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75)
그녀는 우즈와 헤어져서 정원 산책을 계속했다.
정원 가득 아름다운 붉은 꽃이 만발해 있었다.
타박타박 걷던 아리엘은 잠시 멈추어 서서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는 붉은색을 정말 싫어했었는데……’
과거의 그녀에게 붉은색은 재앙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타고나 가족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했다.
아버지 루실리온 후작은 아리엘에게서 머리카락이나 피처럼, 붉은 것을 볼 때마다 어린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그렇게 자란 아리엘이 자신의 색깔을 사랑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법사 무리에 들어간 뒤에는 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살았다.
달콤한 루비같은 눈동자도 마법으로 색깔을 감추었다.
불꽃, 딸기, 장미꽃…….
그 어떤 붉음도 아리엘에게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가에 와서 살면서 그녀는 바뀌었다.
따스한 벽난로의 불꽃을 사랑하게 됐고, 영롱하게 빨간 딸기를 좋아하게 됐다.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의 꽃…….
루시안은 그냥 빨간 꽃이 예뻐서 선물한 게 아니었다.
붉은색이 아리엘의 색이기 때문에 일부러 붉은 튤립을 선택해서 선물한 거였다.
사람들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리엘을 후작 부인이 부정하게 낳은 아이일 거라고 흉봤지만, 루시안은 보란 듯이 붉은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가 무도회를 가득 채우도록 만들었다.
아리엘이 가진 붉은색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 자체를 보여주려는 듯이.
그것을 깨닫자 아리엘의 작은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정원 산책을 마친 뒤, 아리엘은 덩굴 등나무 그네에 앉아서 레몬 조각을 동동 띄운 레몬수를 홀짝였다.
수잔이 우유 푸딩으로 만든 케잌을 가져와 후덕한 솜씨로 크게 잘라주었다.
아리엘의 호위인 헥터와 랄프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헥터.”
아리엘이 헥터를 부르자, 몸집이 산채 같은 헥터가 드럼통만한 물통을 꿀꺽꿀꺽 비운 뒤 아리엘에게 달려왔다.
“예. 아기 마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든 말씀하십쇼.”
호쾌하게 말한 헥터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그 자신만만한 몸짓에 아리엘은 배시시 웃었다.
“루시안 어린 시절에 대해 듣고 싶어요. 말해줄 수 있나요?”
헥터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말씀드릴 수 있지요.”
아리엘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 * *
“제가 푸른 사자 기사단에 들어온 건 그러니까…… 14년? 정도 전이었습죠. 들어온지 얼마 안 돼서 대공비님의 장례식이 열렸을 겁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캄캄한 날이었구요.”
아리엘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전 대공비가, 그러니까 루시안의 모친 되는 사람이 아기를 낳다가 명을 달리했다고.
아리엘의 엄마인 블랑쉐 후작 부인도 그녀를 낳다가 죽었기에 그런 일들이 제법 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헥터에게서 그 날의 풍경을 듣자 스산한 슬픔이 느껴졌다.
“저는 용병 출신이라, 그땐 어울리는 사람도 없고 겉돌아서요. 그날도 혼자 있다가 장례식 가는 무리와 떨어졌습죠. 근데 장소를 모르겠는 겁니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라카트옐 가가 지닌 고유의 기사단이었다.
라카트옐 가의 가주를 주군으로 모시는 기사단인만큼 대공비의 장례식에는 꼭 참석해야 했다.
“헤매다가 저택 하인들한테 물어보려고 들어갔었습니다. 근데 이 넓은 저택에 사람은 없고 으스스한 바람 소리만 들리는 게…… 하핫, 꼭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습죠.”
아리엘은 이 넓은 저택이 텅 빈 채 어두컴컴한 것을 상상해 보았다.
생각만으로도 오슬오슬한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헥터의 어조가 조금 은근하게 바뀌었다.
“그렇게 사람을 찾아 다니다가 우연히 안쪽 깊은 곳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말입니다…….”
“네.”
아리엘은 긴장하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거기에 글쎄…… 귀신이!”
“깜짝이야!”
헥터가 갑자기 목소리를 키우는 바람에 놀란 아리엘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으으, 헥터…….”
짖궂게 웃은 그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귀신이 아니라 아기였습죠. 제 주먹보다 조금 큰, 쬐끄만 사내 아기.”
헥터가 제 바위만한 주먹을 들어올렸기 때문에, 쬐끄마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렸지만 아리엘은 이미 이야기에 푹 빠져있었다.
“그게 루시안이었군요!”
“예. 새까만 머리카락에 푸른 눈의 아기였습니다. 연하고 탁한 하늘색 눈이었죠.”
하늘색?
‘지금이랑은 다르네. 어릴 때는 눈색이 달랐던 걸까?’
헥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제가 아기를 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만…… 도통 아기같지 않은 눈이었어요. 소드마스터인 제가 핏덩이한테 공포를 느낄 정도였으니까 말입죠. 한참 눈을 뗄 수가 없었다니까요.”
루시안은 어렸을 때부터 좀 무서웠나봐…….
“근데 자세히 보니 숨소리도 거칠고 곧 숨넘어갈 것처럼 아파보이지 뭡니까. 주변에는 아기를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요.”
“……?”
아리엘은 조그만 미간을 찌푸렸다.
14년 전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아는 라카트옐 가는 아픈 갓난아기를 내버려두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기가 방치될 수 있었을까?
하지만 헥터는 거짓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솔직해서 사람을 당황시킬 정도인걸.
그때, 아리엘의 직감이 무언가를 가리켰다.
‘혹시, 루시안이 혼자 있었던 게 대공가의 비밀과 관련이 있는 건가……?’
비밀과 관련이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헥터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제가 들여다보니까 저와 눈을 딱 마주치는데,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기가 쫙 빨리는 느낌이 났습죠. 그리고 진짜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데…….”
목소리를 낮추며 그가 말했다.
“갑자기 대공자님 눈동자 색이 바뀐 겁니다. 탁한 하늘색에서, 맑고 진한 푸른색으로요!”
헥터가 커다란 덩치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기들 눈 색이 크면서 바뀐다는 얘기는 용병단에 있을 때 들어본 적 있지만, 그렇게 찰나에 바뀌는 건 처음 봤습죠. 암요!”
무슨 마법 같았다니까요!
한참 신나게 떠들던 그의 눈이 약간의 추억에 잠겨들었다.
“뭐, 다행히 대공자님은 금방 건강한 아기가 돼서 저택의 망나…… 아니, 저택의 말썽꾼이 되셨지요. 너다섯 살 무렵쯤엔 푸른 사자 기사단으로 와서 검을 드셨고요.”
방금 망나니라고 하려고 했죠, 헥터.
아리엘은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을 때의 어두운 기분이 사라졌다.
더불어 자신보다 어린 루시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았다.
루시안은 아기 때도 엄청 예뻤겠지?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헥터.”
“아직 대공자님이 사고 치신 이야기는 3박 4일분도 더 남았는데요. 하핫!”
아리엘은 두 손을 꼭 모아쥐고 눈을 반짝였다.
“그것도 언젠가 꼭 듣고 싶어요.”
그럼 루시안이 놀릴 때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아리엘은 레몬수 밑바닥에 깔린 투명한 젤리를 스푼으로 퍼먹으며 몰래 웃었다.
* * *
간단한 티 파티라도 라카트옐 대공가의 이름이 붙은 이상, 간단한 게 아니었다.
란셀 후작 부인은 파티에 초대할 사람들을 고르느라 진땀을 뺐다.
초대인원에 대해 묻기 위해 좀처럼 만나기 힘든 마티어스에게까지 찾아갔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마티어스는 위압적이게 눈을 내리뜨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개나 소나 우리 애를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안 퍼지게 잘해.”
란셀 후작 부인은 눈물을 머금고 일단 모니카 공작가의 다이아나를 초대 목록 1번에 올렸다.
‘다이아나 영애가 있으면 아리엘님도 안심하실 테니까.’
그 다음으로는 아리엘이 초대하겠다고 말했던 영애들을 포함시키기로 했다.
‘개나 소나’에 포함되는 영애들이긴 하지만 아리엘이 직접 초대했으니 꼭 불러야 했다.
다음으로는…….
“하아.”
란셀 후작 부인은 수백 명이 넘는 백작가 이상의 귀족 영애들 리스트를 훑어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규모가 큰 파티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 자리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대공가에서 마지막으로 파티가 열린 지 15년도 넘었으니, 사교계는 지금 굳게 닫힌 라카트옐 저택 속 부와 권력에 눈이 시뻘겋겠지.
‘아리엘님이 피곤해하시지 않도록 최대한 내 선에서 걸러야겠어.’
란셀 후작 부인은 남편의 인맥을 동원해서 영애들 뒷조사를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편, 초대 목록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아리엘도 제법 할 일이 많았다.
‘티 파티로 안주인 맞이를 대신하기로 했으니까.’
그녀는 예전에 수잔이 해줬던 말대로 안주인의 손길이 느껴지도록 집안과 정원을 꾸미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