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192)
아리엘의 막사를 나선 루시안은 긴 다리로 순식간에 제 막사까지 걸어왔다.
막사로 들어가려다 멈춘 그가 제 머리를 세게 헝클었다.
젠장.
“왜 저렇게 요망한 거야?”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내 병아리가 언제 저렇게 발칙하게 큰 거지?
의도 따위는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요망함에 정신이 남아나질 않았다.
유혹을 해야 하는데 유혹을 당하고 앉았다니.
귓전에 제 심장 소리가 울렸다.
쿵, 쿵, 쿵.
이 소리를 듣는 건 2년 만이었다.
“……하.”
루시안은 신음처럼 한숨을 쉬고 픽 웃어버렸다.
그의 심장이, 드디어 바로 제 곁에 있었다.
* * *
라카트옐 대공자가 수도로 돌아오자 황제는 승전을 기념하는 대규모 무도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 둘 모두가 참석하기로 결정됐고, 푸른 사자 기사단도 초청받았다.
아리엘의 친구 세실은 푸른 사자 기사단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곧장 기사단 건물을 찾았다.
몇 년간 동고동락하며 훈련했던 세실과 기사들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세실의 스승인 소드 마스터 네드는 그녀를 거의 수제자처럼 키웠었다.
모여있는 기사 무리를 본 세실이 가장 먼저 네드에게 달려갔다.
“스승님!”
세실을 본 기사들과 네드가 손을 흔들었다.
“어, 세실! 잘 지냈냐.”
“오랜만이다.”
“그간 수련은 게을리 안 했고?”
달려가 네드와 마주한 세실은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았습니까? 다친 곳은 없고요?”
네드는 대답 대신 세실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이어서 세실은 차례대로 기사들과 반가움을 나누었다.
푸른 사자 기사단원들 중에는 귀족이 많이 없었다.
더러 섞여있긴 했지만, 실력 위주로 기사를 뽑다 보니 평민이나 준귀족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세실과 그들은 이미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단과 회포를 푼 후, 네드와 둘이서만 연무장에 남게 되자, 세실이 정중하게 대련을 청했다.
“오랜만에 저와 대련 한 번 해주시죠.”
네드는 씩 웃으며 바스타드 소드를 뺐다.
“얼마든지. 실력 줄었으면 혼난다.”
둘은 연무장 중앙으로 이동해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몇십 차례 검격이 오가고, 늘 그렇듯이 승자는 마스터인 네드였다.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세실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전 멀었네요, 스승님.”
하지만 네드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2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세실이 이렇게 많이 성장했을 줄이야.
‘이거 잘하면…… 내 눈으로 최초의 여자 소드 마스터를 보게 될지도.’
그는 검을 정리하며 애써 감탄한 티를 감추었다.
네드는 원래 제자들에게 칭찬이 아주 인색한 스승이었다.
하도 가차없이 기사 지망생들을 쫓아내서 악명도 자자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세실에게 이 말만큼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실 하이츠. 진심으로 물어보는 건데, 푸른 사자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 없냐?”
칭찬 한마디 안 섞고 말했는데도 세실의 눈이 둥그레졌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제국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거기에 들어오라는 건 그녀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제 검술이 뛰어납니까?”
“한참 모자라지, 네 말대로. 하지만 너보다 모자란 놈이 천지야.”
세실은 활짝 웃었다가, 문득 제 상황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웠다.
네드가 설득하듯 덧붙여 말했다.
“주군들은 네가 여자라고 해서 못 들어오게 하실 분들이 아니야. 오히려 실력이 없는 놈들을 쫓아내시겠지.”
“알아요.”
“물론 네가 우리 아기 마님과 가까우니 친분으로 들어왔단 소리를 듣겠지만…… 기사는 네 오랜 꿈이잖냐.”
세실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드는 그제야 문제를 알아차렸다.
“아직도 백작님과 백작 부인께서 허락 안하시는구나?”
세실의 가족들이 그녀가 검술을 배우는 걸 반대하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허락 정도가 아니죠. 아마 이야기를 들으시면 호적에서 파고, 용서 안하실 걸요. 그리고…….”
세실은 빙긋 웃으며 기사단 연무장과 건물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최고의 기사단이니까요. 여자가 친분으로 입단했다는 소문으로 명예를 떨어뜨릴 순 없죠.”
그녀가 단단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의 앞에서 제가 여기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인 뒤에. 그때 당당히 들어오고 싶어요.”
그럼 아버지, 어머니도 인정해주실 테니까.
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실의 그런 면을 더욱 아끼고 높이 샀다.
자신이 가르친 수제자는 실력뿐만 아니라 긍지도 드높았다.
기사가 그 정도 기개와 명예는 있어야지. 암.
흐뭇함을 무뚝뚝하게 숨기며 네드가 말했다.
“그래, 기사답게 당당하게 말이지.”
“네.”
네드가 빙긋 웃었다.
세실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검을 들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 판 더?”
세실의 눈이 반짝거리며 타올랐다.
“스승님만 괜찮으시다면야.”
둘의 검이 다시 허공을 가르며 부딪쳤다.
당시까지만 해도 네드는 세실이 곧 대형 사고를 칠 예정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 * *
이번 승전식 무도회는 특별했다.
황제는 이번 파티에 수도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참석하도록 명했고, 황후가 직접 파티 주최를 맡았다.
마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루시안에 대한 예우였다.
게다가 이번 파티에는 황실 소속 화가들과 조각가들도 초대받아, 루시안과 푸른 사자 기사단을 구현하도록 했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점은 이제부터야.”
파티에 대해 전해주러 온 다이아나가 열변을 토했다.
“1부땐 가면무도회를 하고, 2부땐 무려 기사들 토너먼트를 연다고. 올 사교계 최고의 행사가 될 거야!”
이어서 다이아나는 가면무도회를 이용해 어떻게 사교계 공작을 할지 신나게 이야기해주었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똥말똥 친구를 바라보았다.
데뷔를 한 후에 사교계 행사에 자주 참여하지 않은 그녀로서는 다이아나가 해주는 이야기가 신기하기만 했다.
귀여운 아리엘의 모습에 줄줄 녹아내린 다이아나가 아리엘을 답싹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다이아나의 보랏빛 눈동자에 위험한 욕망이 번뜩였다.
“내가 네 가면을 만들어주면 안 될까? 맞춤 제작으로!”
다이아나의 아리엘 덕질은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 * *
가면무도회를 맞아 황후로부터 특별한 마도구 주문이 들어왔다.
바로, 목소리를 다른 사람처럼 바꿔주는 기능이 있는 마법 물약이었다.
아리엘과 히스가 발명한 이 마법 물약은 악용되지 않도록 황궁 파티장에서만 쓰기로 정해졌다.
한편, 마법 물약이 담길 잔을 디자인하고 황후에게 선보이는 것은 영광스럽게도 마담 헬렌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 대공자비님 드레스는 어떡하지요?”
헬렌은 새로 맡은 일보다 아리엘 드레스를 더욱 걱정했다.
아리엘은 괜찮다며 헬렌을 다독였다.
결국, 헬렌을 통해 소개 받은 다른 의상실이 드레스를 가지고 대공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한 사람은 땅딸막한 키에 분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화려한 화장을 한 디자이너였다.
“샬럿입니다. 대공자비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뒤따라온 여자들에게 박수를 딱딱쳤다.
“모두 가지고 들어와!”
샬럿이 열몇 벌 내외의 드레스를 가지고 올 거라고 생각했던 아리엘은 줄지어 들어오는 행렬에 깜짝 놀랐다.
잠깐, 이게 다 뭐야?
샬럿이 가져온 드레스는 족히 수백 벌은 되어 보였다.
일단 알렌을 시켜 드레스룸으로 안내하긴 했지만 아리엘은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많은 양을…….
‘이 중 하나쯤은 네 취향이겠지, 이런 건가?’
하지만 드레스들은 모두 아름다웠고, 그중 하나도 대충 만든 것이 없었다.
화려한 디자인부터 수수한 것, 최신 유행부터 클래식한 것까지.
온갖 디자인들이 다 있었다. 소재와 장식도 각양각색이었다.
넓은 그녀의 드레스룸에 발 들일 틈 없이 가득 진열된 드레스들을 보자 눈이 즐겁기는 했다.
“와…….”
구경하는 재미가 있기는 하네.
헬렌이 맞춤으로 만들어주는 드레스는 항상 아리엘의 마음에 쏙 들었지만, 이렇게 새로운 디자인들을 많이 보는 건 또 신선한 경험이었다.
“마음에 드시는 걸로 골라 입어보세요.”
샬럿이 설레는 눈빛으로 권했다.
아리엘은 가장 먼저 눈에 띈 샴페인 색 드레스를 골랐다.
그리고 백설공주의 사과 같은 붉은 새틴 드레스, 아이스블루의 시폰 드레스, 라인이 예쁜 네이비색 자수 드레스까지.
‘몇 벌만 입어보면 되겠지?’
커튼 뒤로 들어가자, 하녀들이 솜씨 좋게 아리엘에게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거울을 보기 위해 커튼 바깥으로 나오는데…….
“앗!”
눈앞에 루시안이 있었다.
아리엘은 놀라서 다시 커튼 안으로 들어갈 뻔했다.
“어, 언제 왔어요, 루시안?”
“방금.”
짧게 대답한 그가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천천히 훑었다.
종내에는 아리엘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힐 만큼 빤히.
하지만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매우 단호했다.
“이건 안 되겠군.”
어, 안 되나…….
아리엘은 안 어울리나 싶어 시무룩해졌다.
그때 루시안이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노출이 너무 심해.”
노출?
아리엘은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입은 샴페인색 드레스는 전혀 노출이 심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그냥 등 쪽이 약간 파였을 뿐인데?
“하지만…… 이거 맘에 들었는걸요.”
“안 돼.”
루시안이 저항하기 어려운 말투로 말했다.
허스키하게 낮아진 목소리가 뒷덜미를 쭈뼛하게 했다.
“다른 놈들이 볼 거잖아.”
그가 다가와서 한 손으로 아리엘의 허리를 감쌌다.
사교댄스를 출 때의 자세였다.
숨을 멎게 하는 그의 얼굴이 한결 가까워졌다.
루, 루시안. 이런 식의 자극은 심장에 매우 곤란한데요.
혹시 얼굴 설득이 잘 통한다는 거 알고 이러는 건…… 아니죠?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그가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아. 내가, 네 살갗을 보는 인간들의 눈알을 죄 뽑아 발치에 굴러다니게 하고 싶다면-”
으으으으, 알겠어요!
아리엘은 루시안을 밀치고 얼른 커튼 뒤로 도망쳤다.
* * *
아리엘은 골라놓은 드레스들을 차례로 입고 나왔다.
눈치 빠른 마담 샬럿이 살갗이 많이 드러나는 것은 제외하고 몇 벌을 더 권했기에 그것도 입어보았다.
사락사락.
드레스 천 스치는 소리가 조용히 드레스룸을 채웠다.
얇은 커튼 너머에 있을 루시안이 은근히 의식되어 자꾸만 호흡이 가빠졌다.
‘왜 이렇게 긴장되지.’
고작 드레스를 보여주려는 것뿐인데. 친구들이나 수잔하고는 수백 번 했던 일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