 디자인을 전공하신 모양입니다.”
“건축 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진품이면 꽤 비싸게 구입하셨겠군요.”
“그렇습니다.”
가구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 기뻤는지, 지점장은 아까보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자리를 권했다.
1인용 체어 하나가 천만 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제품.
세트로 별도 판매하는 오트만에 발을 올리고 눕듯이 기대고 있노라면 성공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다고 하던가.
탄탄해 보이는 가죽의 질감이 그리 편하지는 않아 보였으나, 의외로 부드러운 표피에 살짝 놀란 예건은 의자에 가해지는 무게 중심에 따라 탄력 있게 휘어지는 X자 형태의 금속 다리의 탄성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디자인만 멋진 줄 알았는데, 착좌감도 생각보다 괜찮군요.”
“괜히 타임리스 체어라 불리는 건 아니지요.”
타임리스 체어(Timeless Chair).
영원히 사랑받는 의자라는 의미의 그 명칭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두꺼운 가죽을 단추와 실로 고정해 만들어낸 입체적인 질감과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울 같은 금속 재질의 우아한 다리는 시각적으로는 유려한 쾌감을, 심리적으로는 범접하기 힘든 묵직함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는 이 바르셀로나 체어를 두고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의자가 앉는 사람을 평가하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이 의자를 디자인하게 된 목적 때문일 것이다.
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한 스페인 국왕 내외의 휴식을 위해 제작한 의자였기에.
그러므로 바르셀로나 체어는 최고를 향한 욕망으로 들끓는 이들에게 성공했다는 만족감을 주기에 매우 적합한 의자라 할 수 있다.
‘타임리스 체어라, 기회가 된다면 하나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겠네.’
예건이 여유롭게 의자 디자인을 탐색하고 있는 동안 서류를 챙겨온 지점장이 환전을 위한 양식을 건넸다.
“표시해 둔 곳에 환전하실 금액을 적으시고, 이름 옆에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예건이 서류 작성을 마치고, 통장과 환전 신청서를 넘겨주었다.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혹시 차는 어떻게?”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아! 혹시 계좌이체도 바로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여기, 계좌이체 신청서도 작성 부탁드립니다.”
가방에서 상가 거래 계약서를 꺼내 입금 계좌를 확인하고 계좌이체 신청서를 작성해 마저 지점장에게 건넸다.
“바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지점장이 나가고 얼마 뒤, 깔끔한 복장의 직원이 조용히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나갔다.
예건은 향긋한 차를 음미하며, 실내 장식을 분석하듯 살펴보았다.
오래지 않아 업무를 마친 지점장이 아까보다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지점장실 안으로 들어와 업무 처리가 완료되었음을 알려주었다.
“고객님, 환전과 계좌이체 모두 완료했습니다. 환율수수료는 VIP 고객 우대 혜택을 최대한 적용하여 업계 최저 수준으로 맞춰드렸습니다. 아마 다른 은행에 알아보시더라도, 이 수수료로는 절대 환전이 불가능하실 겁니다.”
그가 내민 처리 서류를 확인하니, 환전 수수료가 1%로 책정되어 있었다.
검색으로 확인한 1.7%보다 훨씬 적은 수수료였다.
“감사합니다.”
“현재 저희 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이용하고 계시던데. 잔고를 10억 원 이상만 꾸준히 유지해 주시면, 앞으로도 계속 동일한 수수료를 적용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군요. 그렇게 하죠.”
지점장이 얼른 명함을 내밀었다.
“고객님의 은행 업무는 앞으로 제가 직접 대응해 드리겠습니다. 은행 들르실 때, 번호표 뽑으실 필요 없이 곧바로 지점장실로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환전 수수료도 알아서 업계 최저로 낮춰주고, 기다릴 필요 없이 업무도 빠르게 처리해 주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돈은 많은 편의를 보장하는 수단이다.
예건은 지점장의 명함을 챙겨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
“VIP 고객님께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지점장은 작고 길쭉한 모양의 가죽 상자를 건넸다.
“포장이 고급스럽네요. 뭔가요?”
“건축 설계를 하신다고 하셔서, 도움이 될만한 것으로 골라봤습니다. 열어보십시오.”
가죽 상자 안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샤프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오~ 샤프군요.”
“저희 지점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24K 골드로 도금한 제도 샤프입니다. 사용된 골드 무게만 다섯 돈이 넘죠. 소중한 인연을 만난 기념이라 여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건은 가죽 상자를 가방에 넣고 감사를 표했다.
“귀하게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점장은 은행 출입구까지 예건을 배웅했다.
그가 직접 누군가를 배웅하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기에 직원들마저 눈빛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국내 5대 은행인 조은은행.
그중에서도 매출로 항상 탑을 찍는 강남점 지점장 임현승은 높은 위치에 있는 만큼, 쉬이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지점장이 처음 만나는 VIP를 저렇게 특별 대우할 정도면 엄청난 자산가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출계 과장 하나가 VIP 창구로 가서 넌지시 물었다.
“누군데 지점장님이 저렇게까지 챙기는 거야?”
VIP 창구 여직원이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말했다.
“개인 고객인데, 통장 잔고가 2,500만 달러가 넘어요.”
“뭐? 뭐 하는 사람인데?”
“그냥 평범한 회사원 같던데요.”
과장은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워볼이라도 터진 건가?”
파워볼은 미국 전역에서 한 주에 두 차례 발행하는 로또 복권이다.
1등 당첨확률이 2억9천만분의 1일 정도로 엄청난 경쟁률을 가진 로또이지만, 그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1등 누적 당첨금이 최대 1조 원에 달한 적 있는 만큼 상당한 규모의 복권이었기 때문이다.
‘파워볼이든 뭐든, 잔고가 2,500만 달러면 특별 대우는 당연하지.’
300억 원을 원화로 환전하는 경우 수수료 1%만 고려해도 3억 원이다.
타행 계좌이체를 60만 번은 해야 벌 수 있는 금액.
벌써 올해도 반기가 넘었다.
저런 우량 고객을 잘 관리하는 것이 은행 지점장의 역량이다.
“쩝, 젊은 사람 같던데 부럽네. 우리나라에서도 파워볼 살 수 있나?”
“왜요? 과장님도 사시려고요?”
“사면 뭐하게? 국내에서 파는 로또도 한 번 안 되는데. 그냥 부러워서 하는 말이지. 그나저나 신기하네.”
“뭐가요?”
“통장에 300억이나 있는데, 아직 회사원이라는 게.”
“그게… 입금된 지 하루밖에 안 됐더라고요.”
“아~ 그래? 조만간 그만두겠네.”
“아마도 그렇겠죠?”
* * *
천장고 3.5m의 텅 비어 있는 네모난 상가.
예건은 오늘부터 자신의 소유가 된 이곳을 환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공간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특히 그 공간이 자신의 소유라면 더더욱.
게다가 두둑한 현금이 통장에 쌓여 있어, 계획한 대로 현실화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최고다.
“일단 저 칸막이랑 천장부터 철거하고.”
상가 3개를 나누는 벽을 철거하고, 긴 직사각형의 80평 공간의 미래를 머릿속에 그린다.
완벽한 아르누보 스타일로 변신한 공간을 떠올리니, 마음에 들어 매우 흡족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현실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그의 뇌를 자극했다.
그러다 문뜩 고민에 빠졌다.
아르누보 스타일 가구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의 디자인을 선보일 것인가?
이미 두 디자인 모두 예건의 손을 거쳐 투시도와 도면으로 완성되어 있다.
당장이라도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
‘매장을 따로 만들어야 하나?’
그러나 지금은 아르누보 갤러리 하나 제대로 운영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두 개의 장소로 분리한다면, 관리는 더 힘들어질 터.
예건은 다시 아르누보 갤러리 확장 목적을 되짚어 보았다.
‘일단, 지금은 공간이 너무 협소해. 외관에 비해 인테리어가 너무 모던하기도 하고. 하지만 만들려고 준비한 가구와 장식은 대부분 발루아로 가져가야 하는데….’
발루아에 어울리지 않는 가구와 장식품들을 가져와 이곳에 전시 판매할 생각이지만, 그 수량이 많지 않다.
과거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 아르누보 스타일 가구는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데다, 얼마나 팔릴지도 솔직히 미지수였다.
아르누보 갤러리에서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매난국죽 사군자 시리즈는 아르누보 스타일에 모던함을 곁들인 가구이기 때문에 현대인의 취향에 맞는 듯했으나, 이 또한 유행이 얼마나 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고.
결국, 창고를 옆 매장으로 이전해 기존 매장 공간을 반듯하게 만들어 확장하고, 일부만 완벽한 아르누보 공간으로 꾸미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과거에 집착하는 건 여기까지다.’
라 메종드 아르누보는 그가 가장 자신 있게 구현할 수 있는 디자인이며 사그라다 파밀리아 완성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기 위해 심은 씨앗이었다.
그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 이제 곧 발루아라는 완성된 결과물로 세상에 선보일 예정이다.
그가 새로 디자인한 가구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발루아가 공개되면, 그가 현존하는 디자이너 중 아르누보 양식의 최고 정점에 서 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디자인이라도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없다.
익숙함은 쉽게 호감을 이끌 수는 있으나, 모험이 주는 긴장감을 버리면 좋은 디자인이라 할 수 없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찾기 위해 수많은 건축가가 철학을 공부하며 인간을 연구하는 것이다.
예건은 머릿속에 그렸던 아르누보 양식의 디자인을 싹 지워버리고, 새로운 스타일의 가구점을 꿈꾸기 시작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 바르셀로나 체어>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moDecor Furniture Pvt Ltd]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