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85)
085화. 예술, 새로운 영감의 원천 (4)
사무실에 돌아오는 도중 레이저 각인이 가능하다는 홍보물을 유리 벽에 부착한 도장집을 발견했다.
예건은 가방에서 골드 샤프를 꺼내 나이가 지긋한 주인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이런 물건에도 레이저 각인이 가능한가요?”
“네. 서명이라면 가능합니다.”
“서명이라….”
예건은 잠시 고민하다 주인이 내민 종이에 서명했다.
“멋진 싸인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되니까.”
“네.”
종이에 적어준 것은 전생에 사용하던 시그니처였다.
과거의 기억이 담긴 물건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누가 시그니처를 알아보고 묻거든 바르셀로나에 방문했을 때 기념품 샵에서 구입했다고 둘러대면 되겠지.
10여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샤프 바디에 예건의 서명이 각인되었다.
“…정말 멋지네요.”
“요즘은 기계가 참 잘 나와요. 예전에는 나무 도장 하나 파려면 30분은 기본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철물도 5분이면 뚝딱 레이저 각인이 끝나니.”
“그렇군요.”
샤프에 음각으로 새겨진 시그니처는 지금 보아도 참으로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날카로우면서도 동글동글한 필체.
글꼴 자체에 아르누보 감성이 녹아 있다.
예건은 행복감에 담뿍 빠져 샤프를 케이스에 고이 넣고는 비용을 치렀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그는 소유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다.
좋은 것일수록 나눠야 한다는 주관 때문이다.
그래서 내 것이라고 생각한 물건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그러니 스스로의 손으로 완성한 건축물은 어떻겠나?
건축물에 과할 정도로 화려한 장식을 덧붙이고 기괴한 형태를 즐겨 사용해 시선 끌기 좋아하는 관심병 환자라 평가하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그는 건축물에 녹아 있는 스토리를 사람들이 발견해 주길 원했다.
건축물의 외관은 공공재니까.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는 공공재 말이다.
그렇기에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들고 싶었고, 재력이 뒷받침되는 한 최선을 다해 상상력을 표현한 것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 * *
휴대폰에 뜨는 익숙한 국제전화번호.
통화 버튼을 누르자 너털웃음과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주르, 신진디자이너!
“하하하. 브루노 건축가님, 어쩐 일이십니까?”
어랏? 놀라지 않는 걸 보니, 벌써 소식을 들은 모양이구먼. 이거 괜히 김빠지는데.
“며칠 전 니콜에게 연락받았습니다. 브루노 건축가님께서 힘써주셨는데, 선정은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가? 하하하. 그래그래, 내가 좀 힘을 쓰기는 했지. 작품 수를 늘려야 한다고 하던데, 작업은 잘 되어가고 있는가?
“가구디자인 말씀하시는 거죠? 안 그래도 열심히 작업 중입니다.”
웬만큼 열심히 해서는 안 될 거야.
시종일관 호쾌하던 브루노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전해지는 전파에도 느껴질 정도로.
자네가 정말 정말 디자인을 잘한다는 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말이지.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노파심이라도 꼭 전해야 할 것 같아서.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후 브루노는 한예건이 신진디자이너로 선정된 경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메종&아트의 심사위원들이 예건의 선정을 완강하게 반대해서 거의 무산될 뻔했다가 마담 르네의 강력한 지지로 겨우 심사위원들의 반대를 막았다는 것.
“그 정도였습니까?”
그래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니까.
“이유가 뭐라던가요?”
뭐,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야 뻔하지 않겠나? 전시할 작품 수의 부족, 아직 대학 졸업도 안 한 풋내기에 유럽 인지도도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예건은 다시 한번 자신의 입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했다.
뼈는 좀 아팠지만, 사실이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다 맞는 말이긴 하네요.”
예끼! 맞는 말이긴! 허허. 이 사람, 아직도 자신을 잘 모르는군. 자네가 발루아에서 보여준 것만도 신진디자이너 선정은 충분해. 그 까탈스러운 루이비제가 다음 시즌 촬영지로 삼을 정도면 말 다 했지.
“하지만 반대가 심했다면서요.”
하아- 내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실은 말이야. 자네 때문에 떨어진 녀석이 심사위원 중 하나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놈이라지 않나. 내가 그 소리 듣고 얼마나 열불이 나던지. 내가 그놈들에게 겪었던 수모를 생각하면!
목소리에 노기가 가득했던 브루노가 냉큼 말을 잘랐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자네가 준비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이번 전시에 마담 르네, 아니 크리스티앙의 자존심이 달렸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잘할 거라 믿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저기, 브루노 건축가님!”
어? 그래, 뭔가?
예건은 머뭇거리다 안부 인사로 마무리했다.
“건강 잘 챙기시라고요.”
허허. 싱겁기는. 내가 무슨 노인네도 아니고. 자네나 몸 관리 잘하게. 일할 때면 밥도 잘 안 챙겨 먹는 것 같던데.
브루노는 잔소리 같은 당부를 한참 동안 늘어놓고 전화를 끊었다.
예건은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브루노가 항상 함께하자며 졸라대던 복원 프로젝트에 대한 언급이 오늘따라 없었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건축물이 아니면 복원에 참여할 의사가 없음을 못 박았기 때문이겠지만.
“바르셀로나에는 복원할 게 전혀 없는 건가?”
혼자 안달복달 해봤자, 의미 없는 고뇌만 늘 뿐이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 * *
유명 건축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가구를 만드는 이유는 다양하다.
교편을 잡지 않은 건축가들에게는 삶의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수입처가 되어주고, 데뷔해야 하는 신인 건축가에게는 자신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
건축가의 건축 세계를 가장 대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통로인 것.
유명 건축가들이 만든 가구들이 꾸준히 사랑받는 데는 건축가의 건축 미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훌륭한 전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예건은 아까 지점장실에서 보았던 바르셀로나 체어를 떠올렸다.
근대 건축 거장 3인 중 하나로 유명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마천루 건축의 선구자답게 건축자재로 유리와 철강을 주로 사용했다.
그가 1929년 완공된 스페인 바르셀로나 박람회 독일관(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크롬 도금한 강철, 강렬한 패턴의 심플한 대리석 벽체, 광활한 판유리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몬드리안의 추상화 Composition(구성) 시리즈 작품을 3차원 건축물로 옮긴 듯한 이 건축물은 박람회가 끝나자 곧바로 철거되었다가, 많은 건축가의 요청에 힘입어 1986년 당시와 똑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가로로 긴 단층의 입면,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 처리, 8개의 십자 단면의 철제 기둥과 긴 대리석 벽으로 떠받들어진 평지붕이 인상적인 바르셀로나 파빌리아.
이 건축물은 이전의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간결함과 무한히 확장될 것 같은 공간의 구성, 유일하게 구획된 북쪽의 조각상이 있는 작은 연못에서 마주하는 예술적 공간감이 주는 극적 효과가 특징이다.
‘Less is More.(단순할수록 좋은 디자인이다)’라는 미스의 건축관을 가장 잘 드러내는 디자인이라 평가받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장식이 적을수록 좋은 디자인이라니.”
자연처럼.
건축물 스스로 신의 감동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전생의 그였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을 거다.
하지만 세상도 인간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미스는 자신의 건축관을 직접 느끼고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남기는 데 성공했고, 예건 또한 그의 건축 철학에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처럼 완벽하게 어울리는 건축물은 또 없을 거라 평가하는 바였다.
자신의 건축에 애정이 많았던 미스는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 아무 가구나 놓을 수 없다 판단하고 이 장소에 완벽히 어울리는 가구를 디자인했다.
고대 권력층의 의자에서 모티브를 따온 곡선형 X자 크롬 철재 다리는 항상 수직으로만 힘을 지탱하던 의자 다리 디자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과거의 형태와 현대 재료인 철의 접목.
고상함과 참신함이 접목된 바르셀로나 체어를 탄생시킨 것은 결국 미스의 철학이었다.
사고를 사물화하는 것.
그 완벽한 치환을 성취한 공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건축적 성과이다.
다시 한번 도달하고 싶다.
아직은 멀어 보이는 별의 자리이지만, 다시 한번 스스로의 힘으로 그 별을 움켜쥐고 싶다.
지금 당장 닿지 않는다 해도 좋다.
쉼 없이 달리다 보면, 언젠가 닿을 테니.
예건은 주말 내내 방에 틀어박힌 채 새로운 가구점 디자인에 집중했다.
식사조차 거르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자, 보다 못한 어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예건아.”
방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의 손에는 예건이 좋아하는 간식이 잔뜩이다.
“아무리 일도 좋지만, 식사는 챙겨야지.”
“죄송해요. 너무 집중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요.”
어머니가 예건이 작성 중인 도면을 보며 물었다.
“상가 디자인하는 거니?”
“네.”
“기존 상가도 리뉴얼 할 모양이구나.”
“네. 이전에는 예산 때문에 외관만 신경 써서 공사했으니, 이왕이면 실내도 좀 더 고풍스럽게 디자인해 보려고요.”
“음~ 발루아처럼?”
“발루아를 넘어설 겁니다.”
비록 작은 규모의 매장이지만.
규모는 중요치 않다.
예건은 인테리어와 가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줄 것이다.
“완성된 내부가 기대되는데? 정말 멋질 것 같구나. 그런데….”
어머니는 확장되는 매장의 인테리어에 주목하며 물었다.
“중간의 벽은 그대로 두려고?”
“네. 문을 통해 이동할 수 있게 만들고, 나머지 공간은 새로운 스타일로 꾸며보려고요.”
“아, 새로운 스타일로. 그것도 괜찮겠네.”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 이제 어머니가 디자인한 가구도 매장에 전시해 드릴게요.”
얼마 전 어머니가 직접 디자인한 가구 설계도를 보여주셨는데, 그간의 노력이 엿보이는 디자인이었다.
부족한 디테일을 보완해 드리자,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셨기에 이참에 어머니가 디자인한 가구도 배치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에게 메종&아트 전시회 참가에 대해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아!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요.”
“소식? 무슨?”
“메종&아트 전시회 아시죠?”
“그럼, 알지. 엄마도 꼭 한 번 구경 가 보고 싶었는데.”
다행히 어머니도 잘 아시는 모양이다.
하긴 가구 디자이너라면 생애 꼭 한 번이라도 참여하고 싶은 세계적인 박람회니까.
예건은 안도하며 말했다.
“잘됐네요. 우리 아르누보 갤러리의 작품, 전시 요청받았어요.”
“응? 뭐라고?”
어머니는 예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재차 물었다.
“제가 신진디자이너로 선정됐다고 하더라고요. 사군자 시리즈 외에 몇 작품 더 추가해서 전시하자고 하는데, 이참에 어머니가 디자인한 작품도 같이 전시하면 어떨까 해서요. 전에 보여주셨던 디자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어?”
서희는 믿기 힘든 현실에 눈만 깜빡였다.
‘가게 오픈한지 얼마나 됐다고.’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이 모두 참석하는 전시회에 이제 막 가구 한 세트를 내보인 디자이너가 신진디자이너로 발탁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어머니를 보며 정확한 일정을 몰라 그런 것으로 착각한 예건이 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년 3월 전시라 시간은 충분하니까, 마음 편히 준비해 보세요.”
“…….”
전시까지 겨우 7개월밖에 안 남았다는 말에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얼어붙은 서희.
머릿속까지 냉동되는 기분이었다.
‘7개월 만에 실물 가구를. 그것도 전시회 출품작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바로 판단이 서지 않아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서희에게 예건은 투명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하실 거죠?”
[미스 반 데어 로에,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Ashley Pomeroy]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