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22)
밤엔 무뚝뚝한 대공 마티어스와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마티어스는 식단이 아리엘 위주로 바뀐 것을 보고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이들의 식사는 아무 말도 않는 마티어스와 먼저 말을 꺼낼 용기가 없는 아리엘로 인해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래도 아리엘은 아침이나 점심과 달리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좋았다.
“오늘은 뭘 했지?”
깜짝이야!
아리엘은 놀라서 들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뜨릴 뻔 했다.
마티어스가 식사 중에 말을 건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한 달만에 처음이다.
“저요?”
“너한테 물었다만.”
마티어스의 어조는 마치 매일 일상을 물어왔던 것처럼 태연했다.
아리엘은 눈을 깜박깜박 거리다가 일단 입을 열었다.
긴장한 나머지 테이블 아래로 조그만 손을 조물거렸다.
“오늘은 드디어 저택 사람들을 소개받았어요.”
그동안은 수잔, 알렌 외의 사람들은 만나지 않았다.
지나다니다 마주치면 인사를 받긴 했지만 정식으로 모두 앞에 선 건 아니었다.
수잔 말로는 너무 갑자기 결정된 결혼이라서 아리엘이 저택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아리엘은 알고 있었다.
비쩍 마르고 볼품없는 데다, 보이는 곳에도 여기저기 상처 자국이 있는 그녀를 배려한 것이라는 것을.
아리엘은 한 달 동안 열심히 먹어서 홀쭉했던 뺨이 조금 차올라 있었고 손이나 얼굴에 있는 상처 자국들도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하녀장 수잔과 총괄 집사 알렌을 대동하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정식으로, 이 집의 작은 여주인으로서.
아리엘은 손가락을 꼽으며 만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수잔은 몇 명 안된다고 했지만, 저택이 워낙 크다보니 적은 수는 아니었다.
“정원사 우즈와 인사했고, 주방장 홀슨도 만났어요. 안채 전담 하녀들과도 인사했고요. 베키, 샐리, 안나.”
아리엘은 수잔과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하녀들에게 제대로 하대를 했다.
여주인다운 말투를 쓰는 건 어려웠지만 아무도 아리엘이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다들 라카트옐이라는 이름을 무척이나 우러러보는 것 같았지.’
아리엘은 라카트옐의 아내이니 그 존경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턱을 짚고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또, 한 일.”
“또요?”
음…… 아리엘은 조그만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을 해내기 위해 집중했더니 입도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아. 오늘은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이라.”
아리엘은 요즘 낮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직 밖이 추워서 나가서 놀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수잔이 물감과 그림 도구를 포함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작은 놀이감들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처음 접해보는 색색의 물감들이 신기해서 아리엘은 그림 그리는데 재미를 붙인 상태였다.
대단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건 마법을 쓰는 것과 조금 비슷한 면이 있었다.
루시안과의 약속 때문에 마법은 쓸 수 없으니까 그림이라도…….
아리엘은 망설이다 물었다.
“보여드릴까요?”
거절할 줄 알았는데 마티어스가 순순히 허락했다.
수잔이 오늘 아리엘이 그린 그림들을 모두 가져다주었다.
마티어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그림을 몇 장 넘겨보았다.
아리엘은 식탁 의자에서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보여드릴까요, 먼저 말을 꺼낸 건 그녀지만 막상 마티어스가 그림을 구경하자 창피하고 불안했다.
못 그렸다고 하시면 어떡하지?
잘 그리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괜히 부끄러울 것 같았다.
“이 그림, 마음에 드는군.”
그가 그림 한 장을 골라냈다.
아리엘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티어스는 잘 그렸다, 못 그렸다고 말하지 않고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아리엘은 기쁜 마음으로 물었다.
“가지실래요?”
마티어스가 종이 너머로 그녀를 넘겨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막 넘겨도 되겠어?”
아리엘이 ‘네!’ 하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무뚝뚝하게 확언했다.
“내가 이 그림을 곧 5천만 데날짜리로 만들 텐데.”
데날은 제국의 화폐 단위였다.
* * *
오, 오천만 데날이요?!
아리엘은 1데날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방금 마티어스가 부른 금액이 엄청난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제가 막 그린 그림이 왜 갑자기 그런 가격이 되어버리는 거죠?
아리엘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질 좋은 종이에 질 좋은 안료로 그려지긴 했지만 그린 사람이 겨우 열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게다가 낙서하듯 그린 거라 좋게 봐주어도 자유분방하다는 점 외에는 특징을 찾기 어려웠다.
마티어스가 옆의 알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렌. 만년필.”
“예, 대공님.”
알렌이 조끼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뽑아 마티어스에게 공손히 바쳤다.
마티어스의 손을 잠시 거친 만년필이 아리엘 쪽을 향했다.
“자.”
‘……?’
아리엘은 영문을 몰라하며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이 그린 그림 하단을 가리켰다.
“네 이름을 써라.”
아리엘은 얼결에 만년필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흑연같이 새까맣고 날렵한 몸체를 가진 만년필이 생각보다 무겁다는 것에 놀랐다.
[아리엘라 라카트옐]조심스럽게 이름을 써넣자 마티어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리고 그는 아리엘의 그림을 알렌에게 넘겨주었다.
“제대로 액자에 끼워 넣어 놔.”
알렌이 그림을 소중하게 받들고 나간 뒤 마티어스가 아리엘에게 말했다.
“한 달만 맡았다가 돌려주지. 네 손에 돌아와 있을 때쯤엔 오천만 데날 이상의 가치를 증명하는 증서와 함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어떻게요?
아리엘은 커다란 두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그런 아리엘을 보던 마티어스가 제 입매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슬쩍 스친 미소가 너무 빠르게 사라져서 아리엘은 다시 두 눈만 깜박거렸다.
방금…… 무척 굉장한 것을 본 것 같았는데?
“이 집에서 나가는 건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거든.”
아리엘은 나중에 꼭 달튼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어스가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아리엘라.”
“네?”
느리게 팔꿈치를 식탁에 댄 그가 말했다.
“지금 수도에선 온통 네 얘기뿐이다. 한 달째인데도 소문이 사그라들 기미가 없지. 널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애태우는 사교계 인간들이 넘쳐난다.”
아리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거대하고 안락한 대공저 안에 살고 있다보니 바깥의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티어스가 나른하게 긴 흑발을 쓸어 넘겼다.
“널 내보내기엔 아직 이르고…… 그림 정도면 적당하겠지.”
‘아.’
아리엘은 상황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해 무슨 소문이 퍼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수도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에 반쯤 미쳐 있을 것이다.
루실리온 후작가에서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열 살짜리 영애가 베일에 싸인 대공가에 시집을 간 거니까.
그야말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떠들기 좋아하는 사교계 귀족들이 환장할 만한 화젯거리임에는 확실했다.
마티어스가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놈들한테는 그림 한 장 던져주고 자기들끼리 개싸움을 벌이게 하지. 어떠냐?”
“……좋아요.”
아리엘도 자기들 호기심 좀 채우겠다고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려 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따윈 없었다.
그녀의 그림 한 장으로는 아리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무성한 추측과 잡다한 해석만 낳겠지.
아리엘이 승낙하자 마티어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허공에 잠시 머물러 있던 커다란 손이 내려와 아리엘의 하얀 뺨을 살짝 토닥였다.
어쩐지 귀여움을 받은 것 같아서 아리엘은 발그레하게 볼을 붉혔다.
그가 식사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나며 말했다.
“후식까지는 함께 못하겠군. 일정이 있어서.”
“네에…….”
어쩐지 아쉬운 기분에 아리엘은 말꼬리를 흐렸다.
한 달 만에 마티어스와 겨우 대화다운 대화를 했는데 너무 빨리 끝나버린 것 같았다.
나가려던 마티어스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아리엘의 다른 그림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