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86)
086화. 예술, 새로운 영감의 원천 (5)
도저히 저 얼굴 앞에서 못하겠다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서희는 얼른 말을 돌렸다.
“갑자기 전시회라니…. 어쩌다가.”
“브루노 건축사님이 추천해 주시고, 크리스티앙에서 힘써 준 것 같더라고요.”
“…그래. 좋은… 분들이구나.”
입술만 달싹거리며 할 말을 고르다가, 겨우 꺼낸 말이었다.
분명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긴 한데, 갑자기 폭탄을 맞은 기분이라 그렇지.
“그런데 내가 디자인한 가구는 아르누보 스타일이 아닌데. 괜찮을까?”
“매장 규모도 늘었으니 아르누보 스타일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앞으로는 좀 더 대중적인 스타일의 가구도 만들어 보고 싶고요.
어머니가 전에 보여주셨던 가구디자인들은 중장년 여성분들 취향에 잘 맞을 것 같으니, 별도로 공간을 만들어 매장 내에 전시할 생각이에요.
이참에 거실과 침실을 컨셉으로 공간 하나를 완벽하게 디자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거예요.”
설상가상(雪上加霜).
가구 디자인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복잡한데,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함께 해 보라니.
하지만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못하겠다고 하면, 실망하겠지?’
뭘 먼저 해야 할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었지만, 아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런 마음이 얼굴에 드러난 걸까?
예건이 활짝 웃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의 가구디자인, 정말 좋아요. 따뜻하고, 편안해요. 분명 사람들도 좋아할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그렇게 보여?”
서희는 모든 걱정이 해소되는 기분을 느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되는 말이었다.
“제가 곁에서 열심히 도와 드릴게요. 부담 갖지 말고 즐겁게 디자인해 보세요.”
“즐겁게….”
잊고 있었다.
디자인은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그래! 아들이 도와준다는데, 못할 것도 없지. 엄마도 정말 열심히 할게.”
* * *
월요일 오전.
간단한 주간 업무 회의를 마친 예건이 김수훈 대표를 찾았다.
논현동 가구 매장과 메종&아트 전시회 참석과 관련한 내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그의 근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근본적으로 건림건축은 겸업을 금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건축 설계라는 게 다른 사업이나 업무와 병행할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업무가 아니다.
건축주의 온갖 요구사항에 일일이 대응해야 하고, 건축 법규와 관련 시행법들을 달달 외워도 다음 해가 되면 새로운 조항이 또 생기거나 관련 시행령들이 바뀌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기, 설비, 소방, 인테리어까지 관련 업체를 핸들링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매번 여러 갈등 속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건축 설계자의 일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일반인의 경우.
예건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충분히 여유가 있다고 판단해 일을 벌였다.
그러나 스스로 여유롭게 여긴다고 회사 또한 그렇게 판단하리라는 법은 없다.
가구나 매장 관련 업무로 인해 근무 중에 자리를 비우거나 업무시간 중에도 개인 업무를 봐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게 분명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근태를 지적받게 되면, 자신을 지원해주던 김수훈 대표도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다.
미리 보고하고 마음 편히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김 대표와 마주 앉은 예건은 먼저 메종&아트 전시회에 신진디자이너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건림건축은 당장 수중의 이득보다 한국 건축 설계 수준을 이끄는 리더로서 기업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곳이니, 분명 좋아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김수훈 대표는 그 소식을 매우 반가워하며 예건의 성과를 칭찬했다.
“대단하군. 그만큼 자네의 디자인 능력이 우수하다는 증거겠지. 정말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 무슨 문제인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협조하겠네.”
이 대답을 기다렸다.
“전시회 측에서 전시 품목을 좀 더 늘려 달라고 요청이 왔습니다. 크리스티앙 측에서도 곧 있을 경매가 끝나면 전시할 가구가 많이 줄어 곤란해하는 상황이고요.”
“추가로 디자인하는 가구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가구가 될 모양이군.”
“네. 맞습니다.”
“흠…. 업무에 지장이 있을지 모른다.”
“네.”
“메종&아트 전시회 참가라…. 놓치기 아까운 기회겠군.”
미간을 좁힌 김 대표가 생각에 잠겼다.
예건이 그의 고민을 덜어 주려 부연했다.
“문제가 된다면, 급한 일만 처리해 놓고, 당분간 무급 휴가로 전환할까 합니다. 물론 무급 휴가 중이라도 기획팀에서 하는 프로젝트들은 진행에 무리 없이 업무 진척 상황을 매주 확인할 겁니다.”
“기간은 얼마 정도 예상하는가?”
“착수하고 본격적으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대략 3달. 그 후로 전시회가 열리는 3월까지 계속 진행 과정을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시회가 운영되는 기간에는 파리에 상주해야 할 것 같고요.”
“3개월이라….”
자신의 계획을 모두 말한다면 아마 김수훈 대표는 절대로 승낙하지 않을 거다.
그리 생각한 예건은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계획 일부를 숨겼다.
“기획팀에서 진행하겠다고 한 네오소프트와 빛가람 미술관, 한남 다세대주택까지. 자네가 많이 바쁘겠군.”
김수훈 대표는 승낙하듯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럼,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 인사팀에는 제가 휴직계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수훈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자네가 메종&아트 신진디자이너로 선정되는 건 건림건축에도 좋은 일이야. 직원들의 역량을 키우는 것은 경영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말일세.”
“그럼 겸업해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자네 없이 기획팀을 어떻게 운영하겠나? 다만 혼자 팀을 이끄는 것이 힘에 부치거든 말하게.”
“감사합니다.”
김수훈 대표는 곰곰이 생각하다 제안했다.
“아니지. 설계 계획은 무리가 아니더라도 인허가 업무까지 진행되면 자네 혼자서는 힘들게야. 아무래도 관공서 업무를 자네 대신 처리할 수 있는 인원을 미리 보강하는 게 좋겠군.”
“인원 보강이요?”
“그래.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면 장현우 과장이 혼자 직원들 관리하면서 대관 업무까지 처리하기 힘들 테니까. 차장급으로 지원자를 찾아보겠네.”
“감사합니다.”
예건이 넙죽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장은 대외업무를 진행하고, 팀원을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이 충원되면 기획팀 인원이 총 다섯이 되겠군”
“네.”
“그렇다면 전에 자네와 했던 약속을 이행해야겠지.”
기획팀 팀원이 다섯을 채우면, 제대로 된 팀으로 대우해 주겠다던 그 약속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는 인사팀에서 알려주는 거지만, 주책맞게도 자꾸 입이 간질거리는군.”
“네?”
예건이 궁금해 묻자, 김수훈 대표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회사는 팀장이 되면 말이야. 성과급으로 인센티브가 지급되네. 진행 프로젝트의 2% 수준이긴 하지만, 수주금액이 커지면 그만큼 많은 인센티브를 가져갈 수 있는 거지. 팀장이 되면 기본급도 오를 테고.”
김수훈 대표는 대견하다는 듯 씩 웃으며 예건을 주시했다.
그러나 예건은 갑작스러운 김수훈 대표의 말에 고민에 빠졌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통장에 있는 300억 원의 예금 이자 수익만 연간 6억에 달한다.
이자 수익만으로 이미 최고 소득세율에 달하니, 건림건축에서 지급한 인센티브는 말 그대로 세금으로 녹아내릴 것이다.
김수훈 대표가 제시한 인센티브를 조금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예건은 잠시 고민하다 김 대표에게 제안했다.
* * *
준영은 아침부터 패션쇼 참가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루이비제 브랜드 옷과 액세서리를 고르고, 헤어와 메이크업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
패션쇼 출발 전에 한국에서 따라온 잡지사 및 언론사 몇 군데와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허기진 상태로 곧장 패션쇼장으로 향했다.
혼잡을 막기 위해 도착 장소 인근에 주차하고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데,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매니저가 툴툴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식사라도 제대로 챙겨 먹고 올 걸 그랬네.”
“그러니까. 일찍 와 봐야 소용없다니까.”
준영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자동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잠시 뒤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해하지도 못하는 다양한 언어들을 아는 척해야 한다.
생각만으로 벌써 피곤하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비축해야 했다.
“어. 간다. 준영아.”
“알겠어.”
후다닥 자세를 고쳐 바르게 앉고, 혹시나 뒷머리가 눌렸을까 싶어 머리를 매만졌다.
얼마 안 가, 차창 너머 인파로 가득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자신을 환호하는 팬들이 저곳에 있을 리 없다.
한국이니까 패션왕이라 불리는 거지, 그게 패션의 본고장 파리에서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도 큰 법이다.
준영은 마음을 가볍게 했다.
그가 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플래시가 마구 터졌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진 것은 그 이후였다.
“아….”
밝은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인파 속에서 자신의 이름과 팀명을 부르는 함성이 소란스럽게 들려온다.
예상치 못한 환대에 놀란 것도 잠시.
준영은 능숙하게 사람들의 환호에 호응하며 레드 카펫 위를 걷고, 포토월에서 패션을 자랑해 보였다.
그저 눈을 접고 함박웃음을 지을 뿐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을 향해 오고 가는 이들이 누군지, 함께 사진을 찍자고 다가오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입가에 경련이 일고, 가슴이 답답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순간. 그를 마주하고 있던 한 흑인 남자가 준영의 팔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군사 행렬처럼 빼곡하게 정렬해 있던 정원수를 지나고, 한적한 공터에 들어서고 난 후에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혼잡한 패션쇼장은 처음이라 적응이 잘 안되네요.”
“이해합니다. 멀리서 보는 패션쇼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막상 가까이 들어가면 실상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죠.”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됩니다.”
“아까 조금 불편해 보이던데, 지금은 괜찮습니까?”
“네, 덕분에.”
그러고 보니, 이곳.
런웨이가 있던 경직된 형태의 정원과는 조금 달랐다.
어딘가 정감 가고, 익숙한.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준영의 뇌리에 하나의 풍경이 겹쳤다.
연못 주변을 장식한 색색의 예쁜 꽃과 잔디, 겨우 혼자 지나다닐 수 있게 돌을 깔아 만든 오솔길.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온갖 이름 모를 식물들은 누가 더 잘났다 경쟁하지 않고 그저 꽃을 피울 뿐이었다.
“모네의 정원?”
“오! 당신도 그렇게 느꼈습니까?”
“네. 한 번 가 본 적이 있거든요.”
“하하. 저는 어린 시절 그 근처에 살았습니다.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이죠. 아마도 이 정원은 우리처럼 격식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디자이너가 마련해 놓은 숨통인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네요. 숨통….”
조금 전까지 인파 속에 파묻혀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안정감.
바람 한 줄기가 그의 머리칼을 쓸고 지나갔다.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Supercarwaar]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