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88)
088화. 건축에 잠재된 가상 공간 (1)
2층의 로비와 회의실, 3층부터 10층까지 이어지는 게임 기획, 아트 디자인, 개발실.
11층부터 12층은 사업/서비스팀, 13층은 경영지원실.
현재의 오피스는 2층 로비를 제외하면 게임회사라는 정체성이 드러나는 곳은 없었다.
아, 물론 엘리베이터 홀과 복도를 장식한 게임 캐릭터 전신 그래픽과 홍보용으로 사용한 것을 그대로 가져다 둔 것 같은 각종 설치물이 넘쳐나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건축적으로 계획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네오소프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재미있는 일터’는 현재 실종 상태에 가까웠다.
공간이 좁아서 그런 거냐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냥 돈을 쓸 여력이 없지 않았을까?
네오소프트가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들었으니.
예건은 자신의 곁에서 묵묵히 따라다니는 사원을 힐끔 보며 물었다.
집에 가지 않았는지, 옷이 그대로다.
“어제 퇴근 안 하셨어요?”
“아? 네. 좀 바빠서.”
“바쁘시면 일 보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제 업무인걸요. 다음은 어디로 가신다고 하셨죠?”
“네오소프트에서 출시한 게임을 해 보고 싶은데요.”
“저희 게임요?”
“네. 혹시 게임 시연하는 곳이 있을까요?”
“물론이죠. 따라오세요.”
게임 테스트실로 데려간 직원은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의 예건이 컴퓨터 게임을 한 번도 한 경험이 없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며 게임을 추천해줬다.
“이터널 엠파이어가 스토리가 재밌어서 초보자들이 하기 좋아요.”
“그렇군요. 흠… 앞으로 대략 6시간 정도는 여기 있을 생각이니까, 잠시 수면실에서 쉬다 오십시오. 나갈 일 있으면, 미리 연락드릴게요.”
괜찮다는 그를 억지로 내보내고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 스타트를 누르자 헤드폰 너머로 비상하는 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구름 가득한 잿빛 창공을 비행하던 매는 산을 넘고 강 위를 날다가 고딕 양식을 따라 만든 웅장한 성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한다.
박진감 넘치는 배경 음악이 심금을 울린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인트로 영상에 예건은 넋을 놓고 몰입했다.
‘시간이나 죽이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네.’
왜 설무영 대표가 네오소프트가 출시한 게임을 해봤냐고 물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게임 기획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있었구나.’
인트로 영상에 나왔던 캐릭터와 같은 얼굴을 고르고, 게임을 플레이했다.
현재 캐릭터의 능력이나 외관은 보잘것없이 초라하다.
가죽 갑옷과 낡은 단검.
주어지는 임무는 여행객을 위협하는 약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일.
자질구레한 임무를 처리하면 돈과 새로운 아이템이나 장비를 얻게 되는 구조.
작은 시골 마을부터 시작해 대도시까지 이어지는 스토리 진행, 하나의 맵을 완성했을 때의 쾌감!
처음 본 유저들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아이템과 돈을 거래하며 실랑이하는 것도 흥미롭다.
현실에서는 쉬이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이 게임 속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벌어진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한 단계 성장했다는 우월감으로 뿌듯하고, 노력한 만큼 성과가 바로 눈에 보이니 지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스토리를 따라 클릭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덧 6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단지 게임을 즐겼을 뿐인데, 가상 세계에 대한 식견이 조금 더 넓어진 기분이 들었다.
게임 속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가상 현실이다.
유저를 대신해 가상 세계를 누비는 캐릭터들은 미지의 세상을 여행하는 모험자이며, 탐험가다.
기나긴 여정 속에서 퀘스트라 불리는 다양한 상황으로 경험치를 얻고,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위험에는 조력자들과 함께 맞서 싸우며 목표를 향해 다가간다.
세계관, 스토리, 캐릭터, NPC라고 불리는 도우미 캐릭터까지. 허투루 만들어진 게 없다.
게임 속에만 존재하는 경제 체제가 있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있다.
단위가 작기는 하지만 엄연한 규칙이 존재하는 세계.
독창성, 창의력, 논리력, 사고력, 표현력, 커뮤니케이션 능력까지. 다방면의 능력을 갖춘 단체가 아니고서야 이런 세계 구축이 가능할까?
게임회사에 왜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필요한가 했던 궁금증이 쉽게 해결되었다.
‘집단이 함께 창작하는 세계.’
완성도 높은 게임 하나를 만드는 데 수십 명이 필요하고, 수년의 노력이 기울여진다.
게임이 완성되었다고 수고가 줄지는 않는다.
게임이 서비스된 후에도 꾸준한 관리와 홍보를 통해 유저들의 이탈을 막아야 하고, 흥미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스토리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새롭게 나오는 시나리오와 캐릭터는 기존과 유사성을 가져서는 흥미를 돋울 수 없다.
그러니 매번 신선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이 게임 서비스를 종료할 때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직원들의 창의력이 그 어떤 회사보다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예건은 자신이 만약 게임회사에 입사한다면 어떤 업무가 가장 적합할지 상상해 보았다.
“배경 디자인은 재밌겠는데.”
게임 배경 속에 나오는 건축물들은 구조와 양식이라는 현실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훨씬 더 자유롭고 다채로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외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디테일의 섬세함이나 마감 표현의 다양함부터 구조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건축가인 자신이 보기에도 배울 점이 분명히 있었다.
특히나 게임 캐릭터가 태초의 여신과 만나는 겨울 신전의 배경은 가히 압권이었다.
설산을 휘어 감으며 오르는 엄청난 수의 계단.
설산 꼭대기에 구현해 놓은 거대한 크리스탈 여신 조각상과 르네상스 양식의 신전.
만약 이것들을 실제 세상에 구현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
그 비용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상상만 할 뿐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던 건축을.
이곳 가상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마냥 기뻤다.
건축물을 2차원 평면에 표현하는 2D설계(CAD)와 3차원 공간에 표현하는 3D설계(3D MAX).
2D 설계와 3D 설계는 프로그램 시작 화면부터 차이점을 보인다.
CAD는 X와 Y축만 존재하는 2차원, 3D MAX는 X, Y, Z축으로 이루어지는 화면과 동시에 투시도, 평면, 단면 등의 4가지 화면을 동시에 띄우고 설계를 시작한다.
당연히 2D에 비해서 3D가 훨씬 직관적이다.
2D로 그려진 도면은 각층의 평면과 입면을 조합해 완성된 건축물을 머릿속에 상상해야 하지만, 3D로 만들어진 완성품은 그저 필요한 시점에 카메라를 가져다 두기만 하면 된다.
아직 건축 분야에서 3D 설계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에는 현실적인 여러 문제점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당장 활용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3D 설계의 장점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건은 시간이 얼마가 소요되더라도 3D 설계를 직접 익혀야겠다 다짐했다.
마침 예건을 안내하던 사원이 테스트실에 들어섰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게임 배경에 사용하는 3차원 그래픽,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이런 표현이 가능합니까?”
“어… 아마 3D MAX 사용했을 거예요. 언리얼이라는 게임 엔진으로 리얼 타임 렌더링을 하고요.”
“3D MAX, 언리얼 게임 엔진.”
3D MAX가 게임 회사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모델링 프로그램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얼 타임 렌더링이라는 건 생소하다.
“리얼 타임 렌더링이 뭔가요?”
“3D 정보를 2D 이미지로 빠르게 변환하는 방식의 렌더링입니다. 반대 개념으로 오프라인 렌더링이 있는데 보통 건축에서 사용하는 투시도 렌더링에 사용하죠. 최종 출력된 퀄리티가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훨씬 쉽겠네요.”
“아, 그렇군요.”
인쇄물은 300dpi 고해상도 이미지로 출력해야 디테일이 뭉개지지 않고 제대로 된 결과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니터 화면은 그보다 훨씬 낮은 해상도의 이미지를 보더라도 선명하게 보인다.
아마 그 차이가 아닐까 싶다.
궁금증이 해결됐으니, 예건은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가능하면 이번 프로젝트부터 3D 설계를 도입해 보고 싶었다.
“혹시 거래하고 계신 컴퓨터 판매 업체를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컴퓨터 업체요? 그건 어렵지 않지만, 설마 배우시려고요?”
“네. 건축설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직원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학원부터 다니시는 게 좋을 거예요. 프로그램 익히는 게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도 입문서가 대부분이고요.”
“괜찮습니다.”
예건이 강한 의지를 보였기에, 직원은 순순히 관련 업체를 확인해 알려 주었다.
“그럼, 내일 9시에 로비에서 뵙겠습니다.”
“네.”
예건은 곧장 테스트실을 떠났다.
혼자 남은 노재범이 작게 중얼거렸다.
“언리얼 엔진은 임대형으로 사도 5억이 넘는다는데. 말해줄 걸 그랬나?”
* * *
한예건을 만나고 3일이 지난 시점.
설무영은 인사팀 노재범 사원을 불렀다.
“건림건축 한예건 팀장, 지금 뭐 하고 있어?”
“게임하고 있는데요.”
“뭐? 무슨 게임.”
“오늘은 용의 나라 하던데. 되게 열심이에요. 이터널 엠파이어는 벌써 100레벨이 넘어요.”
“하! 게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처럼 그러더니.”
“그건 맞는 거 같아요. 제가 어제 회원가입 하는 거 봤거든요.”
게임을 처음 하든 많이 했든 들리는 소식이 못마땅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 알았어. 가서 일 봐.”
“네.”
설계하라고 했더니, 게임만 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예건을 불렀다.
“그래, 설계는 잘 되어 가십니까?”
“네.”
잘 되긴 개뿔.
설무영은 허공의 말은 믿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결과만 믿을 뿐.
사업을 시작하고 10년.
그간 자신이 투자자를 빙자한 사기꾼들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는지 눈앞의 순진한 건축가는 모를 것이다.
만약 대충 말빨로 상황을 면피할 생각이라면 따끔하게 충고 한마디 할 생각이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뭡니까?”
“대표님께서 생각하시는 네오소프트 사옥 건설의 궁극적인 목표는 뭔가요?”
“목표? 그건 이미 사옥 건설에 관한 초안 자료를 넘길 때 같이 드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일과 놀이의 경계가 없는 창의력 넘치는 유토피아 같은 사무실을 만들겠다는 것이 설무영 대표가 요구한 사옥 건립 목표였다.
설무영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직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일터를 마련해 주는 것. 그게 이번 사옥 설립의 목표입니다.”
예건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궁금한 것은 사옥의 기능적인 목적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진짜 미래에 만들고자 하는 게임 말입니다.”
설무영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VR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버츄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 실제와 유사하지만, 실제가 아닌 새로운 환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게임 속에서만 보고 즐겼던 가상 현실이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재밌겠습니까?”
설 대표의 말을 듣는 순간, 그가 플레이했던 게임 속 다양한 캐릭터들이 현실의 건축물을 누비며 자신과 함께 탐험하는 것이 그려졌다.
“재밌는 발상이네요.”
“이걸 건축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 건축가라면 설무영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나, 예건은 달랐다.
“멋진 건축물이 탄생할 것 같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