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8)
베일에 싸인 라카트옐 대공가에서 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에 관해서는 일당백인 사람들만 대공가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 중 대공가의 재무관이자, 법무관이자, 행정처리인인 달튼은 늦은 밤 들이닥친 대공자 루시안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노, 놀랐잖습니까, 대공자님. ……그것보다 기세부터 줄여주시면.”
귀찮다는 듯이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리자 방 안을 넘실거리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대공자는 다짜고짜 달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말씀이십니까?”
“결혼 서약서.”
“예에?!”
달튼은 기절할 듯 놀라며 되물었다.
보통의 가치관으로는 라카트옐 남자들의 행동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매번 당할 때마다 기함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갑자기 결혼 서약서라니요? 공자님 결혼하십니까?”
“내일.”
미쳤네.
암만 라카트옐 가라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대공자의 결혼이 내일인데, 그걸 아는 사람은 대공자 본인 하나뿐이라니!
“결혼 상대는요? 적어도 상대 여성분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루시안 대공자는 신부가 될 사람에게도 말해주지 않고 결혼식장에 끌고 와도 이상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아까 집에 들여놓은 그 여자애야.”
달튼은 4층 작은 손님방에 모셔놓은 붉은 머리카락의 어린 소녀를 기억해냈다.
“루실리온 후작 영애요?”
“그래.”
“그래서 그분이랑은 합의가…….”
“말이 길다.”
대공자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젓자 튼튼한 원목책상이 얇은 비스킷처럼 콰직 내려앉았다.
“빨리 서약서나 내놔.”
열네 살의 수려한 미소년에게서 나오는 무지막지한 파괴력에 본능적인 공포가 오싹 올라왔다.
무조건 복종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공포심이었다.
하지만 달튼은 꿋꿋하게 맞섰다.
괜히 라카트옐 가에서 오래 일한 게 아니었다.
“아니, 결혼을 이렇게 갑자기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대공님께선 아시는 겁니까?”
대공자는 미성년이었기에, 부친인 대공에게 결혼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 의무였다.
“마티어스에겐 내가 이야기한다. 넌 서류나 준비해.”
“하지만 처음 보는 아가씨와 결혼이라니…….”
대공자가 부서진 책상 위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마치 기분이 좋아져 흐트러진 맹수처럼.
“첫눈에 반했다고 해두지.”
첫눈에 반해요?!
달튼의 턱이 땅을 향해 툭 떨어졌다.
저게 루시안 대공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안 움직여?”
곧장 떨어지는 위협에 달튼은 재빨리 몸을 놀려 결혼 서류를 꾸미기 시작했다.
대공자는 좋게 말해도 전혀 인내심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근데, 잠깐만.
“아까 그 아가씨가 열 살이라고요?”
달튼은 쓰러진 소녀를 진찰할 의사를 들여보내면서 본의 아니게 어린 후작 영애를 본 참이었다.
“완전히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아무리 라카트옐 가 공자님이라도 열 살 미만의 소녀와 결혼하는 건 불법입니다!”
“네가 직접 알아보든가.”
달튼의 손에서 결혼 서류 뭉치를 낚아챈 대공자가 손끝을 까딱여 문을 휙 열었다.
“열 살 맞으면 그 책상 나머지도 부숴주지.”
상큼하게 협박한 대공자가 나간 뒤, 달튼은 허둥지둥 라카트옐 가가 수집한 정보 목록을 뒤져 소녀의 신상을 찾아냈다.
“801년생……?”
정말로 열 살이 맞잖아!
“…….”
달튼은 반만 남아있는 훌륭하고 튼튼한 원목책상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든 책상에게 안녕을 고해야 할 때였다.
* * *
대공자가 떠난 뒤 아리엘은 침대로 돌아와 풀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했다.’
해냈어. 내가 바꿨어.
심장이 콩닥콩닥 커다란 소리를 내며 뛰었다.
이걸로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의 그녀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변화였다.
당장 아리엘은 자신이 후작가를 탈출했다는 것부터 실감하기 어려웠다.
‘지금쯤 후작가는 나를 찾느라 발칵 뒤집혔겠지.’
그녀 때문에 기절했던 뚱뚱한 집사와 문지기들까지 합세해서 아리엘이 갔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라비 제롬의 사냥개들도 곤히 자다 불려 나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찾을 수 없을 거야.’
나라에 일곱 가문밖에 없는 후작가는 분명 높은 지위였지만, 감히 대공가를 수색할 수 있을만큼 대단한 곳은 아니니까.
아리엘은 난생처음 와보는 대공저가 다른 어느 곳보다 안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결혼하면…… 이곳에서 살게 되는 걸까?’
생각 끝에 아리엘은 양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세상에, 내가 결혼을 하게 되다니.
자신이 대공자를 만나 청혼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와닿지 않았다.
현실감없이 그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주특기인 공격 마법을 눈앞에서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는 결혼을 수락했다.
마치 그는 자신의 강함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기색이었다.
‘게다가 내 얼굴을 보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어.’
그것만으로도 아리엘은 제멋대로였던 대공자에게 조금 호감을 품었다.
그는 분명 위세 높은 대공가의 아들답게 오만했지만 그건 뭔가 아리엘만을 향한 오만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누구 앞에서도 그럴 것 같은 느낌?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방이 어둡고 달빛은 애꿎은 그의 뒤통수만 비춰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뒤늦게야 조금 아쉬웠다.
참 그러고 보니 나, 신랑 얼굴도 안 보고 약혼을 해버렸잖아?
나는 이상하게 생긴 얼굴과 붉은 머리카락을 모두 보여줬는데.
아리엘은 왠지 손해 본 기분에 뺨을 부풀렸다.
“하암.”
잠시 앉아 있었을 뿐인데 어린 소녀에게는 금방 잠이 찾아왔다.
조그마한 입을 벌리며 하품한 아리엘은 다시 폭신폭신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녀가 전날까지 덮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이불의 감촉에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피곤해…….’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었던 데다 마법을 썼던 후유증까지 겹쳐져 아리엘의 정신은 금세 가물가물해졌다.
오늘 약혼한 소년이 그들의 결혼식을 내일로 잡았다는 것도, 내일 아침이 되면 상냥한 하녀장이 들이닥쳐 그녀를 정신없이 준비시킬 거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어린 소녀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밤이 늦어지자 밤공기가 더욱 싸늘해졌다.
밖은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대공가의 저택 안은 고요했다.
대공의 집무실로 향하는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의 미간이 서늘하게 구겨졌다.
단순한 결혼이었다면 그냥 총관인 달튼에게 보고하라고 집어던지고 나와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퍽 복잡한 종류였다.
루시안은 대공을 향해 솟아오르는 진득한 불쾌감을 떨치기 위해 새까만 앞머리를 세게 쓸어 올렸다.
대공의 집무실은 열려있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긴 흑발의 남자가 서류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짧게 들었다.
루시안과 대공의 시선이 차갑게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
“마티어스.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걜 들였는지 모르겠더군.”
잠시 침묵하던 대공이 여상히 대답했다.
“들이지 않을 도리가 있나. 다친 어린 숙녀가 집 앞에 쓰러져 있는데.”
“그 얘기가 아닌 걸 알 텐데.”
“…….”
말 한마디에 대공과 대공자 사이의 기류가 팽팽해졌다.
이윽고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크림슨 하트가 제 발로 이 집에 찾아왔으니 들여야만 했지.”
“직접 이 집에 찾아온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
“물론 의심이야 들었다. 저런 어린애가 피를 토할 정도로 제 몸을 상해가면서 찾아오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니까.”
“그런 것치곤 고이 손님방에 모셔놨잖아.”
“깨어나면 여기 온 이유라도 묻고 싶었거든.”
고저없는 어조로 대꾸한 대공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네가 먼저 다녀갔다지. 그 앨 만나고 온 네게 물어보마. 어때, 의심할 만하더냐?”
“…….”
루시안은 대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제 오른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의 턱을 붙잡았던 감촉이 아직 손에 남아있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했던 달콤한 빛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동시에 소녀가 간절히 말하던 소망도.
‘저와 결혼해주세요.’
루시안은 이를 사려 물었다.
“……뭘 알고 온 것 같지는 않더군. 알았다면 이 괴물 소굴에 절대 제 발로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자조하듯 씹어뱉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알고 왔다 해도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