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1)
대공가의 아기 마님 1권-1장(1/23)
1장
어두운 밤, 황궁에 비할 만큼 웅장한 위엄을 자랑하는 저택은 조용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탑의 꼭대기.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날카롭게 흩날렸다.
마법사 아리엘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라.’
아리엘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말에 홀린 듯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죽여.’
그리고 살육의 밤이 시작되었다.
“……하아, 하아.”
마지막 기사까지 해치운, 망토를 입은 작은 형체가 숨을 쌕쌕 내쉬었다.
망토 밖으로 살짝 드러난 아리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조종당해서 사람들을 죽여야만 하는 이 정신적인 고통은 아무리 거듭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리엘은 피바다가 된 주변을 돌아보며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아냐.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 이상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그리고 곧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의 고통이 곧 그녀의 몸을 덮쳤다.
마법을 무리하게 쓴 후유증이었다.
아파. 너무 아파.
아리엘은 겨우 신음을 삼켰다.
“흑-”
고통으로 허리를 앞으로 말고 웅크리던 몸이 순간 움찔 굳었다.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아리엘이 시선을 겨우 위로 올리자 한 남자가 보였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끔찍한 위험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이대로 압살당해버릴 것 같은 위압감.
그가 다가와 그녀가 쓴 두건 망토를 끌어 내렸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작은 소녀가 달빛에 드러났다.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지.”
‘제발…….’
아리엘은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그러나 악당에게 조종당하고 있던 그녀의 심장은 그대로 터져버렸다.
눈앞이 핏빛으로 물들며 어두워지는 것이 아리엘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떴을 때는 차가운 다락방 안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다락 창으로 희뿌옇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리엘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릴 때 살았던 후작가 다락방이잖아.’
끔찍한 기억이 가득한 곳이라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아리엘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가냘픈 어린아이의 어깨에서 헐렁한 옷이 흘러내렸다.
‘꿈인가? 죽은 후에 꿈을 꾸는 건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히 심장이 터져서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
옷자락을 추어올리며 손을 펴보았다.
제 기억과 달리 훨씬 하얗고 작은 손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뭐야?’
왜 갑자기 몸이 작아졌지?
하지만 줄어든 몸보다도 더 이상한 것은 몸속이었다.
아리엘은 제 목을 더듬어 만져보았다.
‘항상 핏물이 울컥울컥 올라와서 목 안이 쓰라렸었는데.’
그 느낌이 없다.
3년 동안 그녀를 지배하던 고통이 갑자기 사라지니 당황스러웠다.
아리엘은 조그마한 손으로 배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홀쭉하게 말라 갈비뼈가 드러난 몸 안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고파.’
이것도 이상했다.
아리엘은 배고픔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였다.
공격 마법이 차근차근 그녀의 내장 장기들을 상하게 해서 아리엘은 음식을 잘 소화시키지 못했다.
그렇게 먹는 양이 줄어들자 배고픔을 느끼게 해주는 머리의 어딘가가 망가져 버렸는지, 영양실조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식욕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었다.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걷어 다리를 살펴보았다.
드러난 자신의 다리를 본 그녀가 짧게 숨을 삼켰다.
‘내 다리가…….’
아버지에게 얻어맞다가 뒤틀려 불구가 되어버렸던 왼쪽 다리가…….
‘멀쩡해.’
갑자기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정말 꿈인가? 꿈인데 어떻게 이렇게 현실감이 있을 수가 있지?
아리엘은 할딱거리며 팔딱팔딱 뛰는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없어.”
정신을 반쯤 빼놓은 것 같은 앳된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심장에, 그 자리에 있던 게, 없다.
운디르의 저주.
심장 한가운데에 박혀서 끊임없이 아리엘에게 고통을 주던 그 저주의 보석이 없다.
아리엘은 믿을 수가 없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한결 짧아진 다리로 종종걸음을 쳐서 다락방 창틀로 다가갔다.
“아우렐력 809년…… 12월?”
아리엘이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나이와 날짜를 잊지 않기 위해 그녀가 다락방 창틀에 매일 그어놓은 표시였다.
그 표시는 아리엘이 열네 살에 후작가를 나갈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어놓았기에, 틀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분명 열네 살의 봄까지 표시되어 있어야 할 창틀에는…….
아홉 살의 겨울까지만 표시되어 있었다.
기록대로라면 지금은 8년 전인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아홉 살로 돌아온 거라고?
* * *
아리엘라 루실리온.
루실리온 후작가의 하나뿐인 영애.
모든 것이 망가지기 시작한 그해에 아리엘은 열 살이었다.
아리엘은 루실리온 후작가에서 둘째이자 막내였다.
그녀의 위로는 오라비가 하나 있었는데 둘은 어머니가 다른 이복남매였다.
루실리온 후작은 첫 번째 아내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이 차가 십 년이 넘는 젊은 여인을 두 번째 아내로 들였다.
두 번째 후작 부인인 블랑쉐는 눈부신 금발을 지닌 화려한 미인이었다.
칙칙한 청동빛 머리카락을 지닌 나이 많은 후작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던 셈이다.
후작가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블랑쉐는 아기를 낳았다.
불행이 있다면 그녀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것일 것이다.
산모가 죽고 남겨진 아기는 붉은 머리카락에 방금 내린 눈- 백설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아이, 아리엘라였다.
죽은 부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딸이라면 사랑스러울 법도 한데 후작은 아리엘을 끔찍하게 미워했다.
그녀를 낳다가 아내가 죽었기에 아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진부한 이유가 아니라, 아리엘의 외모 때문이라고 했다.
“붉은 머리…… 계집애라고?”
아리엘은 화려한 금발을 가진 어머니를 닮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스칼렛 레드의 선명한 진홍색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루실리온 후작가의 피를 이은 사람들이 모두 청동색 머리카락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어미의 색도 아비의 색도 물려받지 않은 아리엘.
“이 계집은 내 딸이 아니다.”
후작은 아리엘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했다.
부인이 외간 사내와 사통을 했다고 생각한 그는 광분했지만, 그 사실을 밝혀줄 후작 부인은 이미 죽고 없었다.
후작은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며 아리엘의 부친을 찾으려 애썼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후작 부인은 생전에 후작가 저택 바깥으로 좀처럼 나가지 않았고, 저택 안의 사용인 사내 중에는 붉은 머리카락이 없었다.
대충 끼워 맞춰 뒤집어 씌울만한 어중간한 적갈색이나 주황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비를 밝힐 수 없자 후작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 아리엘을 후작가 호적에 올렸다.
대신 그녀는 저택의 구석진 다락방에 가두어졌다.
작은 거울 하나 없는 텅 빈 방이었다.
지체 높은 후작가의 어린 영애가 또래 영애들과 모임을 갖지 않는 것을 두고 사교계에서는 소곤소곤 말이 나왔다.
누군가는 아리엘이 흉측한 외모를 갖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녀에게 몹쓸 병이 있다고 떠들었다.
마지못해 아리엘의 존재를 인정한 후작은 주위 사람들에게 딸 이야기를 꺼내지도, 딸에게 붙은 그 추문을 딱히 반박하지도 않았다.
아리엘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고요히 다락에서 자라났다.
외모 때문에 늘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당하다 보니 어린 소녀는 자기가 흉측하게 생겼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극히 드물다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늘 아비의 화를 돋웠다.
후작은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이나, 그녀에게서 나는 붉은 피만 보면 광기에 사로잡혀 주먹을 휘둘러댔다.
어리고 세상 경험이 없는 아리엘이 자신의 적발은 이상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롬 오라버니처럼 청동색 머리카락을 가졌다면 좋았을 텐데.’
틈만 나면 그녀를 괴롭히는데 시간을 죽이는 한심한 오라비지만 부러웠다.
아리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와 오라비, 둘과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맞거나, 괴롭힘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도 사랑받는 자식이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마음속으로 말하며 아리엘은 하아아 숨을 내뿜었다.
겨울에는 하인들의 방조차 따뜻한 후작가이건만 다락방에 사는 소녀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아리엘은 두 손을 모으고 손끝에 조그마한 마나의 방울을 만들어냈다.
작고 기운 없는 마나 방울이었지만 얼어붙은 손끝을 잠시나마 녹여주는 효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