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56)
“아기 마님은 이제 대공자비시지요?”
“네.”
“대공자비는 라카트옐 가문의 얼굴 같은 거예요.”
수잔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아기 마님을 위해서 쓰는 것이, 곧 대공가 안살림에 쓰이는 거지요. 둘은 같은 거예요.”
“…….”
‘어, 어쩐지 설득될 것만 같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잔이 말하면 그게 뭐든 믿게 되어버린다.
수잔이 얼마나 대공가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자신을 얼마나 아껴주는지 알고 있어서일까?
수잔이 아리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이끌어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시지 말고 점심 먼저 드세요. 걱정이 많으면 키가 안 큰답니다.”
아리엘은 고분고분 냅킨을 무릎에 깔고, 스푼을 집어 들었다.
그녀 앞에 따끈한 스튜와 핑크색 딸기 크림치즈, 쫄깃한 빵이 먼저 놓여졌다.
크림치즈를 스푼에 살짝 묻혀 핥자, 은은한 딸기맛이 퍼지며 새콤달콤한 과육이 부드러운 치즈와 함께 느껴졌다.
한 마디로,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아리엘은 나이프로 크림치즈를 양껏 듬뿍 퍼냈다.
빵 위에 두껍게 바르고 크게 한 입 깨물었다.
맛있어…….
근심이 싹 날아가는 기분이다.
수잔이 호두와 피칸을 주재료로 구운 파이를 큼직하게 잘라 덜어주었다.
파이 바닥이 부순 쿠키와 버터로 이루어져 달콤했다.
아리엘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맛있게 점심 식사를 마친 아리엘은 수잔에게 열쇠 꾸러미를 보여주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했으니까.
“근데요, 수잔. 이 열쇠들은 다 뭐예요?”
수잔이 열쇠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더니 대답했다.
“이건 안창고 열쇠랍니다.
이 독수리 날개 문양이 박힌 것이 무기고 열쇠예요. 보검들이 있지요.
기다랗고 물고기 모양 손잡이인 것이 살림고고요.
거기 맨 아래 용 무늬 금박이 씌워진 것이 보물고, 왕관 인장이 찍힌 게 기록고 열쇠랍니다.”
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분명 아까 달튼이 이거 다 내 소유라고, 마음대로 쓰라고 했는데?’
가까스로 상황을 이해한 아리엘은 입을 딱 벌렸다.
잠깐. 잠깐만.
그럼 마티어스님이 나한테 대공가의 무기, 살림살이, 보물, 기록물…… 그걸 다 맡기신 거란 말이야?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리엘은 작게 신음하며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푹 가렸다.
“…….”
이쯤 되자, 그녀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만 당신의 아내로 살게 해주세요.’
올해 1월, 아리엘은 그녀를 아버지의 손에서 구명해줄 유일한 가문, 피와 광기의 역사로 유명한 라카트옐의 대공자에게 열 살의 나이로 청혼했다.
그런데 왜…….
그해 봄, 그 집 곳간 열쇠가 손에 떨어지는지.
* * *
한참동안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끙끙거리던 아리엘은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안 그래도 분이 묻어날 것처럼 하얀 아리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자, 수잔은 바로 따뜻한 코코아를 가지고 와서 그녀를 달랬다.
“우리 아기 마님, 놀라셨군요? 괜찮답니다. 자, 이것 좀 마셔보세요.”
시나몬 가루가 들어간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자 뱃속이 따뜻해지면서 조금 안정이 되었다.
수잔이 사근사근하게 아리엘의 등과 어깨를 쓸어주며 말했다.
“제가 주로 드나드는 곳은 살림고지요. 봄이 될 때 커튼을 싹 다 새로 바꿨던 거 기억나세요?”
“네, 기억나요.”
그 날은 꽃샘추위 때문에 아직 쌀쌀한 2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수잔과 하녀, 하인들이 아침부터 커튼과 벽지를 바꾸고 소파와 이불 천, 테이블보를 새것으로 교체했다.
겨울엔 얌전히 놔두었던 외부 분수대까지 단장했다.
겨울보다 얇은 천의 커튼, 깔끔한 흰 벽지.
햇볕 냄새가 나는 깨끗한 소파 덮개와 테이블보.
디자인은 겨울과 같았지만 봄을 맞아 바꾸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새로 다는 커튼이나 벽지, 장식들이 있는 곳이 살림고예요. 어때요. 별거 아니지요?”
“…….”
수잔의 말에 아리엘은 조금 용기가 났다.
그래. 살림고 정도라면.
나머지 보관고엔 안 들어가 보면 되잖아.
수잔이 웃으며 아리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점심도 잘 드셨으니 저랑 살림고에 가보실래요? 살림고는 별채에 있답니다.”
수잔의 부드러운 애정을 느낄 때마다 아리엘은 늘 따스함과 간질간질함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만 살짝 끄덕여 가고 싶다는 뜻을 표현했다.
“좋아요. 가서 실컷 구경하고 놀다 오자고요.”
둘은 사이좋게 손을 잡고, 물고기 모양 손잡이가 달린 열쇠를 든 채 방을 나섰다.
아리엘은 나가기 전에 마법으로 조그마한 이공간을 연 뒤 그곳에 나머지 열쇠들을 안전하게 넣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
별채 나들이의 동행으로 하녀 베키와 안나가 따라왔다.
하녀들 중 어린 축인 두 사람은 잔뜩 흥분해서 호들갑을 떨었다.
“저, 여기 구경 처음 와 봐요. 대공자비님 덕에 와볼 수 있게 되다니.”
“맞아, 맞아. 저도요. 너무 기대돼요.”
아리엘도 사실 별채 건물을 멀리서 본 적은 있었지만, 안에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는 데다, 그곳 외에도 알아가야 할 곳이 많아서 그동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별채 건물은 눈부신 흰 벽으로 둘러싸이고, 고아한 민트색의 문이 무척 높은 건물이었다.
문지기에게 열쇠를 보여주고 들어가자 사람 키 세 배만한 높이의 원목 문이 그들을 맞았다.
‘건물이 높아서 3층짜리는 되는 줄 알았는데. 층 없이 통째로 쓰는 곳이었구나.’
문에는 물고기 모양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아리엘이 가진 열쇠를 넣어서 돌리자 자물쇠가 꼭 맞게 돌아가며 달칵 열렸다.
끼익.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실내로부터 빛이 환하게 쏟아져 나왔다.
아리엘은 눈이 부셔서 소매로 살짝 눈을 가렸다 떼었다.
엄청난 규모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높은 살림고 천장을 바라보며 아리엘이 말했다.
“와……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어요.”
살림고의 천장은 지붕 대신 유리로 이뤄져 있었다.
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온 보관고 안을 가득 채우며 실내를 환하게 만들었다.
수잔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젠 여기가 모자라서 보관고를 또 짓고 있지요. 그곳 열쇠 모양은 아기 마님 뜻대로 제작할 거랍니다.”
하녀 두 명이 신나서 재잘거렸다.
“아기 마님, 인어 모양은 어떠세요?”
“얘도, 마님께서 직접 정하셔야 진짜 의미가 있지.”
“어머. 그렇지, 참.”
보관고 안에는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선반장들이 빼곡히 세워져 있었다.
선반장 사이사이 벽에는 화려한 등잔이 있어서 밤에 조명 역할을 할 것 같았다.
수잔의 안내를 따라 타박타박, 첫번째 선반장 구역으로 들어선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흡. 숨이 조그만 목구멍에서 탁 막혔다.
“…….”
아까 수잔이 한 말은 거짓말인 게 분명했다.
이 살림고는 절대, 절대, 절대 별거 아닌 공간이 아니었다.
라카트옐의 숨겨진 부가 모두 이 안에 잠들어 있었으니까.
별채 안의 풍경은 몇 달간 라카트옐의 호화로움에 익숙해진 아리엘을 다시 놀라게 할 정도였다.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에는 유리가 끼워져 안이 들여다보이는 그릇장들이 있었다.
늘 티 하나없이 깔끔한 흰 식기만 올라와서, 아리엘은 대공가에 다른 그릇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앤티크 그릇장 안에는 지금껏 보지못한 화려한 그릇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아리엘의 발걸음은 첫 그릇장 앞에서 멈춰버렸다.
수잔이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대를 이어가며 물려받은 그릇들이랍니다. 각 시대마다 최고의 그릇장인들이 만들어서 지금도 견고하고 고급스럽지요.”
하녀들이 뺨을 붉히며 소곤거렸다.
“아기 마님, 이 그릇들 너무 아름다워요. 그렇지 않으세요?”
“이렇게 비싼 그릇들은 깰까 봐 만지지도 못하겠어요.”
첫 그릇장에는 코발트블루 안료로 문양을 그린 도자기 그릇들이 놓여있었다.
같은 디자인의 접시, 찻잔과 찻잔 받침, 도자기 주전자, 화병, 핑거볼, 케이크 받침대 등이 한 세트로 그릇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래 미닫이 장 안에는 접시 몇백 개가 함께 들어있었다.
“엄청 많네요.”
“연회 손님 접대용이라 갯수가 넉넉한 거랍니다.”
다음 그릇장 안에는 화사한 꽃무늬가 그려진 디자인, 그 다음은 광택 있는 검은 식기에 은으로 문양을 그린 것.
그 다음에는 레이스처럼 로맨틱하게 조각된 테두리를 가진 디자인, 다음엔 황금 무늬가 새겨진 것…….
수십 종류의 그릇들이 사용되지 않고 그릇장 안에 모셔져 있었다.
수잔이 조금 아쉬운 듯 웃었다.
“대공가에는 오랫동안 손님을 접대할 일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아기 마님이 계시니 달라지겠지요.”
그릇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있던 하녀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이런 그릇들로 연회를 하면, 아아, 얼마나 멋질까! 웬만한 귀족 부인들의 코는 납작해질걸요.”
“부러워서 그 자리에서 기절할지도 몰라. 이게 다 아기 마님 소유라니…… 설레요!”
하녀 중 하나가 아리엘이 좋아할 것 같다면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이것 보세요, 아기 마님. 너무 예쁘죠?”
안나가 가리킨 그릇장 안에는 분홍색의 아기자기한 도자기 그릇들이 들어있었다.
색은 파스텔톤이지만 디자인은 유치하지 않고 세련됐다.
그려진 꽃무늬도 과하지 않고 소녀스러운 정도였다.
분홍색을 좋아하는 아리엘은 이 그릇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예쁘다…… 다음에 이 그릇에 식사해도 돼요, 수잔?”
뒤따라오던 수잔의 입이 미소로 함박 벌어졌다.
“당연하지요! 아기 마님 들어오시고, 이 그릇들을 쓰고 싶어서 얼마나 근질근질했다고요.”
예쁜 핑크색 그릇들을 지나치자 금속 그릇이 나왔다.
금식기와 등잔, 촛대는 순금으로 만들어져 무겁고 화려했다.
은식기들은 주로 접시와 커트러리(포크, 나이프류의 식기)였는데 양이 무척 방대했다.
하녀들은 입을 벌리고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금세공 좀 봐…… 눈이 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