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90)
090화. 건축에 잠재된 가상 공간 (3)
버튼을 클릭하자, 화면 속 검은 영역이 점점 밝아오더니 건물의 모서리를 따라 빛의 길이 생겼다.
중앙의 별에서 외부로 향할수록 간격이 넓어지는 실선이 드러났다.
투시도법을 이용한 층의 구획이 선으로 표현된 것이다.
건축물의 중앙에서 천장을 바라본 투시도다.
“와! 진짜 누리별이 있네요.”
영상의 전개가 흥미로웠는지 조금 높아진 비서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건은 웃음기 없이 진중하게 말했다.
“모두 조명이 아닌 천창으로 구현할 생각입니다.”
“단순히 이미지가 아니라 건축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1층부터 5층까지 이어지는 워프존 중앙에는 이렇게….”
건축물의 단면이 화면에 나타났다.
3층, 4층, 5층. 계단식으로 줄어드는 검은색 건축물 안에 흰색의 비어 있는 공간.
“어? 저건 설산!”
설 대표의 말대로 세 개의 봉우리가 특징인 설산의 형태를 닮았다.
“네, 설산의 디자인이 공간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여신의 보좌.”
“와!!”
비어 있는 공간의 중앙.
중간은 볼록하고 양 끝은 가는 세로로 길쭉한 실타래 형태의 보좌, 그리고 그 주변을 교차하는 3개의 회전각이 다른 동심원이 단면으로 나타났다.
“보좌는 건축물의 중앙부에 원형 유리 엘리베이터로 표현될 겁니다.”
지상 5개층 규모의 보좌라니.
게다가 건축물의 최상층인 13층을 넘어 옥상층까지 어이지는 원형 엘리베이터는 네오소프트를 관통하는 상징적 요소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을 만들어왔을 줄이야.
단순히 훌륭하다고 평가하기에 부족하다.
다른 설계사무실에서 보여주었던 장황하고 뜻 모를 건축 디자인 컨셉과는 비견조차 하기 어려운 수준.
한예건은 설무영조차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옥의 상징성을 건축 컨셉으로 승화시킨 유일한 디자이너였다.
그는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이를 만개하고 환하게 웃었다.
“좋습니다! 좋아. 설계비는 걱정하지 말고 이대로만 만들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 비서, 계약서 작성하고 한 팀장님 프로젝트 진행하시는 데 무리 없게 잘 도와드려.”
“네! 알겠습니다.”
“자~ 그럼, 일도 잘 마무리했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지!”
설무영은 극구 사양하는 예건을 설득해 예약한 일식집으로 향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식사가 나오고 난 후로도 이것저것 캐물었다.
예건의 출신학교와 나이 같은 개인적인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우리 학교 동문이라고? 내가 한참 선배니까 말 놓아도 되지?”
“네.”
“젊은 친구가 참 과묵하단 말야. 내가 이런데 아무나 데려오는 게 아니라고. 김 비서, 설명 좀 해 드려.”
“맞습니다. 저희 대표님이 웬만큼 마음에 드시는 분이 아니면, 이렇게 비싼 점심 안 사시거든요.”
“에헤~이. 그렇게 말하면 돈 쓰기 싫어서 점심 안 사는 거로 오해하잖아.”
설 대표가 비서를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아닙니다. 워낙 바쁘시니, 당연한 일이죠.”
“역시! 우리 후배님이 마음 씀씀이가 넓다니까.”
“여기 음식이 맛있네요. 선배님도 많이 드십시오.”
“어. 그래그래. 우리 후배님도 많이 먹어.”
설 대표는 비서 근처에 있는 싱싱한 전복 요리를 예건에게 밀어주며 싱긋 웃었다.
“대학 졸업반이라고?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
“괜찮습니다.”
“이래 봬도 내가 학교에 기부 좀 하거든.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이야기해.”
살다 보면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나 한국처럼 작은 규모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예건은 그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계약까지 마무리한 후, 건림건축으로 돌아온 예건은 곧바로 김수훈 대표에게 향했다.
그의 손에는 건축설계 예산에서 1원도 깎지 않은 50억 원짜리 설계계약서가 들려 있었다.
계약서를 받아 본 김수훈 대표가 어이없는 웃음을 웃으며 허탈한 듯 웃었다.
“경쟁사들이 워낙 눈독을 들이고 있는 설계 건이라고 해서 계약이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자넨 알면 알수록 더 대단한 사람이군.”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
“건축주를 만족시키는 설계요.”
“하하하. 그래, 그렇지. 설계자는 설계로 평가받는 거지. 잘했네, 잘했어.”
예건은 잘 모르겠지만, 김수훈 대표는 이번 일로 인해 조만간 경쟁사에서 한예건에 대한 존재를 신경 쓰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많은 설계사들의 이목이 쏠려 있던 프로젝트였고 내정된 설계비도 적지 않았다.
“앞으로 자네가 더 바빠지겠어. 이 계약서는 내가 경영팀에 전달함세.”
“네, 감사합니다.”
예건이 나가고 김수훈 대표는 자신이 들고 있는 계약서를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허허. 50억 원이라. 네고도 전혀 안 하고 설계 예산을 통째로 줬다고?”
NEGOTIATION, 줄여서 업계에서 통용하는 말로 네고(NEGO.).
아무리 만족스러운 설계를 보여준다고 해도 이 관행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적게는 3%에서 많게는 20%까지 협상을 요구하는 건축주 때문에 설계 예산이 고무줄처럼 널뛰는 것이다.
“허허허. 임원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기함하겠군.”
자꾸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웃지 않으려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금주 임원 회의에서 기획팀을 김수훈 대표 직속 팀으로 인정한다 했을 때 반발하던 임원들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나만 재밌을 수야 있나.”
김수훈 대표는 급히 정기택 상무를 불러 네오소프트 계약서를 내주며 실무를 지원할 차장급 직원을 하루빨리 배정하라 지시했다.
또한, 앞으로 기획팀에 지원을 아끼지 말라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한예건과 기획팀 직속 팀원들이 모두 함께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 * *
루이비제 패션쇼가 끝나고 하루가 지난 며칠 뒤까지 인터넷은 히트어택 안준영과 관련된 소식으로 여전히 뜨거웠다.
평소처럼 패션쇼를 마치고 곧바로 한국으로 들어올 거라 예상했던 안준영이 파리에서 며칠 더 체류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떠돌자, 이에 관한 온갖 불순한 추측들이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 분명히 파리에서 여친 만남. 아니면 내 손에 장 지짐
└ 222222
└ ㅇㄱ찐임 출국날 JJ엔터에서 비즈니스석 2자리 예매. 승무원인 오빠한테 확인했음
└ 오~ 오빠 잘생김? 소개 ㅉ
└ ㅂㅅㄴ 이걸 믿나?
– 비즈니스석 2자리? 누군지 맞춰봄. 예린
└ 까고 있네. 그렇게 눈에 띄게 간다고? 다들 ㅂㅅ임? 한 명 더 껴서 가겠지. 얼마 전에 화보 찍으러 홍콩 나갔던 은별이 아닐까?
└ 난 이 커플 찬성!
└ 2222죠음!!
└ 뭐래? 우리 준영 오빠한테 아무나 붙이지 말라고!!!
– 아휴… 인정만 하지마ㅠㅠㅠㅠㅠㅠ
하지만 안준영에 대한 소식이 뜸해지자, 점점 관심이 다른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 루이비제 패션쇼 있던 성. 그거 복원 설계했다는 사람 한국인이던데, 다들 봄? 겁나 잘생김. 훈훈한 게 딱 내스퇄임~
– 뭐여? 듣보잡 잘가고
└ 아니 이거 레알임. 나도 봤는데!!! 겁나 어림 [링크 투척]
└ 아줌마,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요.
└ (보고 옴) 어흑! 이거 실화냐? 안 본 사람 빨리 보3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링크]
└ 프랑스 인터뷰도 있음. 진짜임. 프랑스어가 이렇게 발리는 언어였냐? 귀가 녹는다 녹아! 당장 배우러 가야징
– ㅉㅉ 이렇게 문명에 느리다니. 불쌍한 중생들 내가 구제해 주마. 프랑스어 번역 영상 [링크]
예건의 발루아 인터뷰 영상 조회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 것은 같은 날 한국 MBS 방송 채널 저녁 뉴스에 발루아 특별 경매 소식이 전해진 이후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해외 소식이라 매우 짧게 보도되었으나, 한국인 건축디자이너가 총괄디자이너를 맡았다는 정보는 건축에 딱히 관심 없는 사람들의 이목까지 끌기 충분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관련 내용이 짧게 소개됨과 동시에 서른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이 기사에 대한 의혹이었다.
– 엥? 한국인 건축가가 프랑스 건축물을 복원했다고? 뭔소리?
└ 프랑스에 복원 전문 과정이 있는 거로 앎. 거기 졸업하면 복원 가능
– 이게 가능함? 한국 유전자를 가진 프랑스인 아니고?
– 프랑스는 복원 사업에 굉장히 민감하다고 들었는데, 아주 안 좋은 상황이 아니면 복원하지 않는다고. 기사 내용 보니까, 크리스티앙이 특별 경매 때문에 급하게 복원한 것 같은데 나중에 찬반 논쟁 엄청 심하겠네.
– 축하합니다. 우리나라에 저런 인재가 있으면 칭찬부터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축하할 일이긴 한데, 그렇다고 막 좋아할 일은 아닌 듯.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을 외국인이 복원했다고 하면 의아할 일이긴 해.
└ 이건 인정.
└ 그렇게 생각하니까, 겁나 깨네.
– 방송 찾아보고 왔는데, 아직 한국대 학생이라는데?
└ 이건 또 뭔 소리?
└ 건림건축 다니고 있다고 하긴 하더라.
└ 뭐야? 건축사도 아닌데 총괄 디자인을 맡았다고? 그냥 스텝 아니고?
– 프랑스 방송 인터뷰에 담당자라고 떡하니 소개됐던데. 진짜 뭐지?
평소라면 이쯤에서 끝날 소소한 소식이었으나,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안준영의 팬들이 [건축과 공간] 인터뷰 영상과 프랑스 방송국에 나온 특집 방송까지 퍼 나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관심은 불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를 놓치지 않은 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한예건은 전혀 모르는 0순위 팬, 전연수 기자였다.
“편집장님! 큰일 났어요.”
“뭔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전연수는 안경 너머로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로또예요. 로또!”
“뭐? 진짜? 네가 로또 됐다고? 그래서 회사 당장 그만둘 생각인 건 아니지?”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씨익 웃은 전연수가 한예건의 소식을 전달했고 내용을 확인한 신은영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뭐야? 진짜 로또잖아!”
“어떻게 할까요? 전에 취재한 것만 정리해서 내보내도 대박일 거예요. 사람들 영 앤 리치라면 끔뻑 가는 거 아시잖아요!”
전연수는 발루아의 경매품들이 한예건의 소유물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기자였다.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입이 너무 간질거렸다.
근처에 대나무밭이 있다면, 가서 시원하게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잠깐만. 그래도 친구 일인데, 곤란할 수도 있으니까 확인 먼저.”
기사를 내보내면 대박 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은영은 친구와의 도리를 먼저 지키고 싶었다.
“그럼, 저는 가서 기사 작성을.”
신 편집장이 손바닥을 들어서 서두르는 전 기자를 진정시켰다.
“어. 서희야. 나, 은영인데.”
– 어, 은영아. 오랜만이네.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징조가 좋지 않다.
혹시 벌써 기자들이 눈치를 채고 따라붙기라도 한 건가?
만약 그 때문에 서희가 시달리고 있는 거라면 기사 배포 동의를 받는 게 쉽지 않으리라.
은영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요즘 가구 잘 팔린다고 좋아하더니.”
– 은영아. 나… 어떡하니?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신은영은 울먹거리는 친구의 목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50대 후반에 접어든 나이. 몸의 작은 변화 하나도 부담스러울 나이지 않나?
하지만 은영의 우려와 달리 서희의 걱정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 그게…. 메종&아트 전시회 알지?
“으응. 알지?”
매년 파리까지 직접 방문해 가장 먼저 전시회 소식을 한국에 전하는 잡지사가 무드였으니,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 라 메종드 아르누보가 3월 전시회에 참여하기로 했어.
“뭐?!!”
국내 가구디자이너가, 그것도 출시한 가구가 겨우 한 세트밖에 없는 가구 회사가 그 큰 전시회에 참여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하지만 친구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뭔가 사연이 있겠지.
“진짜 축하해. 너 그 전시회에 꼭 출품해 보고 싶다고 대학 때 그랬잖아. 사군자 시리즈로 참석하는 거야?”
– 그랬지. 그렇긴 한데. 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곤란한 듯 잠시 말을 끊은 서희가 다시 이어 설명했다.
– 아들이 신진디자이너로 선정되어서 참가하는 거라, 작품을 더 만들어야 한대. 그래서 예건이가 나한테도 가구 출품하는 게 어떻냐고 하잖아. 요즘 그 일 때문에 걱정돼 죽겠어.
“뭐어어? 신진디자이너?”
신 편집장의 기함 소리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인터뷰 댓글 반응을 확인하던 전연수 기자가 눈을 번쩍 떴다.
‘뭐지? 놀랄 일이 또 있다고?’
기자의 예민한 촉이 발동했다.
이번 기사는 정말, 정말 대박일 거라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