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3)
마주친 흑발의 사내는 높은 창틀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있었다.
주변에 죽은 기사들이 뿌린 피가 웅덩이지어 낭자하고, 그들을 죽인 소녀가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에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움이었다.
그래서 그 모습이 더욱 오싹하게 느껴졌다.
“…….”
그가 아리엘을 바라보자, 그녀는 자신이 사냥감이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명백한 포식자의 시선에 몸이 얼어붙었다.
이빨을 힘껏 드러내보았자 눈앞의 포식자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머릿속을 짓눌렀다.
그에게 대항하면 너무나 손쉽게 죽어버릴 것 같은 공포감.
대체 누구지? 죽은 기사들의 상관인가?
분명 눈앞의 인간은 젊은 사내일 뿐인데 그는 무척 거대해 보이고, 그녀는 사자 앞의 생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 공간 속의 모든 공기와 빛과 먼지의 분자들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창틀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가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왔다.
겁먹은 아리엘은 그를 공격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에 공기가 끔찍이 무거워졌다.
순식간에 중력이 서너배 강해진 느낌이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아리엘이 쓰고 있던 두건 망토를 끌어 내려 벗겼다.
순간, 그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스쳐 갔다.
갑자기 망토가 벗겨진 아리엘은 드러난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이 수치스러웠다.
역시 이상하고 흉측해 보이겠지.
“너.”
짧게 내뱉은 남자가 당혹스러운 빛을 지우고 싸늘하게 물었다.
“몇 살이지.”
그녀는 곧 열일곱이 될 열여섯 살이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몸을 학대당한 아리엘의 성장은 열두세 살 언저리에 멈춰있었다.
“너무 어리군.”
그가 느리게 말했다.
지독하게 청각을 파고드는 뇌쇄적인 음성.
지배자의 목소리.
아리엘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손에 거대한 공격 마법구를 생성했다.
애초에 받은 임무가 이곳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것 아니었던가.
시간을 오래 끌면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손에 시커먼 마나 덩어리가 모이는 것을 보면서도 사내는 무감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눈빛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마치 네 발악 따위는 아무 소용없다는 듯이.
그것에 분해진 아리엘이 그를 향해 마나 덩어리를 던지려는 순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주지.”
아리엘의 손이 멈췄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방금 사내의 휘하 사람들을 모두 죽인 참이었고, 살인은 어리다는 이유로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리엘은 그런 말을 태어나 처음 들었다.
도와주겠다고, 나를?
그녀가 아버지인 후작의 손에 매일같이 주먹질을 당할 때도, 오라비가 그녀를 개보다 못하게 취급하며 괴롭힐 때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아리엘의 심장에 저주의 보석을 심을 때도, 처음으로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히고 벌벌 떨던 날에도 그녀에게 손을 내민 사람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도와주겠다고……?
부하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사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신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엘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그녀의 손에 모였던 검은 마나 덩어리는 사내의 검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처음 보는 광경에 아리엘은 눈을 깜박였다.
사람을 해치는 마법구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듯,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
묘하게 명령조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리엘은 입술을 짓씹으며 그의 청안을 바라보았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만 마치면 운디르의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는데.
마음속에서 불쑥 의문이 솟아올랐다.
‘’그’가 정말로 너를 놓아줄 거라고 생각해?’
줄곧 외면하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막연하게나마 희망을 붙잡고 싶어서. 이번에야말로 마법 계약서까지 써주었으니까, 정말일 거라고 믿으며.
아리엘은 3년간 보아온 ‘그’를 떠올렸다.
탐욕과 증오, 악을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던 ‘그’.
깨달음이 왔다.
‘그’는 절대로 아리엘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그녀는 그의 노예일 것이다.
‘싫어. 더 이상은…….’
아리엘은 눈앞에 선 흑발 사내의 손을 향해 자신의 손을 뻗었다.
그의 크고 긴 손바닥 위에 애처로울 만큼 작은 그녀의 손이 놓였다.
그녀는 동아줄을 잡듯이 사내의 손을 세게 쥐었다.
그녀보다 훨씬 위에 있는 사내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름다움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 그녀가 보기에도 아찔하게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리고 아리엘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심장에 박힌 운디르의 저주 때문이었다.
* * *
그러고 나서 눈을 떠 보니 후작가 다락방에 있었다.
아리엘은 다시 한번 멍하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단풍잎처럼 조그마한 손, 어린 토끼처럼 자그만 발, 짧은 팔다리와 확 낮아진 시야.
분명 그녀는 열일곱 살이 되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8년 전으로 거슬러 깨어난 것이다.
아리엘은 다락 창으로 후작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이른 아침임에도 아침잠이 없는 후작가 집사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분명 내가 후작가를 떠나기 전에 죽었는데.’
한 번도 아리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뚱뚱한 중년의 집사는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죽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있잖아.’
아리엘이 열세 살일 때 후작가 뜰에 세운 동상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저건…….
아리엘은 뜰 구석에 매여 있는 까만 조랑말들과 그 말들이 매여 있는 놀이 마차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저건 제롬 오라버니가 가지고 놀던 건데.’
아리엘보다 세 살 많은 그녀의 오라비 제롬이 후작에게 조르고졸라 받아낸 비싼 장난감이었다.
까맣고 털이 반지르르한 조랑말들에게 채찍질을 하며 신나게 마차로 정원을 가로지르던 제롬을, 다락에 갇힌 채 하염없이 구경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
갑자기 머리를 맞은 듯이 지금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그렇다면 자신이 열일곱 살까지 겪은 모든 일들이 다 꿈이란 말인가?
아리엘은 자신이 알고 있던 공격마법을 구동해보았다.
“티어리.”
주문을 욈과 동시에 몸 안쪽에서 마나가 거세게 움직이며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으윽.”
그녀는 바로 마법 구동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되잖아.
과거 아홉 살일 때는 절대로 하지 못했을, 높은 클래스의 공격마법이 구동된다.
물론 그걸 버텨내기에는 몸이 너무 작고 연약해서 기절할만큼 아팠다.
아리엘은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기억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망가지기 시작했던, 열 살의 생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분명 죽었었는데.’
흑발 사내의 손을 잡는 순간 심장이 산산 조각나며 죽었다.
아마도 ‘그’가 아리엘이 자신을 배반하면 저주가 발동되도록 마법을 걸어놓았던 것 같다.
그때의 고통을 떠올린 아리엘은 몸을 옹송그린 채 부르르 떨었다.
심장이 조각조각 찢어지고 터지던 감각…….
아리엘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은 두 손을 심장께에 모으고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고동을 느꼈다.
잘 뛰고 있다.
아홉 살의 심장은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았다.
‘그러니까 바꿀 수 있어.’
아리엘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과거를 되짚기 시작했다.
* * *
과거.
지금의 아리엘이 과거라고 생각하는 시간들은 곧, 앞으로 그녀가 겪을 미래였다.
미래를 보고 돌아온 셈이니 앞으로의 일들을 척척 예측해가면서 행동할 수 있어야 정상이겠지만…….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어.’
열네 살까지는 후작가 다락방에, 열일곱 살까지는 ‘그’의 손아귀에 갇혀있었던 아리엘은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돌아온 지금도 앞으로 제국에 있을 커다란 사건이나 사교계를 휩쓸 유행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 인생만은.’
아리엘은 단풍잎처럼 조그마한 손을 꼭 쥐어 앙상한 가슴에 대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만큼 대단한 정도는 아니지만, 스스로의 인생을 바꿀만큼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나 자신은 구해낼 수 있다.
지금의 아리엘에게는 그것이면 족했다.
‘일단은 후작가에서 나가야 해.’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무력하게 한쪽 다리를 잃고 가족에게 착취만 당하다가 악당에게 팔리고 말 테니까.
“…….”
아리엘은 과거를 떠올리듯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