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194)
마도구에 감탄한 아리엘의 뺨이 상기되었다.
“끌리지만 않는 게 아니라 드레스 밟을 일도 없겠다.”
“땅이나 발에 닿을 것 같으면 드레스가 스스로 피할 거야. 그렇게 마법을 걸어뒀으니까.”
“고마워. 히스 밖에 없어.”
하여간 말만 퉁명스럽지, 속은 무른 편이라니까.
아리엘은 칭찬하듯 히스의 머리카락을 쓰담쓰담했다.
평소 같으면 애취급이라고 펄쩍 뛰었을 히스가 웬일로 조용했다.
쉬이 읽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이제 내려가야지. 무도회에 늦겠어.”
아리엘은 시계를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참을성 없는 루시안을 기다리게 했다간 무슨 꼴을 볼지 몰라.
“히스, 가자.”
그녀가 문손잡이를 잡고 뒤에 있는 히스를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히스가 뒤에서 아리엘의 손을 붙잡았다.
* * *
‘미친 짓이야.’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리엘과 함께 보낸 시간으로만 따지면 남자들 중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고, 그만큼 히스는 그녀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았다.
하지만 한해, 한해 지나갈수록 그것만으로 만족하기 어려워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친구나 동기라는 말이 싫어진 건.
어쩌면 마음을 자각하기 한참 전, 그녀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기 싫어했던 때부터였을까.
그런데 이제는 싫다 못해 힘에 겨웠다.
퉁명스러운 말투와 무뚝뚝한 태도로 애써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구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함께 여행에서 돌아와 나란히 서 있는 아리엘과 대공자를 보았을 때 히스는 차마 그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섰다.
오늘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른 남자 옆에 설 아리엘을 생각하니 저절로 몸이 나갔다.
붙잡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내 옆에 서 있어 달라고.
“히스……?”
손목을 붙잡힌 아리엘이 깜짝 놀라서 그를 불렀다.
히스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잡았던 손을 놓아버렸다.
스스로의 행동에 당황한 듯 그가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미안, 그냥…….”
아리엘은 히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붉게 물든 귓가와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표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히스의 기류에 덜컥 걱정이 앞섰다.
“왜 그래. 괜찮은 거야?”
그녀는 한 발자국 그에게 다가갔다.
‘어릴 때의 히스는 감정이 얼굴에 금방금방 드러나서 알기 쉬웠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아졌다.
아리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힘든 일이라도 있는 거면 말해줘.”
하지만 히스는 목울대를 일렁이며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널 좋아해서 착해지고 싶었던 내가, 너 때문에 나쁜 사람이 돼버릴 것 같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대공자에게서 아리엘을 빼앗아 오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싶어진다고.
그는 가보겠다고 중얼거린 뒤 도망치듯 사라졌다.
‘무슨 일이지, 히스…….’
아리엘은 그가 사라진 곳을 한참 보고 있다가 방문을 나섰다.
* * *
현관으로 내려가자 마차 앞에 서 있는 루시안이 보였다.
위로 슬쩍 젖히고 있는 고개 때문인지 흰 목덜미 선이 그대로 드러나서, 그는 지독하게 퇴폐적으로 보였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라 다가가기 망설여질 정도였다.
“루시안.”
조그맣게 부르자, 그가 아리엘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
아리엘은 불안한 기분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드레스 피팅 때 루시안이 예쁘다고 말했던 플라워 자수의 연보라색 드레스를 골랐는데, 그와 비교하니 한없이 안 예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림같이 아름다운 루시안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네?”
영문을 몰라 되묻자, 그가 입술 사이로 나른하게 말을 흘렸다.
“나한테 지금 이러는 거.”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뭘 어쨌길래요?
잠시간 그녀를 태워버릴 것처럼 강렬하게 바라본 루시안이 입속말을 했다.
“큰일인데. 가기 싫어졌어.”
그 목소리를 들은 아리엘은 펄쩍 뛰었다.
루시안의 승전 무도회인데, 주인공이 무도회에 안 가면 어떡해!
그녀는 혹시 루시안이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봐 얼른 마차로 다가갔다.
“빨리 타요.”
긴 드레스 자락을 쥐고 마차에 오르려는데 루시안이 마차 앞을 느리게 막아섰다.
“잠깐, 아리엘라.”
낮게 깔린 루시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그가 제 한 손을 펴고 스르륵 힘을 풀었다.
다음 순간 아리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루시안에게서 흘러나온 새카만 소드 마나가 기묘한 모양으로 모여들다가 결정을 이루어 보석으로 바뀌었다.
마무리를 하려는 듯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자, 검푸른 보석 위로 흰색의 문양이 수 놓였다.
순결한 눈꽃이 핀 흑요석 같은 모습이었다.
‘루시안의 마정석…….’
넋을 팔고 있는 사이 그에게 손목을 잡혔다.
그가 아리엘의 양 손목을 커다란 한 손으로 쥐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되자 긴장감이 훅 올라갔다.
“루시안…….”
그가 뇌쇄적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인간들은 그러더군. 이런 걸 걸어주는 이유는 속박하기 위해서라고.”
못 보는 사이 얇은 플라티나 팔찌에 끼워진 그의 마정석이 아리엘의 손목에 찰랑 걸렸다.
“선물.”
아리엘은 잠시 숨을 멈췄다.
착용하고 있는 오로라 그린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더 값어치 높은 물건이 그녀의 손목에 걸려있었다.
누가 감히 드래곤의 소드 마나로 장신구를 만들 생각을 하겠는가?
루시안의 마정석으로 만든 팔찌는 꼭 그처럼 우월해 보이는 것과 동시에 매혹적이었다.
차가운 스톤에서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내 허락없인 빼지 마.”
낮게 말한 그가 그녀 손목 안쪽의 여린 살갗에 입술을 눌렀다.
보란 듯이 그녀와 눈을 맞춘 채.
닿은 곳이 전류가 스친 듯 아릿했다.
아리엘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이제 가지.”
루시안의 입술이 손목에서 떨어진 뒤, 아리엘은 정신이 너무 혼미해서 잠시 멈추어 서 있었다.
그사이에 준비를 마친 마티어스가 등장했다.
단정하고 금욕적인 인상의 미남자가 검은 제복을 갖춰 입은 모습은 보기만 해도 근사함을 자아냈다.
“아리엘라.”
자연스럽게 아리엘 옆으로 다가선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에스코트하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리엘은 얼결에 그의 손 위에 작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때, 마티어스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게 뭐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루시안이 방금 걸어준 마정석 팔찌였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아리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마티어스가 설명을 요구하듯 루시안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 시선을 받은 루시안이 서늘하게 호전적인 눈빛을 되돌렸다.
한참만에 마티어스가 마뜩찮다는 듯 낮게 혀를 찼다.
“……성년도 안 된 아이에게.”
제 권리를 주장하다니.
마티어스의 입속으로 뒤의 말은 삼켜졌다.
루시안의 기세가 응집된 마정석을 아리엘에게 걸어놓는다는 건 다른 수컷의 접근을 차단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마치 짝에게 제 체취를 묻혀 다른 이성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았다.
실제로 이 마정석 팔찌 때문에 인간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아리엘에게 다가가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를 느낄 것이다.
마티어스는 아직 미성년인 아리엘에게 소유욕을 부리는 루시안이 못마땅해, 가둬놨던 제 기세를 풀었다.
두 남자가 서로를 향해 차가운 기세를 흘리기 시작하자 아리엘은 정신을 차렸다.
“마티어스님, 루시안. 얼른 가요.”
그녀는 양손으로 그들의 옷자락을 살며시 움켜쥐고 마차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둘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같이?”
준비된 마차가 한 대 뿐이라 당연히 셋이 같이 탈거라고 생각했던 아리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런 거 아니었어요?”
대번에 두 사람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럴 리가.”
고개를 기웃해 뒤를 보니 노집사 알렌의 당황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알렌이 마차를 두 대 준비하도록 명했는데, 중간에서 하인이 깜빡하고 전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황을 깨달은 아리엘은 두 사람을 달래듯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마차가 넓으니까 그냥 같이 타요, 네?”
열 명도 더 탈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하지만 두 남자는 대답 대신 절대 싫다는 듯이 서로를 노려볼 뿐이었다.
으으, 라카트옐 남자들…… 애들 같아. 유치해!
결국 아리엘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 삐약삐약 협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도 혼자 타고 갈 거예요.”
진지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알렌에게 말했다.
“알렌, 마차를 세 대 준비해주세요.”
그러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동시에 알렌을 막았다.
“안 돼.”
“거부한다.”
그리고 그들은 아리엘에게 바짝 다가섰다.
“넌 나랑 타야지.”
“넌 나와 가야지.”
실랑이 끝에, 셋이 타는 것보다 아리엘이 혼자 타는 게 더 싫었던 라카트옐 남자들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널찍한 마차 안에서 가장 먼 자리에 각각 나누어 앉은 두 남자는 쌩하니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휴. 떨어져 있을 때는 은근히 서로를 생각하면서, 마주치기만 하면 이렇다니까.
아리엘은 고개를 살래살래 젓다말고 몰래 미소 지었다.
뭐, 그래도 같이 타게 됐으니까.
그들의 가운데에 앉은 아리엘은 창밖에서 인사를 하는 알렌을 향해 살짝 윙크를 했다.
셋이 타는데 성공했어요, 알렌!
“크흡, 마님……!”
처음으로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이 한 마차를 타는 장면을 목격한 알렌은 입을 틀어막고 감격했다.
그렇게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마차 여행 끝에 마침내.
라카트옐 가족은 승전 무도회가 열린 황궁의 파티 홀 앞에 도착했다.
* * *
승전 무도회가 열리는 홀에 입장하기 전에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만났다.
“아리엘!”
“다이아나!”
몇십 년간 보지 못한 가족을 만난 듯이 반가워하며 팔짝팔짝 뛸 기세인 두 친구의 모습에 루시안의 고개가 비딱해졌다.
하지만 다이아나에게 루시안의 반응은 안중에 없었다.
눈앞에 이렇게 예쁜 아리엘이 있는데!
“아리엘, 오늘 정말 너무너무 예쁘다. 우리 아리엘은 요즘 하루가 다르게 예뻐진다니까.”
다이아나가 차려입은 아리엘의 귀여운 자태를 눈에 꼭꼭 저장하며 말했다.
“다이아나가 훨씬 예쁜걸.”
아리엘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게 꾸민 다이아나를 보며 감탄했다.
“다이아나는 정말 멋있고 예뻐.”
최고로 사랑하는 아리엘의 말에 다이아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물거렸다.
사교계에서 차갑고 도도하다는 평을 듣는 평소의 모니카 공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 귀염둥이는 어쩜 이렇게 잘 컸을까.
누가 훔쳐가면 어쩌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