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172)
“혹시…… 루실리온 가 사람들이 어딨는지 알아요? 오늘 안 보이던데.”
루시안에게만은 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물어본 사람마다 다 모른다고 했으니.
본가의 하녀장도, 푸른 사자 기사단도, 심지어 집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제롬이 나를 공격하다가 기절한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녀가 살그머니 루시안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느긋하게 음절을 끌며 대답했다.
“후작과 후작 영식은 황실에 죄를 저질러서 끌려갔어.”
“죄요?”
“그래. 후작가가 영지에서 나오는 돈을 착복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네에?”
아리엘은 몸을 일으켰다.
루시안의 시선이 나른하게 그녀를 따라왔다.
“다행인 건 이제라도 잡았다는 거지.”
“…….”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리엘이 아는 후작과 제롬은 돈에 욕심이 많고 탐욕스러웠다.
황실에 바쳐야 할 돈을 빼돌리고 있었다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애초에 도박 빚에 쫓기고 있었다고 했으니…….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그런 죄가 밝혀졌다고 해도, 수도로 돌아간 뒤가 아니라 여기서 끌려갔단 말이야?
그녀는 의아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럼 후작가는요?”
“후작과 후작 영식이 없으니 네 것이지.”
오만하게 선고한 루시안이 나직이 덧붙였다.
“둘을 조용히 추방하고, 가문은 유지할 수 있게 됐거든. 네 위신이 있으니.”
그의 음성에서 쎄한 느낌이 가득 풍겼다.
몸을 일으킨 루시안이 아리엘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온 그가 말했다.
“기억하지? 부숴서 주겠다고 했잖아. 약속을 지킬 때야.”
아리엘의 머릿속엔 4년 전 루시안이 했던 말이 또렷이 울려 퍼졌다.
후작가 가보 목걸이를 빼앗아주며.
‘나중에 루실리온 후작가를 통째로 부숴 줄 테니 잘 가지고 있어.’
그녀의 팔에 소름이 올라왔다.
확실한 거 하나는 알겠다. 이 일에 루시안이 개입되어 있다는 거.
제국 법상 딸이 가문을 계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집안 남자들이 모두 죽거나 없어지면 딸이라도 임시로 가주가 될 수 있다.
지금 아리엘의 상황은 완벽했다.
후작가에 남은 직계 자손은 아리엘뿐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상황을 만든 것이 분명한 남자가 매혹적으로 말했다.
“그거 가지고 하고 싶은 대로 갖고 놀아.”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아리엘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아버지와 제롬은 정확히 어떻게 되나요?”
“타국의 노역장으로 보내질 예정이라고 하더군. 왜. 싫은가?”
아리엘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후작과 제롬이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게 싫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에 아리엘이 느낄 수 있는 건 안도감뿐이었다.
“아니요. 좋아요. 다시는 안 볼 수 있겠다 싶어서.”
“그래.”
루시안이 만족스럽게 입매를 비틀었다.
그와 마티어스가 오랜 시간에 걸쳐 후작가 두 놈과 아리엘을 학대했던 사용인들을 서서히 망가뜨려 왔다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사라진 후작을 끝까지 추적해 처리할 예정이라는 것도.
그렇게 빤히 아리엘을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그런데 후작가 작은 쓰레기가 어제 이상한 말을 하더군.”
“작은 쓰레기라면…… 제롬 말인가요?”
“그것들이 사냥대회 도중에 네게 찾아왔었다면서. 편지로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아리엘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제롬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그가 당장 루시안 손에 죽지 않은게 행운이었다.
“그런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아리엘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으므로.
이건 자신의 일이었다. 자신의 문제고. 루시안이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정말 사실은…….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아리엘은 기어드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고백했다.
더 이상 뭐라 다르게 설명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루시안이 몰랐으면 했어요.”
“…….”
루시안이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받는 뺨이 뚫어질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의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 그가 낮고 위압적이게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아리엘라. 네 수치는 내 거야. 그것까지도, 내 거라고.”
아리엘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약함, 수치, 치부까지 모두 내 소유인데 내가 몰랐으면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분명 혼나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강한 부분, 돈이 될만한 부분만 골라서 가지려고 했던 가족들이나 악당 무리와 전혀 달라서일까.
집착이 가득한 말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이 신경 쓰이는 듯, 루시안의 손이 아리엘의 작은 어깨를 감쌌다.
“내 옆에만 있어. 라카트옐이 네 수치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한참만에 아리엘이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안의 입술이 뇌리에 새겨지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비딱하게 머금었다.
그 미소를 본 아리엘의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장난치듯 매만진 루시안이 아리엘을 끌어안은 채 지붕에 다시 누웠다.
한참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별똥별만 무수히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 * *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만큼 무섭지 않았다.
루시안이 그냥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려는 걸 아리엘이 극구 반대해서 계단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갖고 있는 마법 클러치에 발 아픈 구두를 넣고, 그 안에 넣어뒀던 편한 구두를 꺼내 신었다.
‘이게 이제야 생각날 게 뭐람.’
두 사람의 고요한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탑 안.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가던 아리엘은 줄곧 망설이다 꺼내지 못한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저, 루시안. 라카트옐에게도 적이 있나요?”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는 아리엘의 손목을 잡아끌고 탑 계단 옆에 있는 성벽 테라스로 나갔다.
아리엘의 어깨를 붙잡은 그가 다소 성마르게 물었다.
“그런 얘기는 어디에서 들었지?”
아리엘은 갈등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수가 습격하기 전에 누군가가 찾아왔었어요. 그리고…… 자신이 라카트옐의 숙적이라고 말했어요.”
그녀는 루시안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게 누구인지 알아요?”
그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되뇌었다.
“……널 찾아왔었다고.”
아리엘은 그에게 앞뒤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마수가 습격해서 마티어스가 상대하러 나간 사이 혼자 남았던 것.
그때 ‘그’가 천막 앞을 지키던 기사들을 쓰러뜨리고 침입했던 것.
그녀에게 늘어놓았던 말들까지.
아리엘이 이야기를 마치자,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시안이 숨을 내쉬었다.
마치 더 나쁜 상상이라도 했었다는 듯이.
마침내 아리엘의 어깨에서 손을 거둔 그가 한참만에 대답했다.
“……그래, 라카트옐에게도 숙적이 있어.”
아리엘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드래곤에게도 숙적이 있다니.
“그 자의 정체가, 뭐길래요?”
어둠 속에서 루시안의 퇴폐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이미 답을 아는 거나 마찬가지야. 신화를 들어봤을 테니.”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신화를 안다면 ‘그’의 정체를 알 수 있다고요?
“암흑 드래곤 라키엘이 왜 이 땅에 내려왔었는지 알고 있지.”
아리엘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되짚었다.
“네. 타락에 물든 마수를 베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그녀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그럼, 혹시……?
아리엘의 눈빛을 본 루시안이 제 머리를 짧게 헝클었다.
뇌쇄적으로 제 속눈썹을 밀어올린 그가 푸른 안광을 내는 눈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것은 ‘타락’이야.”
땅을 더러운 것으로 물들이는 근원.
“…….”
아리엘은 숨을 멈춘 채 서 있었다.
드디어 이해가 갔다.
어째서 ‘그’가 추종하는 무리를 제 뜻으로 쉽게 물들일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마수에게 명령을 할 수 있었는지도.
“이리 와, 아리엘라.”
루시안이 천천히 그녀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자신보다 한참 낮은 아리엘과 시선을 맞춘 그가 설명했다.
“땅에 내려오기 전 라키엘은 어둠 그 자체로서만 존재했지. 그러나 땅에 사는 것들이 타락에 물들어 마수가 되자, 직접 내려와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생겼어.”
여기까지는 아리엘도 아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의 이야기는 더욱 깊고 어두운 곳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드래곤의 형상을 입고 내려왔지. 그리고 타락을 없애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실패했어.
타락은 그렇게 한 번 몸을 피했지. 크게 힘을 잃었던 듯하지만.”
없애는데… 실패했다고?
아리엘의 조그만 얼굴이 굳어졌다.
“그 후 라키엘은 제국의 건국을 돕고, 빌어먹게도…… 제 몸의 일부를 뽑아내 시간과 공간 속에 흩어놓고 인간이 되었어. 그의 후손이 라카트옐인 거고.”
루시안의 입술 끝이 서늘하게 비틀렸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타락의 숙적은 라카트옐이 된 거지.”
아리엘은 이야기를 풀어내 놓고 가라앉은 눈으로 서 있는 루시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나간 역사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다른 것이었다.
“나는, 루시안이 다치는 건 싫어요.”
그녀는 자꾸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애써 끄집어내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루시안이 강한 건 알지만, 정말로 세다는 것도 알지만, 위험한 건 싫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루시안이 침묵하며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곤 갑작스레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놀란 아리엘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가 뇌쇄적인 어조로 물었다.
“지금 내 걱정하는 건가?”
윽,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에요?
아리엘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졌다.
“……당연하죠.”
그러자, 신화를 그려놓은 벽화에나 볼 법한 얼굴로 루시안이 느리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한 줌 모아쥐고 입을 맞추었다.
“걱정 마. 내가 다칠 일 따윈 절대 없으니.”
아리엘은 빨라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생각이 서서히 정리되었다.
‘이제부터 내가 아는 미래는 없어.’
마수 이후로 모든 게 바뀌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정보였던 녹스 남작과 나잇 워커는 이미 해결됐다.
아리엘이 기억하는 마지막은 라카트옐이 공격받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숙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의 공격이 이해 가.’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자신이 루시안 옆에 있으니까.
나도 내 가족을 지킬 거야.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을 지켜줄 거야.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펑! 펑펑펑!
야외 만찬장이 있는 호수 쪽에서 불꽃놀이가 크게 터졌다.
황실에서 특별히 준비한 불꽃놀이였다.
아름다운 빛의 가루가 동심원 모양으로 하늘을 수놓았다.
“와……!”
아리엘은 폭죽의 향연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름다운 불꽃에 매혹된 그녀는 테라스 난간에 몸을 걸쳤다.
“루시안, 저거 봐요.”
상기된 얼굴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그녀의 옆에서, 루시안은 아리엘의 조그만 몸을 가두듯 한 팔로 감싸고 난간을 짚었다.
“예뻐요.”
불꽃의 아름다움 같은 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 풍경을 담고 초롱초롱 빛나는 아리엘의 눈은 사랑스러웠다.
“…….”
루시안은 품 안에 들어가고도 한참 남는 그의 어린 아내를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리엘이 위험할 일은 없어야겠지.’
이 소녀보다 소중한 존재는 그에게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루시안은 손을 뻗어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너 이제 큰일 났어.”
불꽃놀이에 넋을 놓고 있던 그녀가 옆을 돌아보았다.
“네? 왜요?”
무심코 묻고는 그와 지나치게 가깝다는 걸 알아챈 아리엘은 움찔하며 물러났다.
루시안의 손이 서늘하게 그녀의 뺨 윤곽을 훑었다.
내가 깨달아버렸거든. 너 없인 살 수 없다는걸.
아리엘의 뺨을 꾹 잡아 늘린 그가 삐딱하게 말했다.
“너 너무 작은데. 빨리 커, 꼬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