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69)
춤을 추던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말을 그쳤다.
마치 자석으로 끌어당긴 듯 모두 아리엘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데뷔한 소녀가 두 번째 드레스로 갈아입고 오는 것은 사교계에서 즐겁게 여기는 행사 중 하나였다.
등장 드레스는 모두 하얀색을 입어야 하니, 무도회 드레스로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엘처럼 이렇게 시선을 끈 소녀는 없었다.
뭉쳐 서서 대공가와 아리엘 이야기를 떠들어대던 영애 무리는 웅성거림이 들려오자, 그 중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빽빽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아리엘이 등장했다.
순백의 흰 드레스가 아닌, 분홍색의 무도회 드레스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영애들의 입술 사이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난 이제 여한이 없어. 좋은 인생이었다.’
다이아나는 공작가 여식의 체통도 잊고 그 자리에서 녹아버렸다.
* * *
마담 헬렌은 무도회가 열리는 당일까지 아리엘에게도 드레스를 숨겼다.
공을 들이고 싶다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자신의 어린 뮤즈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헬렌의 계획대로 드레스를 오늘 처음 본 아리엘은 놀라고 말았다.
등장 드레스도 무척이나 예쁘고 섬세했지만, 무도회 드레스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이 들어간 드레스였다.
속이 비치는 연핑크색 천을 수백번 덧대어 사랑스럽게 물든 분홍색 드레스는 봄의 벚꽃을 떠올리게 했다.
어깨부터 허리까지는 로즈 골드빛 금 문양이 화사하게 들어갔고, 중간중간 박힌 작은 다이아몬드가 빛을 흩뿌렸다.
움직일 때마다 사라락 흔들리는 치맛단은 흩날린 꽃잎이 떨어져 내려앉은 듯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건, 브루노어의 솜씨…….’
아리엘은 은은한 마법이 느껴지는 드레스 자락을 어루만졌다.
꽃잎같은 드레스 아랫자락은 브루노어의 마법 때문에 쉼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춤을 추기 위해 움직이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 분명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드레스는 아리엘이 걸고있는 다이아몬드 레이스 목걸이와 세트로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헬렌은 두 드레스 디자인을 모두 관통하는 목걸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아리엘은 숨죽여 말을 꺼냈다.
“헬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대공자비님께서 입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겐 큰 영광이랍니다.”
센스 있게 말한 헬렌은 아리엘이 드레스를 갈아입는 것을 돕고, 아이보릿빛 진주 귀걸이를 귀에서 살며시 흔들리는 벚꽃 귀걸이로 바꾸어주었다.
머리 장식도 화환이 떠오르는 디자인의 티아라로 바꾸었다.
“서두를게요. 늦으시겠어요.”
아리엘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볼 새도 없이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장 란셀 후작 부인을 만나 이쪽으로 걸어온 참이었다.
홀 안의 모두가 봄의 현신 같은 어린 소녀의 자태에 넋을 잃었다.
아까 흰 드레스가 순수하고 청초하며 귀여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화사하고 생기있는 사랑스러운 분위기였다.
영애들 틈으로 들어온 아리엘 옆에서 란셀 후작 부인이 말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리 재미있게 하고 계셨답니까?”
“…….”
모두가 아리엘에게 정신을 파느라 대답이 없었다.
색채가 화사한 아리엘이 오자 은빛으로 산들대던 실비아의 미모는 확 죽어서 밋밋해 보였다.
방금까지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던 그녀이기에 그 대비는 더욱 격심했다.
이래서야 아리엘이 자라면 얼마나 아름다워질지 기대감만 높여준 꼴이 아닌가.
고작 열 살짜리 소녀에게 미모로 밀린 실비아는 당황한 나머지 표정관리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음, 음.”
멍하니 있는 영애 무리 때문에 답답해진 다이아나가 살짝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영애들이 허둥대면서 드레스를 들어 올려 인사를 했다.
“후작 부인. 대공자비님.”
아리엘은 배운대로 우아하게 아랫사람들에게 취하는 예의를 보였다.
조금전까지 아리엘을 두고 보고 배운 것 없다고 헐뜯던 영애들이 서로서로 눈치를 보았다.
다이아나는 고소해서 속으로 웃었다.
“영애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에 함께 듣고 싶더군요.”
후작 부인이 유려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대공가 뒷말을 하던 영애들은 당황했지만, 실비아는 금방 태연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 라카트옐 가에서는 언제쯤 안주인 맞이를 하나 궁금해하고 있었답니다.”
란셀 후작 부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안주인 맞이라니.
안주인 맞이란, 새로 안주인이 들어오면 사교계의 여자 귀족들을 초대해서 하는 실내 파티였다.
그 파티의 품격으로 새 안주인을 평가하기도 하는 중요한 의식.
생애 처음으로 파티에 참가해 본 어린 아리엘이 안주인 맞이를 치를 수 있을 리 없었다.
겨우 오늘 데뷔한 소녀가 아닌가.
란셀 후작 부인은 뱀 같은 실비아의 미소를 보고 얼른 혀에 기름칠을 했다.
“오늘 보셨다시피 대공님께서 아리엘라 대공자비님을 무척 아끼셔서요. 그런 피곤한 일은 허락하지 않으시지요.”
속뜻을 풀어내자면 이 정도였다.
‘대공님이 아끼는 소녀이니까 헛물켜지 말아라.’
뜻을 단박에 알아들은 실비아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대공비 자리를 노리고 있는 그녀로서는 아리엘이 대공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비아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미혼 영애 중 사교계 서열이 가장 높은 여자였다.
아름다운 미모, 혼기가 꽉 찬 나이, 좋은 집안.
지금껏 두려운 것 없이 살아왔던 그녀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가요? 하지만…… 안주인 맞이는 대대로 안주인이 그 집에서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고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일 텐데요.”
속뜻을 풀자면 이거였다.
‘그렇게 아끼는 소녀라면 안주인 맞이를 열어주는 게 맞지 않나? 사실은 대공님의 총애를 못받고 있는 거 아냐?’
말을 마친 그녀가 비웃듯 미소지었다.
“물론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요.”
“실비아 영애. 그런…….”
란셀 후작 부인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아리엘의 앳되고 낭랑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다들 제가 안주인 노릇을 잘할까 걱정되는 모양이에요, 란셀 후작 부인.”
“…….”
순식간에 무리가 조용해졌다.
아리엘은 실비아와 란셀 후작 부인 사이에 오간 대화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사교계에 들어와 본 적은 없어도 과거 열일곱까지 살았던 경험이 있었고, 다이아나와 후작 부인에게 배워 말의 속뜻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아리엘은 자신을 공격하고자 했던 실비아의 의도를 손쉽게 간파해낼 수 있었다.
아리엘은 고개를 들어 영애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들보다 한참 어리고 작은 그녀의 눈빛을 모두가 슬금슬금 피했다.
‘그래. 이런 사람들은 과거에도 많이 봤잖아, 아리엘.’
전투 마법사로 살 때, 그녀는 어린 계집애라고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들은 아리엘이 직접 실력을 보여줘야 꼬리를 말고 물러나곤 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느껴야 입을 다무는 종류의 인간들.
‘여기 사교계도 다르지 않은 거야.’
아리엘은 턱을 조금 들어 올리고 실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면, 보여주면 되지.’
마티어스는 그녀가 하는 일은 다 책임져 주겠노라 했고, 루시안은 그의 권한이 다 그녀의 것이라고 했다.
아리엘이 뭘 하든 괜찮다는 의미였다.
‘이참에 라카트옐 가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벗길 수 있다면. 파티도 나쁘진 않을 거야.’
결심한 그녀는 작은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이제 5월이니 곧 장미가 피겠지요?”
아리엘의 미소에 분위기가 스르르 풀렸다.
귀여운 소녀의 웃음은 사람들을 누그러뜨리는 힘이 있었다.
아리엘이 말을 이었다.
“저희집 정원에 흰 장미가 가득 핀 장소가 있답니다. 화이트 가든이라는 이름과 참 잘 어울리는 곳이에요.”
화.이.트.가.든!
란셀 후작 부인을 포함한 무리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화이트 가든. 이름만 들어본 그곳.
호화롭고도 은밀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비밀스럽다는.
대공가의 안주인만을 위한 공간.
다들 열살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아리엘은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조만간 작은 티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함께 해주시겠어요?”
“…….”
모두의 놀란 표정과 함께, 길지 않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실비아를 떠받들고 예찬해대던 영애 중 하나가 양손을 맞잡고 외쳤다.
“무, 물론이죠! 이걸 안주인 맞이로 볼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