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94)
094화. 디자인계의 신성 (4)
건림건축에서 수행하는 프로젝트 중, 김수훈 대표의 승낙 없이 건축주에게 보여주는 계획안은 없었다.
뜻이 맞는 건축주와의 인연 한 자락 소중하지 않은 게 없으니, 건림건축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김수훈 대표의 오랜 당부였다.
그러니 건축주와의 관계에 있어 첫 단추를 끼우는 계획안 보고를 가벼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전통을 깬 것에 송구함을 느낀 예건이 재차 사과했다.
“아닙니다. 제 판단이 짧았습니다. 하루빨리 건축주를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대표님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대도. 내 보고를 꼭 통과해야 한다는 사규는 어디에도 없네. 단지 우리 회사 이름을 걸고 제출하는 설계 퀄리티가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노파심에서 확인하려는 것이지.
자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브리핑을 준비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으니 네오소프트 사옥 프로젝트를 무리 없이 수주한 것일 테고. 안 그런가? 허허.”
김수훈 대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건은 전폭적으로 자신을 신뢰해 주는 김수훈 대표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만약 자신이 김수훈 대표 같은 입장이었더라도, 저렇게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렇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큰 규모의 회사를 운영해 본 적은 없으니 입장이 다른 거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자, 다들 기다리니 어서 브리핑 진행하지.”
“네.”
예건은 김수훈 대표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네오소프트 사옥 컨셉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렘 가득한 시선들 속에서 시작된 브리핑은 순식간에 좌중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모두가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게 만들었다.
* * *
마술이 신기한 이유는 도무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것들을 눈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펼치는 마술사의 태연함에 있다.
한예건의 발표는 더할 나위 없이 수려했다.
전해지는 내용에 막힘이 없고, 적절한 강조와 유려한 말솜씨는 전문 프리젠테이셔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컨셉 디자인의 전개 과정은.
비어 있는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는 마술사처럼, 백지에서 시작된 네오소프트의 화려한 형태는 순식간에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저게 다 한예건 팀장,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고?’
이경록은 비현실적인 상황에 그저 기가 찼다.
저 대단한 결과물을 보여주면서도 한 팀장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태연하다.
‘팀의 분위기는 리더가 만드는 거라더니.’
이경록은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발표 내용을 바삐 쫓는 눈길에는 조금의 걱정이나 의구심도 없었다.
평소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두르고 있던 김수훈 대표마저도 연신 인자한 미소를 띠고는 예건의 발표를 편안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현실과 가상, 건축과 게임을 넘나드는 내용에도 누구 하나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좌중을 이끄는 힘은 탄탄한 사고를 바탕으로 한 건축적 주제 의식, 완성도 높은 건축 형태미, 그리고 그 형태에 도출되기까지 탄탄하게 쌓아 올린 스토리에 있었다.
‘대단하군.’
이경록은 한예건 팀장의 부족함을 자신이 채우겠다는 결심은 지워버렸다.
현재의 기획팀으로서는 한 팀장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자신의 역할은 한 팀장과 팀원들 사이에서 심장의 박동을 조절하는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해 주는 것이었다.
그제야 김수훈 대표가 이제 막 구성된 기획팀에 자신을 보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기획팀에 가게 되었다 전했을 때, 걱정하던 공모전 팀 팀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떡해요? 신설 팀이라 차장님이 고생하시겠네요.’
‘가셔서 힘드시면 언제든지 돌아오십시오. 차장님 자리는 항상 비워두겠습니다.’
‘하하하. 맞아요. 저희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차장님.’
그들은 속으로 이경록 차장이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낙후된 팀으로 좌천된 거로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 건림건축 최고의 팀은 명실상부 공모전 팀이었으니까.
하지만 김수훈 대표의 태도나 자신이 경험한 기획팀의 분위기를 돌이켜 보면, 좌천된 것은 이경록이 아니라 공모전 팀 전체였다.
이경록은 속으로 씩 웃었다.
‘다들 틀렸다. 건림건축을 주도하는 건 지금부터 기획팀이 될 거다. 한예건이 존재하는 한.’
기분이 좋아진 이경록은 예건의 브리핑에 집중했다.
‘음? 이상하다?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아까 사무실에서 보았던 건축주 보고용 PPT와 화면에 쏘아지는 내용이 조금 다른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림과 주제어만 있어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기존 자료보다 지금이 훨씬 컨셉을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어? 분명 저런 내용은 없었는데? 설마 2시간 만에 저 많은 내용을 보완한 거라고?’
이경록은 마법을 곧 보게 될 거라던 장 과장의 말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흥미진진한 미소가 이경록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 * *
건축과 가상 공간.
익숙지 않은 개념임에도 다행히 참석자들은 어느 정도 자신이 준비한 브리핑을 잘 따라오는 눈치였다.
‘발표 자료를 보완하길 잘했군.’
기존의 PPT는 설무영 대표를 대상으로 만든 것이었기에 가상 현실과 네오소프트의 게임 요소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설무영 대표는 건축 전문가가 아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건축 개념을 늘여 놓는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거다.
건축과 가상을 접목하는 방식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최대한 텍스트를 배제하고 이미지 위주로 브리핑 자료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킥오프 미팅을 위해 다시 한번 자료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전문가들을 설득하기에 심히 부족한 자료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건은 급히 PPT를 보완했다.
가상 현실과 네오소프트의 주요 게임 요소에 관한 내용을 추가하고, 건축 컨셉에 도달하는 과정과 그 컨셉을 건축 형태에 반영하는 과정을 보강했다.
이유 없는 공간은 없다.
아무리 멋들어진 공간이라도 내재한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저 숙련된 건축기술자의 우수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에 의미를 담아내고, 그 공간을 접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그 의미를 사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건축기술자는 건축가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예건은 본격적으로 건축 개념과 형태에 관해 설명을 진행하고 완벽하게 브리핑을 마쳤다.
그의 노고를 격려하는 박수 소리가 힘차게 회의실을 채웠다.
김수훈 대표가 흡족한 얼굴로 평가했다.
“재밌군. 건축에 그렇게 다양한 가상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착시 효과를 건축에 적용해 현실 공간에서 판타지를 경험하게 하겠다는 의도도 매우 훌륭하게 공간에 반영된 것 같네.”
“감사합니다.”
오만호 이사 또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아이디어가 넘치는 컨셉입니다. 진짜 컨셉대로만 완성된다면, 국내 오피스 디자인의 혁신이 될 겁니다.”
“저 또한 그러길 바랍니다. 아직 초안이라 계획을 모두 보여드리지 못했으나, 건축주의 요청에 따라 각 공간에 게임의 오락적 요소도 반영될 예정입니다.”
“오호-. 사례를 몇 가지만 소개해 줄 수 있겠는가?”
김수훈 대표의 물음에 예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왕좌는 로비 공간 전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만들 생각입니다. 로비의 각 공간을 게임 속 장면으로 꾸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행동이 게임 화면을 관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오~ 그거 재밌겠는데요.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시각이 게이머의 시점이 되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왕좌 주변 고리형 복도와 연결된 통로에는 착시 효과를 활용해 다양한 게임적 상황을 연출할 생각입니다.
진입부에서 봤을 때 중간부터 사라지는 느낌이 들도록 그래픽 작업을 하거나, 아래에서 위를 봤을 때 거꾸로 된 계단처럼 설계된 경사로 같은 것들이죠. 모두 게임에서 활용된 장면을 그대로 적용할 생각입니다.”
“다양한 공간적 경험을 할 수 있겠군.”
“네.”
예건은 그 외에도 설무영 대표가 제안했던 일반적인 오피스와 완전히 다른 공간적 요구사항들을 나열했다.
일과 놀이를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오피스라는 설립 목적에 맞춰 업무 시설과 오락, 휴게공간이 자유롭게 교차되는 공간이나, 오솔길 위에 만들어지는 회의실 등을 설명했을 때는 다들 즐거운 상상을 하듯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좋아! 아주 재미있는 건축이 되겠군. 착공이 내년이면, 완공은 2004년 정도가 되는 건가?”
“네. 2004년 1월 준공 예정입니다.”
“딱이군!”
예건은 김수훈 대표의 뜻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해 그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건설교통부에서 한국 건축 문화 증진을 위해 2004년 완공되는 건축물을 시작으로 건축제전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더군. 업무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할 테니, 우리 회사 대표작으로 선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추진해 보게.”
한국 건설교통부에서 주관하는 건축제전, 그 첫 번째 ‘대상’.
감투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예건이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한국 최고의 건축가라는 명망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기회였으니.
네오소프트를 최고의 건축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예건의 눈에 열망이 끓어올랐다.
“완공까지 책임지고 완벽을 가하겠습니다.”
* * *
가우디 연구소, 연구소장실.
우두커니 테이블에 앉아 있던 벤하민 소장은 자신의 테이블 서랍 아래 깊숙이 넣어둔 스케치북 하나를 꺼냈다.
스케치북을 넘겨 보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다.”
달빛에 비친 얼굴 가득 깊게 팬 주름이 그의 시름을 일러 주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마지막 난제, 영광의 파사드.
완벽에 가까운 디자인을 갖고 있음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화기를 든 그는 머뭇거리다 내선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딸깍 소리와 함께 통화가 연결되었다.
“허허. 사무엘 아직 있었구만.”
그의 목소리를 알아챈 상대가 황급히 물었다.
– 소장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뭐 필요하신 거라도…?
“어, 그게. 전에 그 스케치북 주인 말이야. 아직 찾아낸 게 없는 건가?”
– 아… 그거라면, 전에 말씀드렸던 해변 사진 외에는 발견된 게 아직 없습니다. 아무래도 잠시 머물던 여행자의 소행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도용은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도용이라….’
“그래 알겠네. 혹시라도 미심쩍은 것이 발견되거든 꼭 알려주게. 작은 거라도 상관없으니.”
– 어…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벤하민은 아까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루고 미루었던 영광의 파사드를 장식할 조각가 후보를 조만간 선정해야 한다.
하지만 미련이 남은 그의 시선은 자꾸 스케치북을 향하고 있었다.
“정말 여행자의 장난일까? 아니면….”
기적일까?
벤하민은 기적이라고 믿고 싶었다.
도무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천국에 이른 가우디가 천사를 통해 보내준 메시지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몇 달째 감감무소식인 것을 보니.
바람에 실려 스쳐 지나간 향기가 너무 짙어.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밤이었다.
다음날 벤하민은 스케치북을 들고 통역안내사들이 머무는 운영사무실로 향했다.
“혹시 이 문자가 어느 나라 문자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몇몇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더니, 금세 결론이 났다.
“한국어군요.”
“한국어? 그럼 이 스케치북이 한국에서 판매되는 물건이란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어, 그래. 고맙네.”
벤하민은 허허 웃으며 돌아섰다.
“한국인 예술가라…. 도리가 없군.”
부질없는 기다림에 방점을 찍을 때였다.
그는 스케치북을 들고 분실물 창고로 향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