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48)
당연하게도 아리엘은 바뀐 잠자리 때문에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루시안이 옆에 있는 상황은 덤이었다.
그녀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루시안을 응시했다.
“근데 나 왜 데려왔어요?”
그가 오만하게 속눈썹을 팔랑였다.
불가에 비친 그는 훨씬 더 위압적으로 보였다.
“너 자는 거 구경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말. 그럴 줄 알았어.
* * *
드넓은 방 안은 적막했다.
촛불 대부분이 꺼져서 어두운 공간 속엔 사람 키만큼 높고 커다란 벽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만 생생했다.
그 한복판, 긴 의자에 앉아 물기를 말리는 루시안의 모습은 인간 세상에 잠시 외유를 나온 천사를 연상케했다.
아리엘은 낯선 향기가 나는 루시안의 이불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이러면 목소리가 웅얼웅얼 나겠지?
“저…… 루시안. 루시안은 내가 마티어스님한테 딸처럼 되는 게 싫어요?”
최대한 웅얼거렸는데 루시안이 고개를 홱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한 손으로 아리엘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그런 멍청한 질문이 어디 있어?”
귀도 좋지. 제대로 다 들었나 봐.
아리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멍청한 질문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어차피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루시안은 내가 여동생이고 마티어스님 딸이면 싫을 것 같아요?”
루시안이 아리엘의 얼굴을 놓고 화가 난 얼굴로 호화로운 침대 기둥에 기대어 섰다.
“싫어.”
그렇구나.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루시안에게 거절당하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리엘은 시무룩해져서 다시 꼬물꼬물 이불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루시안은 얘기가 끝나지 않았는지 아리엘의 이불을 휙 잡아당겼다.
그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 알고는 있어? 남매끼리는 결혼할 수 없어.”
그거야 알죠. 남매가 되면 결혼할 필요가 없잖아요.
가족이 돼서 매일 행복하게 같이 살 텐데.
하지만 이런 마음을 얘기하는 건 계약 결혼한 사이에 맞지 않을 것이다.
루시안이 점점 기분이 나빠지는 듯 단단히 팔을 엇걸었다.
그에게서 위압적인 기운이 뻗어 나왔다.
“넌 내 아내야.”
명령이자 선전포고 같은 그의 말에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리고 나한테 만약 같은 건 없어.”
루시안이 못 박았다.
“난 아내를 여동생 삼고 싶어 하는 머저리가 아니니까.”
그를 더 건드리면 진짜 화낼 것 같아서 아리엘은 고분고분 “네.” 하고 대답했다.
아리엘이 순순해지자 루시안은 기세를 눌러 가라앉혔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지?”
아리엘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할 때는 왜 떨게 되는 걸까?
“루시안과, 가족이 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루시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리엘은 목을 움츠렸다.
역시 기분 나쁘게 했나?
루시안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
아얏.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도 가족이잖아.”
“……!”
아리엘의 둥그런 눈이 더욱 둥그렇게 커졌다.
“가족이요?”
“제국법상 부부는 가족이야. 내가 이런 것부터 가르쳐 줘야 하나?”
마지막 말은 거의 인내심이 바닥난 목소리였다.
아리엘은 입술을 열었다가,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다물었다.
“우리 셋이…… 정말 가족이에요?”
루시안이 짜증을 억누르려는 듯 신음했다.
“……그래, 너랑 나는. 마티어스까지 끼워 넣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
아리엘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가족.
나한테 가족이라고 했어.
피를 나눈 친아버지와 친오빠한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인데.
아버지와 오라비 제롬과의 기억이라곤 아프고 괴로운 것들뿐이었다.
일방적인 증오와 폭력, 하찮은 장난감 취급과 괴롭힘.
게다가 후작가에 지낼 때 하녀, 하인들은 아리엘을 성가신 애물단지로 여겼다.
남는 먹을 것 찌꺼기나 넝마를 던져주면서 사생아 따위가 집안 분위기를 다 망친다며 대놓고 욕을 했었지.
피가 섞이고 어릴 때부터 보아온 사람들은 후작가 사람들이었지만 아리엘은 그들을 진짜 가족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후작이 그녀를 착취하다 못해 악당에게 돈을 받고 팔았을 때 아리엘은 가족에 대한 미련을 놓았다.
살기 위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보답받지 못한 애정은 오히려 그녀를 상처입히는 칼날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이곳에 온 뒤 아리엘은 고통으로 얼룩진 가족의 기억들을 차차 지워나갔다.
어른 남자가 손을 뻗는 게 때리려는 의도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루시안이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구는 것도 오라비 제롬의 악의 담긴 행동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정에 고픈 어린 아리엘을 아껴주는 수잔과 사용인들도 결코 남 같지 않게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가족’이란 것의 정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
게다가 루시안이 가족으로 인정해주었다는 사실이 아리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루시안같이 솔직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비록 계약 때문에 시한이 있는 관계일지라도.
‘기쁘다.’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헤실 웃음을 흘렸다.
루시안은 그 모습을 기막히다는 듯 응시하다가, 누운 아리엘의 양옆에 확 손을 짚어서 그녀를 가두었다.
“루시안?”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의아해진 아리엘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루시안의 눈동자는 어둡게 잠겨 있었다.
“넌 내가 정말로 무섭지 않아? 이상하지도 않아?”
“…….”
왜인지는 몰라도 그가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아리엘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알렌한테 들었어요. 사람들이 개미라면,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은 사자라고요.
사자니까 무서워야 정상이겠지만…… 나는 루시안이 똑같이 사람으로만 보이는걸요. 그러니까 무섭지 않아요.”
루시안이 한 단어를 되씹어 뱉었다.
“사람……. 글쎄, 내가 진짜 사람일까?”
순간 아리엘은 그의 짙은 청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빛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루시안이 검집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의 입술이 파멸로 유혹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잘 봐.”
그대로 루시안은 검을 제 팔에 그어 넣었다.
꺅! 루시안?!
아리엘의 비명은 루시안의 손에 의해 그대로 막혀버렸다.
아리엘이 소리를 지를 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 그는 곧장 입부터 막았다.
아리엘은 몸부림을 쳤지만, 힘 차이 때문에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쉿.”
나직하게 위협하는 루시안의 팔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뚝뚝 흘러내렸다.
아리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저대로 두면 피를 많이 쏟아서 죽을 거야. 아니면 적어도 팔을 못 쓰게 될 거야!’
루시안이 얼마나 깊이 검을 그어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처가 심상치 않았다. 가장 안쪽 혈관까지 잘린 것 같았다.
달튼이 우스갯소리로 미친 대공자님이라고 했을 때 전혀 믿지 않았었는데.
눈앞에서 보니 알 것 같았다.
자기 스스로를 해치다니, 루시안은 미친 게 확실해!
‘빨리 지혈을 하지 않으면…….’
“읍, 읍읍!”
다급한 마음에 아리엘은 그의 옷자락을 마구 잡아당겼다.
루시안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리엘의 손을 떼어내 침대에 잡아 눌렀다.
“가만히 있어.”
무력해지자 아리엘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그냥 무섭다고 할걸.
무서워 죽겠다고, 루시안은 너무너무 이상하다고 할걸.
‘이제 겨우 가족이란 말을 들었는데…… 루시안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안 돼. 안 돼.
아리엘은 고개를 저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루시안이 멈칫하며 입을 막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루시안의 손 사이로 아리엘의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의 힘이 풀렸으니 의사를 불러야 하는데, 목에 덩어리 같은 것이 꽉 막혀 우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흐윽, 흐으윽…… 루시, 루시안…….”
“눈 떠.”
루시안이 명령했다.
아리엘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보라고? 그리고 그를 겁내라고?
겁이 나긴 했다. 그를 잃을까 봐. 그가 팔을 영영 못 쓰게 될까 봐.
루시안이 아리엘의 어깨를 붙잡고 으르렁거리며 다시 명령했다.
“눈 떠서, 제대로 봐.”
루시안이 이런 목소리를 낼 때는 거부할 수 없었다.
반항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지배자의 목소리.
아리엘은 그렁그렁한 눈물 사이로 겨우 눈을 떴다.
루시안이 검으로 그었던 팔을 그녀의 눈앞에 가지고 왔다.
“……!”
순간 아리엘의 울음이 딱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