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134)
엄청난 힘에 밀려난 클라리스는 “꺄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스꽝스런 꼴로 엎어졌다.
무도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클라리스가 루시안에게 엉기다 밀쳐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공개 망신의 현장이었다.
“경고하지. 한 번만 더 내게 접근하면 숨통을 끊어놓겠다.”
빙하처럼 싸늘하고 잔혹하게 말한 루시안은 곧장 아리엘에게로 다가갔다.
아리엘은 그가 그 벌레를 떨쳐내는 것도 보지 못하고 뒤를 돌아서 사람들 틈을 지나고 있었다.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 작은 소녀를 따라잡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아리엘은 웅성이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며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속상해하는 거야? 루시안이랑 나는 그냥 계약 관계일 뿐인데.’
그의 상처받은 표정을 봤을 때의 충격, 클라리스가 루시안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느꼈던 뻐근함이 한순간에 터져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과거, 후작가에서 학대받고 고통당했던 시간을 지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지 겨우 몇 년.
좋은 사람들에게서 따뜻한 감정을 배운지도 오래되지 않은 아리엘이 이런 생소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건 당연했다.
그녀가 테라스 문을 막 밀치려는 순간이었다.
타악. 아리엘은 뜨거운 손에 팔을 잡혀 홱 당겨졌다.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루시안. 그녀의 남편.
아리엘의 팔을 움켜쥔 그가 테라스 문을 열고 아리엘을 테라스로 끌어들인 뒤 문을 쾅 닫았다.
“너 뭐야.”
루시안이 양손으로 아리엘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그는 이성이 확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거기서 왜 가만히 있어. 왜 과시 안 해. 내가 네 남편이란 걸 왜 보여주려고 하지 않냐고!”
그가 거친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손에 잡힌 아리엘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을 루시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리엘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의 어깨를 잡은 루시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딴 놈이라도 있어?”
“네?!”
아리엘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그녀가 고개를 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루시안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시선을 맞췄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지닌 짙은 푸른색 눈.
그 눈이 아리엘의 호흡을 멈추게 했다.
더 이상은 피할 곳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말해.”
한참만에 그녀는 겨우겨우 입술을 뗐다.
“……루시안이랑, 나는…… 계약 관계니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정말로 그러기 싫었는데 말끝에 떨리는 소리가 묻어나왔다.
그녀를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보고 있던 루시안이 아리엘의 어깨를 놓고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잊었나?”
루시안이 몸을 숙여 아리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까이 가져왔다.
그의 숨결이 위험하게 끼쳐왔다.
“아내 도리를 똑바로 하라고 했었지.”
목소리가 낮아서 소름 끼치게 퇴폐적으로 들렸다.
그가 오만한 눈빛으로 명령했다.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내가, 네 것이라고.”
아리엘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이 그녀의 목덜미, 맥박 뛰는 곳으로 내려왔다.
포식자에게 잡힌 작은 동물처럼 그녀의 맥박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리엘은 가슴만 달싹거리며 소리없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가까이 있는 그의 얼굴과 루시안이 한 말이 뒤섞여 헷갈렸다.
‘이건 명령인 걸까?’
하지만 뭔가…… 느낌이 다른걸.
루시안이 위압적으로 턱짓을 했다.
“대답.”
“……알겠, 어요.”
드문드문 끊어지는 아리엘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이 그녀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그가 난간에 기대어 손으로 흑발을 성마르게 쓸어넘겼다.
밤과 어우러진 그 모습은 아찔하게 아름다웠다.
그가 바닥난 인내심을 명료하게 드러내며 말했다.
“벌레 따위에게 발정하는 취미는 없어. 그러니 감히 날 의심하지 마.”
아리엘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나요?
꼭 나한테 변명이라도 하는 듯이.
더한 문제는 그 말에 안심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아리엘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분명 그의 말에 안심을 했는데도, 아리엘의 심장은 두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뭐지, 이상해.’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빛의 드레스 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천천히 날카로운 기세를 억눌러 가라앉힌 루시안이 낮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게서…… 다시는 돌아서지 마.”
방금까지의 위압적인 태도는 사라지고, 이상한 절박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무도회 둘째 날의 저녁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무도회 두 번째 날의 마지막 순서는 황태자 디트리히의 연설이었다.
애당초 이 무도회의 목적은 황태자비를 선보기 위한 것.
이틀이나 여자들과 춤을 추고 어울렸으니 황태자 쪽에서도 슬쩍 마음을 비치는 것이 예의였다.
모든 공주들과 귀족 영애들의 시선이 한데 모인 가운데 디트리히가 입을 열었다.
“다들 궁금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여성분들 가운데 제 마음을 이끈 분이 계신 지를요.”
그의 말에 연회장 안 여자들의 얼굴이 황홀함에 흐물흐물 풀어졌다.
순금을 녹여 뽑아낸 듯한 금발과 여름의 녹음 같은 녹색 눈, 고상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이목구비.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은 제국 미혼 남자 중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오히려 라카트옐 대공가는 오랜 세월 쌓아온 악명과 황실도 범접하지 못하는 위세 때문에 ‘오르지 못할 나무’로 여겨졌다.
황실은 라카트옐과 비교해서 적당히 자비로운 이미지였다.
디트리히가 모든 소녀들의 다리를 풀리게 할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답부터 하자면, 예. 이 중에 계십니다.”
미혼 여자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디트리히와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눠봤거나 춤을 춘 영애, 공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이 자리에서 디트리히의 선택을 받는 단꿈에 부풀었다.
디트리히가 진중하게 미소짓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비 자리는 미래의 황후 자리. 제국의 어머니가 될 사람이어야 하기에…… 저는 좀 더 신중하고 싶습니다.”
그의 시선이 잠깐 다른 쪽으로 향했다.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있는 곳.
아까 작은 소동이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아리엘은 괜찮아 보였다.
그녀 옆에 무심하게 서서 접근금지 기세를 내뿜는 루시안을 본 디트리히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는 여전히 루시안이 아리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시안은 인외의 존재고, 아리엘은 인간이니까.
하지만 대공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리엘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가슴의 통증은 그 때문일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 디트리히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는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그럼, 남은 무도회 기간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한편 수치스러운 꼴을 당한 뒤 구석에 처박혀 있던 클라리스 공주는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이를 갈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대공자 대신 황태자를 유혹해 체면을 세워보려는 마음이 들자마자 깨달아버린 것이다.
디트리히의 시선이 향하는 곳도 아리엘이라는 것을.
“분해, 분하다고. 찢어 죽여버리고 싶어!”
특히 자신을 매몰차게 내쳤던 루시안이 아리엘과는 제법 다정하게 붙어있는 것을 보니 더욱 열등감이 끓어올랐다.
“가만 안 둬…….”
그런데 구석진 곳에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가 접근해왔다.
“공주님?”
“뭐야?!”
잔뜩 화가 난 클라리스는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며 대꾸했다.
그녀가 돌아본 곳에는 검은 망토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묘하게 검고 끈적이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누구야?”
“대공자비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무, 물론이지. 그런데 넌 누구냐니까!”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이 웃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쇠끼리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저 붉은 머리의 대공자비를 미워하는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라는 거지요.”
클라리스의 귀가 솔깃해졌다.
검은 망토의 사람이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클라리스의 눈동자가 약간 몽롱해졌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서 악의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내가 못 가진다면 그 계집도 행복해질 수 없어.”
* * *
무도회 셋째 날 아침, 드레스를 준비하러 온 헬렌에 이어 친구들이 방문했다.
친구들은 어제 클라리스와 있었던 일 때문에 아리엘을 더욱 신경 써주었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며, 아리엘은 조심스레 어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털어놓았다.
클라리스와 루시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상했었다는 것.
아리엘의 이야기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두 친구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귀여워, 아리엘! 드디어 질투라는 감정을 깨달았구나!”
응?
“흠, 흠. 나는 네 그런 솔직한 점을 좋아한다, 아리엘. 질투는 전혀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야.”
으응?
‘질투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할 틈도 없이 다이아나가 아리엘을 와락 끌어안았다.
“당연한 거야, 아리엘. 네 남편이잖아? 네 거라고. 사람이라면 자기 걸 누가 탐내면 기분이 나쁘지.”
잠깐, 잠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