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74)
“이상하다고.”
그가 연거푸 말했다.
소리가 들렸는지 아리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그만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작은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루시안은 그 물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보냈던 붉은 튤립의 꽃잎 한 장.
어찌나 계속 쥐고 있었는지 아리엘의 손바닥 중앙에 붉은색 꽃물이 들어있었다.
“……하.”
루시안이 제 머리를 움켜쥐며 짧게 신음했다.
한참만에 입을 뗀 그가 잇새로 낮게 말했다.
“어쩔까. 돌아가서 그 놈을 죽여버릴까? 감히 네가 있는 테라스에 들어왔잖아.”
어둠 속에서 그의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냈다.
“그놈이 황태자든 뭐든 상관 안 해. 황가와 전쟁을 해야 한다면 기꺼이 하지. 어차피 그놈들이 이기는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루시안의 시선이 베개 위에 흐트러진 아리엘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가 사르륵 떨어뜨렸다.
“아, 그리고 벌레들이 이 붉은 머리카락을 보고 비웃었댔지. 그것들도 다 죽여줄 수 있어. 쉽지.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피로 바다를 만들고도 남을 거야. 피에 젖어 그것들도 다 붉은 머리가 되겠지. 어쩔까?”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양의 살기가 스멀스멀 뻗어 나왔다.
그의 방식대로 처리하자면 오늘 무도회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엘을 본 눈, 아리엘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 것들, 아리엘의 이름을 담은 입술들.
루시안의 살기가 베일 듯 날카로워졌다.
그때였다.
“으음…….”
아리엘의 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흘러나왔다.
아리엘이 짧은 팔로 베개를 끌어안으며 배싯 웃었다.
“루시안…….”
한계를 모르고 뻗어 나가던 루시안의 살기가 멈칫했다.
형체가 보일 듯 공간을 가득 채우던 살기는 연기처럼 다시 소년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내 그에게서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실소가 흘렀다.
“정말…… 못 이기겠군.”
그는 고개를 숙여 아리엘의 꽃물 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잘 자. 내 크림슨 하트.”
밤 인사를 건넨 루시안은 들어올 때처럼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려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 스치듯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아리엘은 칭얼거리며 이불을 끌어다 덮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날이 밝고 나서야 아리엘은 루시안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루시안이 새벽에 돌아갔다고요?”
“네, 아기 마님. 대공자님은 이미 아카데미에 계실 거예요.”
“…….”
아리엘은 아침식사로 나온 맑은 토마토 수프를 먹다 말고 시무룩해졌다.
‘인사도 못했는데…….’
어제 일이 꼭 꿈같이 느껴졌다.
사실은 루시안이 꽃을 보낸 것도, 직접 온 것도 다 꿈이었던 거 아닐까?
그 합리적 의심은 화병에 가득 꽂힌 붉은 튤립을 보자 곧 사그라들었다.
‘그래. 내 상상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날 리가 없지.’
아리엘은 수프에 들어간 부드러운 닭고기 조각을 오물거렸다.
진한 치킨 스톡이 느껴지는 수프와 담백한 고기가 토마토를 만나 산뜻하게 어우러졌다.
‘그나저나 새벽에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묘하게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것이 애매한 기분이지만 분명 별 꿈 아니었을 것이다.
아리엘은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흰 빵을 토마토 수프에 콕 찍어 냠, 입에 집어넣었다.
* * *
오후가 되자 다이아나가 찾아와서 어제 있었던 데뷔탕트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다들 네 얘기로 난리야! 미혼 영애들 중에 아리엘, 널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니까.”
다이아나는 마치 자기 일처럼 뿌듯해했다.
아리엘은 천장에 매달린 둥근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이아나는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아리엘의 드레스와 장신구, 대공가 남자들과의 춤, 황후의 선물까지.
“황후 마마께서 주신 그 향료있지? 내가 듣기로, 그거 지난달에 프라키아 지역에서 두 병 바친 거라더라. 3년에 한 병밖에 안 난대.”
진짜 제국에 두 병만 있는 거였다니!
그냥 상상만 했던 건데……
아리엘은 입을 뻐끔거리며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황녀 마마께서 안 계셔서 마지못해 너한테 주신 거라고 떠들어대는 못된 계집애들도 있는데, 그거 잘 모르는 소리야.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황가에 아무리 나눠줄 사람이 많아도 대공가 안주인이 먼저라더라. 어떨 땐 황후 마마께서도 가지시지 못한 걸 대공가에 내리는 경우도 있대.”
“어째서?”
라카트옐이 대체 뭐기에?
“그야……!”
다이아나가 그제야 고개를 갸웃했다.
“음, 라카트옐이 제국의 수호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기에 다이아나는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얼른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리고. 네 목걸이 디자인있잖아? 그거 완전 유행이 될 것 같아!”
아리엘이 데뷔 무대에서 걸고 나온 다이아몬드 레이스 목걸이는 온 사교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어린 영애부터 나이 든 귀부인까지 모두 다음날 아침부터 의상실에 모여들어 그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바빴다.
내로라 하는 의상실 디자이너들은 눈에 불을 켜고 비슷한 디자인의 목걸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대마법사 브루노어만큼의 마법 실력을 가지지 못한 그들이 만들어 낸 건 값싼 모조품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게 얼마나 잘 팔린다고. 내 주변 영애들은 다 그 목걸이를 갖고 싶다고 부모님을 조르고 있어. 네 것이 훨씬 예쁘지만, 어떻게든 따라 해보고 싶나 봐.”
한동안 볼드하고 무거운 목걸이가 유행했었는데 아리엘을 계기로 유행이 바뀌고 있었다.
무작정 크고 굵은 것이 아니라, 작은 보석이 얇은 줄로 찰랑거리는 가녀린 디자인으로.
다이아나는 이어 어제의 ‘티 파티 초대’ 사건도 언급했다.
“그게 다 실비아 후작 영애 그 뱀 같은 여자 때문이야!”
다이아나가 팔짱을 끼고 씩씩거렸다.
“그 여자가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바람에…… 내 아리엘이!”
“괜찮아, 다이아나.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는걸.”
“그래도! 괘씸해 죽겠어.”
다이아나는 자신이 아리엘 편을 들 기회를 놓친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실비아 그 여자는 지금 미혼 영애들 중 사교계 서열이 가장 높아. 혼기가 꽉 찬 나이거든. 비얀 후작가도 공신 가문이고.”
다이아나는 실비아가 비어있는 대공비 자리를 노리고 혼담을 다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괜히 아리엘 마음을 어지럽힐 필요는 없겠지.’
다이아나는 상냥하게 아리엘에게 말했다.
“아무튼 티 파티 준비하면서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 이 ‘언니’한테 말하렴. 뭐든 도와줄게.”
다이아나의 진심어린 말을 들은 아리엘은 가느다란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응! 다이아나. 고마워.”
‘귀여워!’
순간 다이아나는 이대로 아리엘을 납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전율했다.
* * *
다이아나는 금방 돌아가야 했다.
어머니인 공작 부인과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 있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친구를 배웅한 아리엘은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지는 앞뜰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원에 가득한 꽃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와!”
루시안이 선물한 것과 같은 종의 빨간 튤립 꽃 수천수만 송이가 정원에 가득 심겨 있었다.
아리엘은 곧장 정원사 우즈에게 달려갔다.
“우즈, 우즈. 이 튤립 어떻게 된 거예요?”
말수 적은 우즈가 고개를 느리게 꾸벅여 인사하고는 대답했다.
“대공자…… 님께서.”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시안이?’
꽃 선물로도 모자라 그녀의 방에서 잘 내려다보이는 정원 쪽에까지 튤립을 가득 심어놓다니……?
아리엘은 자세를 낮춰 튤립 꽃잎을 쓰다듬었다.
마음이 콩닥거렸다.
“꽃이 참 예뻐요.”
“아기 마님도…… 예쁘십니다.”
한 문장을 다 말하는 걸 좀처럼 듣기 어려운 우즈의 말에 아리엘은 활짝 미소지었다.
“우즈의 말이 더 예쁜걸요. 고마워요, 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