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87)
087화. 예술, 새로운 영감의 원천 (6)
살랑.
싱그러운 꽃내음을 담은 바람이 긴장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식혀주었다.
준영의 시선이 정원에 머무르자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렸을 때 친하게 지냈던 정원사님이 그러더군요. 큰 나무를 조각하듯 깎는 것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꾸미는 게 더 어렵다고.”
“아름답게 보이는 사물에는 항상 누군가의 고단한 수고가 있는 법이죠.”
“…….”
남자가 준영의 말을 곱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군요.”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패션 피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인지.
시끄러운 패션쇼장에서 간간이 소음이 들리기는 하지만, 이 연못 주변만 뚝 떨어진 듯 묘하게 차분했다.
남자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검은 손목 위를 화려하게 장식한 시계는 언뜻 보아도 명품인 듯했다.
“잠시 쉬었다가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건축물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 돌아갔다.
“좋은 사람이네.”
준영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작은 연못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네의 작품 [수련>에서 보았던 연못을 옮겨 놓은 것 같은 풍경.
그 풍경에 집중하자 흐르던 시간이 멈추고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반짝이는 물결과 소담하게 핀 연꽃을 눈에 담고 있으니, 마음도 한결 잔잔해졌다.
– 10분 뒤 패션쇼가 시작됩니다. 귀빈들께서는 모두 착석하시어….
어느덧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준영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연못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촬영하고는 SNS에 글을 올렸다.
* * *
검색 플랫폼은 종일 루이비제 패션쇼에 참석한 히트어택 멤버 안준영의 패션 센스와 외모 칭찬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되고 있었다.
건림건축 출판팀 김연희 대리는 루이비제 패션쇼 이슈가 가장 높은 이 시기를 틈타 예건의 인터뷰 영상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패션쇼가 열리는 장소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지 몇 시간 동안 겨우 조회수 100을 간신히 넘기고 있었다.
그마저도 그녀가 조회수 확인을 위해 클릭한 숫자가 10%는 될 것이다.
“인터뷰 영상 잘 나왔는데.”
영상을 다시 한번 플레이하고 한쪽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한예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참 듣기 좋은 목소리다.
“뭐해?”
“아? 오 대리님. 인터뷰 영상 확인하고 있었어요.”
“그래? 음… 조회수가 얼마 안 되네.”
“네. 루이비제 패션쇼가 이슈라, 좀 볼 줄 알았는데.”
“홈페이지에 올려 둔 거지?”
“네.”
“잠시만.”
오경환은 휴대폰을 조작해 자신의 SNS에 영상을 링크했다.
“이런 이슈는 SNS가 훨씬 빠르거든.”
“에이~ 팔로워도 몇 명 없으면서.”
“이거 왜 이래. 내가 이래 봬도 팔로워만 만 명이 넘는다고.”
“오? 진짜요?”
오경환은 자신이 찍은 건축 사진 중 잡지 기사에 선택되지 않은 B컷만 따로 모아 올리는 SNS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금씩 늘어나던 조회수가 최근 올린 발루아 현장 사진과 프랑스 여행 때 찍었던 건축물 사진 덕분에 서서히 늘어나더니, 어느새 1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나만 믿어. 곧 조회수 폭발할 테니까.”
“그럼 진짜 좋겠어요.”
“그런데 음악당 화장실 준공 사진 촬영은 언제야?”
“아! 잠시만요.”
일정을 확인한 김연희가 곧바로 알려주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요. 이번 주까지 공사 완료예요.”
“오키.”
오 대리가 자리로 돌아가고 김연희는 확인하던 영상을 껐다.
어차피 계속 보고 있어 봐야 조회수가 금방 오르는 것도 아니고.
‘딱히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 낫겠지.’
만 명의 팔로워 중 천 명만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관심을 접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확인차 사이트를 확인한 김연희는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대, 대리님!”
“왜? 뭔데 그래?”
“이거… 조회수!”
인터뷰 조회수가 3만을 넘기고 있었다.
유명인이 아닌 신인, 그것도 신인 건축사의 인터뷰가 조회수 하루 만에 조회수 3만을 넘기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관심 폭발에 오경환도 깜짝 놀라 자신의 SNS를 확인했다.
올렸던 글 아래 댓글이 엄청나게 달려있었다.
– 미친. 이거 꼭 보셈. 인터뷰하는 건축가 겁나 잘생김. 목소리 개발림
– 캬~ 프랑스 건축물 복원을 한국인이. 국뽕에 취한다
– 우리 준영이가 올린 사진 보다가 링크 타고 왔는데, 이게 뭔일. 영상 링크 퍼감요
오경환은 댓글 리스트 속에서 안준영이란 이름을 찾아내 검색했다.
그의 SNS에 들어가니, 발루아 연못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그 사진 아래 베스트 댓글에는 김연희가 올린 인터뷰 영상이 링크되어 있었다.
“이거 때문인가 본데.”
“와! 역시 연예인 파워가 대단하긴 하네요. 고마워요. 이게 다 오 대리님 덕분이에요.”
김연희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커피를 타주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오경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실시간 계속 오르는 하트 수와 댓글 수를 지켜보았다.
“이게… 정말 되네?”
그 소식은 곧장 예건에게도 전해졌다.
– 한 팀장님, 인터뷰 영상 조회수가 3만이 넘었어요! 대박이에요. 대박!
김연희의 메시지를 확인한 예건은 영상은 확인도 하지 않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예건은 휴대폰으로 향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기고 방금 막 건너편 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를 직시했다.
“급한 연락이면 먼저 처리해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시작하시죠.”
피식.
장난스럽게 웃음 지은 남자가 물었다.
“건림건축은 전통 있는 설계사무실이라 연세 지긋한 분이 오실 줄 알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젊은 분이라 얘기가 잘 통하겠네. 우리 회사에서 출시된 게임 해봤어요?”
게임이라….
오늘 예건은 네오소프트 사옥과 관련해 업무 협의를 하기 위해 이곳에 방문했다.
게임이라고는 전생과 현생에 걸쳐 단 한 번도 해본 경험이 없었기에 예건에게 꽤 대답하기 껄끄러운 질문이었다.
‘해보고 올 걸 그랬나?’
작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해봤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지금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우리 회사 게임이 뭐가 있는지는 알아요?”
“물론입니다. 이터널 엠파이어, 용의 나라, 워 오브 리버레이션 등이 대표작인 걸로 알고 왔습니다. 주력으로 개발하시는 게임이 판타지 시대 배경으로 한 MMORPG고요.”
“오~ 그래도 조사는 하셨네.”
“설계할 회사에 대한 기초 조사는 기본이죠.”
예건의 대답에 맞은 편 앉은 이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설렁설렁 말했다.
“설계 조건은 이미 다 전달됐을 테고. 담당 설계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했던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설계자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관심 있는지가 궁금했거든요.”
네오소프트 대표 설무영은 실실 웃던 표정을 굳혔다.
“보아하니, 별로 관심 없으시고.”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설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 프로젝트. 얼마나 많은 설계사무실에서 노리고 있는 줄 알아요?”
지하 7층, 지상 12층.
연면적 10만㎡, 예상 설계비만 50억에 달한다.
뉴스가 나간 것도 아닌데, 어디서 소식을 들은 건지 매일 같이 컨셉이니 뭐니 들고 와서 한 번만 브리핑하게 해 달라 요청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착공 시점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했으나 급히 담당자를 부른 이유는, 설계 계약이라도 빨리 끝내야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설계를 부탁한 설계사무실이 저렇게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건림건축에서 우리 회사에 관심이 있는 건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대표님께서 오래 고민하시고 선정한 프로젝트입니다. 관심이 없으셨다면 저에게 권유하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문제라면 김수훈 대표가 주변 상황까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는 거다.
시간상 충분히 여유 있으니 그저 하고 싶은 일을 고르고 직접 계약까지 성사해 보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아마 JJ엔터처럼 예건이 실력으로 상대의 호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상대의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아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담당자 선정 과정에 조금 시간이 걸린 점은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요구하시는 내용이 일반적인 오피스팀에서 수행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어 저에게 프로젝트 진행 요청이 왔습니다.”
예건의 말에 거짓은 보이지 않았기에 설무영은 화를 삭였다.
자타공인 한국 최고로 인정받는 건림건축의 디자인 서비스를 받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기에.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담당자가 너무 어린 거 아닌가?’
그동안 자신을 찾아온 건축 설계회사의 담당자들은 대부분 4~50대 이사급 건축사들이었다.
한예건 팀장이란 사람은 이제 갓 대학 졸업이나 했으려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오히려 그 점이 안심되긴 했다.
아마도 익숙해서 그렇겠지.
게임회사 특성상 30대 중반인 자신을 비롯한 임직원 대부분이 2~30대였으니까.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양 한예건이 자신감을 드러냈다.
“디자인에 있어 다른 회사보다 못하지 않을 거라 자부합니다. 일주일. 그 안에 보여드리죠.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는 디자인을.”
“믿어도 됩니까?”
편한 건 편한 거고.
여전히 의심 가득한 설무영 대표의 눈초리.
예건은 정말 하기 싫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분께 맡기셔도 됩니다.”
프로젝트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팀원들이 아쉬워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기다려 보죠.”
예건은 새로 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화요일. 오전 11시 10분.
“그럼, 지금부터 네오소프트를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보 수집을 위해 일주일간 네오소프트 사무실 전체 통행권을 부탁드립니다.”
“사무실 전체 통행권이 필요하다고요?”
“필요한 공간에 대한 정보, 직원의 근무 행태와 동선 파악, 그리고 규모를 결정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입니다.”
“직원들이 불편해할 텐데?”
“업무에 지장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원하시면 관리 직원을 따라 붙이셔도 됩니다. 보안 각서도 필요하시면 작성하고요.”
“뭐, 그렇다면야.”
설무영 대표의 지원으로 예건은 자유롭게 네오소프트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혹이 하나 달리기는 했지만.
“조금 힘들지도 모릅니다.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휴식 시간을 드릴 테니.”
“아! 네.”
“그럼, 로비부터 가 보죠.”
예건은 가장 먼저 로비로 향했다.
네오소프트가 현재 메인 오피스로 쓰는 이 건축물은 강남 테헤란로 부근의 중규모 임대형 빌딩 지상 2층부터 지상 13층까지를 통째로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그중 로비가 되는 층은 2층으로 인테리어는 모던한 디자인으로 나름 최근 리뉴얼한 것으로 보였고, 대기 공간을 제외한 대부분이 회의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차에서 가져온 도면은 펼치지도 않고 구석구석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존 도면은 머릿속에 모두 들어 있었다.
도면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공간의 규모나 위치 변경을 기록하기 위해 가져온 것뿐이다.
2층부터 시작된 건축물 투어는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각 시설물의 용도와 위치를 확인하며 느낀 점이라면, 구성원들이 젊다는 것과 설계사무실 못지않게 직원들이 피로해 보인다는 점이다.
되려 늘상 근육통을 달고 사는 현장의 잡부들이 훨씬 활기차 보일 정도다.
창조물을 사업으로 귀결시키는 일은 고강도의 두뇌 노동임이 틀림없다.
예건은 종일 자신을 따라다닌 직원에게 말했다.
“내일은 아침 9시에 2층에서 뵙겠습니다.”
“아, 내일 또 오시는 건가요?”
“네, 그럴 겁니다. 그럼.”
예건은 그와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현장에서 수집한 정보를 정리하는 것부터, 건축은 시작된다.
공간과 좌표를 지정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과연 어떤 건축물이 탄생하게 될까?
지금은 예건도 알 수 없었다.
그 불확실함이 예건을 끊임없이 창조의 길로 이끄는 원동력일 터.
창백한 푸른 빛이 감도는 하늘.
불을 밝힌 도시의 풍경은 우주를 수놓은 별을 닮았다.
예건은 자신의 우주 속에.
새로운 별을 띄우기 위해 바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