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40)
그는 지금껏 가지겠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그것을 손에 넣는 인간이었다.
가지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부수고 싶다는 욕망이 항상 더 강한 편이긴했지만.
“여기요, 루시안.”
마침내 루시안의 손에 아리엘이 접은 핑크색 종이배가 들어왔다.
일단 제 손에 넣고 나자 그다음이 거슬렸다.
“이제부터 종이배는 금지다.”
“네에?”
한껏 억울한 눈망울이 그를 향했다.
세상에, 종이배를 접어줬더니 금지를 당했어.
루시안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만들고 싶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단, 나 외에 다른 사람한테 주는 건 금지다.”
“아아…… 네.”
접는 것 자체를 금하지는 않는다는 말에 아리엘은 안도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제 안의 독점욕을 충족시킨 루시안은 만족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 *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이 저택에 머무르는 기간은 2주일로 정해졌다.
원래는 게이트를 통과하는 시간 사흘을 제외하고 열흘의 휴가를 받은 것이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게이트를 하루 만에 통과할 수 있었기에 휴가는 2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리엘은 처음으로 남편이 저택에서 뭘 하고 지내는지 그의 일상을 곁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다리로 걸어 다니느라 한계가 있는 아리엘과 달리 루시안의 행동반경은 굉장히 넓었다.
루시안에게는 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저택이 하나도 버겁지 않은 것 같았다.
어린아이답게 아침 늦게 일어난 아리엘은 둥그런 빵의 속을 파서 만든 빵 그릇에 담긴 따뜻한 스프를 먹고 나서 루시안이 연무장에서 검 수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아직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야외에 나가진 못했다.
그런 아리엘을 위해 수잔은 연무장이 잘 보이는 곳 창가에 아담한 흔들의자와 폭신한 깔개를 놓아주었다.
아리엘은 그곳에 앉아서 양손으로 턱을 괴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의 검은 롱소드로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리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거…… 로열 아이언 검인 것 같은데?’
마법사 무리에 있을 때 저런 강철이 마법약의 재료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광산에서 흔하게 나는 일반 철과 달리 푸른 빛을 띠는 로열 아이언은 무척 희귀한 재료여서 가루 형태로 조금씩 거래되곤 했다.
그래서 그걸 덩어리 채 녹여 검으로 사용한다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재력이 있는 사람이 지상에 존재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제 남편입니다…….
심지어 루시안의 검은 훈련용이었다.
훈련용 검은 어린 검사들이 자랄 때마다 계속 교체를 해줘야 하는 검. 그야말로 거쳐가는 검이라 할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야, 대공가는?’
처음엔 궁금했는데 점점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아졌다.
알면 알수록 실감이 되긴 커녕 더 놀라기만 할 뿐이니.
루시안의 훈련 상대는 결혼식 날 잠시 보았던 덩치 큰 기사였다.
아리엘은 그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루시안한테 술을 먹였던 사람이 저 사람이지, 아마?’
지나가다 만나면 한 번 노려봐 줘야지.
그녀는 연습하듯 눈에 힘을 주었다.
그나저나 기사의 덩치가 지나치게 산채만 했다.
아무리 루시안이 최연소 소드 마스터라지만 체급 차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또래보다는 훤칠하게 크다해도 루시안은 열네 살의 소년에 불과했다.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몸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저런 근육질의 어른 남자와 검을 맞대면 힘이 부치지 않을까?
아리엘의 걱정이 무색하게 루시안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살짝 땀에 젖은 그의 앞머리 끝이 무겁게 찰랑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가볍게 도약해서 기사의 대검을 내리쳤다.
까강- 강철끼리 닿는 순간 불꽃이 튀며 날카로운 소음이 났다.
루시안의 공격을 받은 기사의 발이 지이이익 뒤로 밀려났다.
‘어째…… 힘에서 밀리는 것 같지 않네.’
소드 마스터라서 그런가?
아리엘은 마법사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검사나 소드마스터에 대한 건 잘 몰랐다.
그래서 인간 몸의 완력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루시안의 힘을 보며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소년에게 힘에서 밀린 덩치 큰 기사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검에 검기를 둘렀다.
아리엘은 눈을 크게 뜨며 창문에 붙어 섰다.
‘저게 검기구나!’
검기, 혹은 소드 마나.
일정 이상의 검의 지경에 오른 사람들에게만 복종하는 고고한 마나.
기사의 검에는 검붉은 빛의 마나가 둘러져 있었다.
이글이글 일렁이는 모습이 꼭 불타는 것 같았다.
루시안의 검도 검기를 뿜어냈다.
그의 머리카락처럼 새카맣고, 짙은 청색 눈동자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검기였다.
뻗어 나오는 모양이 얼음 결정처럼 날카로웠다.
‘소드 마나 신기하다…….’
아리엘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더 신기한 일은 검기를 두른 검끼리 맞부딪쳤을 때 일어났다.
두 검이 닿는 순간, 쾅 소리가 나며 공기의 파동이 원 모양으로 거세게 밀려났다.
주변의 흙먼지가 그 기세에 밀려 회오리가 일고, 풀과 나무가 찢겨나갈 듯 휘청였다.
검기가 없는 대련이 연습이라면 지금은 완전히 실전인 느낌이었다.
아리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창문에 붙어 서서 마스터들의 대련을 구경했다.
검술이란 것은 자연스레 사람의 시선을 빼앗아가는 매력이 있었다.
대련은 루시안의 승리로 끝났다.
덩치 큰 기사가 ‘진짜 살기를 뿜으시다니.’ 하면서 크게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를 대하는 루시안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달리 꽤나 격의 없었다.
‘하긴. 그 루시안에게 술을 먹인 사람이라면…….’
아리엘은 아마도 저 기사가 루시안과 가까운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루시안의 검술 연습이 끝났을 무렵, 아리엘은 깨끗한 수건 한 장을 챙겨서 저택 입구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내려갔다.
닦을 천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는지 루시안이 땀에 젖은 머리를 그냥 터는 것을 보아서였다.
‘아내니까 이 정도는 해야 되겠지?’
현관 안쪽으로 루시안이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리엘은 얼른 그에게 다가가 수건을 내밀었다.
“루시안. 이거요.”
눈앞의 수건을 본 루시안이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검을 들어서일까?
그의 눈동자에는 가라앉지 않은 폭력성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야생의 맹수같은 느낌?
그가 픽 웃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벌써부터 아내 노릇을 하려는 건가?”
어…… 그걸 하라고 명령한 사람은 루시안인데요.
수건을 받아든 그가 대충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뒤 아리엘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다가와 아리엘의 입가를 쓸어냈다.
“읏?”
후드득. 작은 부스러기 같은 것이 입가에서 떨어졌다.
루시안이 가소로운 새끼 고양이를 가지고 노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내 수건 챙기기 전에 과자 부스러기 먼저 털어. 꼬맹이.”
으윽. 아리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계약대로 아내 노릇 좀 해보려고 했는데 완전히 애 취급받아 버렸다.
창피해.
빨개진 아리엘을 보고 쿡쿡 웃은 루시안은 건성으로 땀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내며 제 방으로 사라졌다.
아리엘은 바로 거울 있는 곳으로 가서 얼굴의 과자 부스러기를 깨끗이 정리했다.
‘검술 구경을 하면서 먹었던 버터 쿠키가 화근이었어.’
설탕이 솔솔 뿌려지고 가운데에 빨간 라즈베리잼이 듬뿍 든 버터 쿠키를 먹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입가에 부스러기가 묻는 게 예사였다.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아리엘은 푸욱 고개를 숙였다.
그때 뒤에서 달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 마님.”
“네?”
뒤를 돌아보며 대답하자 달튼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아기 마님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예.”
그럴 리가. 나한테 손님이라니요?
“대공님께서 들여보내셨습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아, 마티어스님이 허락하신 거라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티어스가 들여보낸 손님이라면 아리엘이 만나도 해될 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 꼭 만나봐야 하는 사람일지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에서 만날게요. 그리로 올려 보내주세요.”
도도도 계단을 오르면서 아리엘은 생각했다.
‘근데 손님이 누굴까?’
외부로부터 자신을 꽁꽁 숨기고 있는 마티어스가 허락한 손님이라니.
누구일지 무척 궁금했다.
* * *
똑똑.
문 바깥에서 알렌이 조용하게 손님이 드셨음을 고했다.
“들어와요.”
긴장을 감추며, 아리엘은 란셀 후작 부인에게 배운 대로 테이블에 얌전히 앉은 채 손님을 맞았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낯선 사람이 들어섰다.
“아. 당신은…….”
아리엘은 한 눈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들어온 사람이 아리엘을 보고 멈칫했다가 드레스 자락을 곱게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드레스를 들어 올리는 손이 창백하고 바들바들 떨렸다.
“안녕하세요, 대공자비님. 저는 모니카 공작가의 장녀, 다이아나 모니카라고 합니다.”
아리엘의 손님은 그녀가 마차에서 구한 보랏빛 머리카락의 귀족 소녀였다.
공녀 다이아나는 눈매가 살짝 위로 치켜올라가 새초롬하고 도도한 인상을 풍기는 영애였다.
실제로 다이아나는 무척이나 콧대 높은 아가씨였다.
공작가의 금지옥엽 공녀로 태어난 그녀는 겨우 열다섯인데도 아름다운 미모로 유명했다.
게다가 세 공작가 중 황태자 또래의 딸을 가진 가문은 모니카 가 뿐이었기에 황태자의 신붓감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다.
정작 그녀는 황태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도한 그녀의 자존심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처참하게 부서졌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도, 공녀라는 신분도, 그녀를 며느리감으로 여기던 황제 폐하도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지는 못했다.
다이아나를 구한 건 그녀보다 훨씬 어린 한 여자아이의 용기였다.
다이아나는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구한 것이 어린 대공자비이며, 그녀를 구하면서 대공자비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모니카 공작은 다이아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당분간 넌 절대로 대공 각하와 대공자님 눈에 띄지 말아라.”
“……아버지.”
“여태까지 라카트옐을 건드린 사람은 황족이어도 무사하지 못했어. 사죄와 감사는 아비가 하마. 널 살렸으니 아비는 어떤 대가도 치를 각오가 되어있다.”
그렇게 말하는 모니카 공작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있었다.
다이아나는 아버지가 큰 각오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이아나가 탄 마차를 사고로 몰아간 건 모니카 공작에게 원한을 품은 자였다.
이미 그는 조용히 처리되었지만, 모니카 가는 하늘 같은 대공가에 제대로 된 사죄를 해야 했다.
모니카 가의 싸움에 휩쓸려 대공자비까지 다친 셈이었으니 말이다.
다이아나도 라카트옐 대공가의 악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대공가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 대상에게 앞뒤를 따지지 않고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역사상 어찌나 많은 사례가 있었던지, 제국에서는 그런 대공가를 ‘응징하는 라카트옐’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자존심 센 다이아나는 아버지 뒤에만 숨어있을 수 없었다.
직접 대공자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자비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 몰래 이곳을 찾아왔다.
그녀로서는 거의 목숨을 건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들어오십시오.”
당연히 문 앞에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티어스 대공은 다이아나를 집 안에 들여놓았다.
저택 안은 가끔 드나들었던 황궁보다 더 호화로웠다.
그리고 대공자비의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갔을 때.
다이아나는 겨우 여덟 살 남짓으로 보이는 소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너무 작잖아!’
상상 속의 대공자비는 어리지만 엄청난 오오라를 가진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난 아리엘은 반짝이는 루비같은 머리카락에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생긴 조그마한 소녀였다.
심하게 놀랐음에도 다이아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손이 떨렸다.
“안녕하세요, 대공자비님. 저는 모니카 공작가의 장녀, 다이아나 모니카라고 합니다.”
아리엘은 다이아나가 반가웠다.
자신이 구한 소녀가 궁금하던 차였는데 직접 찾아와주다니.
아리엘은 다이아나가 다친 데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마법이 제대로 작동했었나 봐.’
다이아나는 다친 데 없이 건강해 보였다. 그런데…….
‘잠깐. 모니카 공작가라고?’
아리엘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