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85)
대화가 끝났다는 것을 명백히 알리는 아리엘의 말에 디트리히가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물론 저도 참석합니다. 제 데뷔날이기도 하거든요.”
이쪽도 열네 살이었구나.
말투가 어른스러워서 조금 더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아리엘은 양산을 펼치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그럼 나중에 뵈어요. 레온 영식.”
굽슬거리는 환한 금발의 미소년이 정중하게 그녀를 배웅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디트리히와 헤어진 아리엘은 곧장 세실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걸음걸음마다 복잡한 마음이 엉겨들었다.
하지만 왠지 디트리히가 그녀를 해치기 위해 한 말들은 아닌 것 같았다.
‘꼭 나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었어…….’
그가 나쁜 사람같지 않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는 뭘까?
루시안과는 어떤 관계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아리엘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가을이 돼서 루시안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루시안에게는 모든 복잡한 걸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능력이 있으니까.
물론 그 과정에 피가 낭자할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나중에 생각하자.’
아리엘은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털어버리고 세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들어섰다.
* * *
9월이 되자 사교계는 가을 무도회 시즌을 맞아 흥분에 가득 찼다.
아리엘은 그 흥분의 열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도 아침 일찍부터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났다.
어젯밤 아리엘이 부탁한 대로 깨우러 들어온 수잔이 후후 웃었다.
“어머, 아기 마님. 제가 깨워드리기 전에 일어나셨네요.”
“수잔. 몇 시예요?”
아리엘이 눈을 비비며 묻자 수잔이 윙크를 하며 대답했다.
“아직 여유가 있답니다. 얼른 세수하신다면요.”
아리엘은 후다닥 이불을 걷고 달려 나왔다.
오늘은 루시안이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아리엘은 고양이 세수를 하고, 사랑스러운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빗어 예쁘게 리본을 달았다.
그리고 수잔이 입에 넣어주는 담백한 올리브 빵을 먹으며 옷까지 챙겨입자 아래층이 시끌시끌해졌다.
“수잔! 나 먼저 내려가요!”
“아기 마님, 뛰지 마세요! 넘어지세요.”
뒤에서 수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엘은 서둘러 층계를 내려갔다.
중앙 홀까지 달려나가자, 저 멀리 현관에 사용인들과 줄지어 서 있는 노집사 알렌이 보였다.
아리엘을 본 알렌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마님.”
다른 사용인들 또한 절도있게 아리엘을 향해 인사했다.
제자리에서 인사를 받은 아리엘은 알렌의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
“알렌. 루시안은요?”
알렌이 주름진 얼굴로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늘상 이 노집사의 엄격한 모습만 봐온 다른 사용인들이 그의 미소에 놀란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리엘의 뒷편을 힐끗 본 알렌이 고개를 낮춰 말했다.
“이제 들어오시는군요.”
“……!”
때마침 그녀에게도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은 뒤를 돌아, 현관 뜰에 멈춰 서는 마차와 그 마차에서 내리는 칠흑 같은 흑발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린 루시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바람이 지나가며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지상에 강림한 인외의 존재 같은 기운도 함께 퍼져나갔다.
폭력적인 기세를 느른하게 감춘 소년은 지독하게 위압적이고 또 끔찍이 아름다웠다.
그가 눈을 돌려 아리엘이 서 있는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그가 말하는 입모양이 보였다.
“아리엘라.”
차갑던 루시안의 표정이 바뀌었다.
노골적으로 열기를 띤 눈빛.
아리엘은 그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루시안.”
그가 순식간에 성큼성큼 걸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아리엘은 반가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루시…….”
그런데 제대로 입을 열기도 전에, 가까이 다가온 루시안이 아리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꺅.”
놀란 아리엘은 짧은 비명을 내며 그의 어깨 옷자락을 붙잡았다.
루시안이 쿡쿡거리며 웃는 진동이 느껴졌다.
“꼬맹이는 여전히 꼬맹이군.”
명백하게 놀리는 건데도 지금은 상관없었다.
아리엘은 그에게 안긴 채 얼른 루시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와.
분명히 뭐라고 할 말이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자 다 까먹어 버렸다. 가히 파괴적인 미모였다.
아리엘이 말없이 그를 보며 헤헤 웃자 루시안이 별안간 얼굴을 찌푸렸다.
요요하게 미간을 좁힌 그가 명령했다.
“보고 싶었다고 말해.”
“네?”
“얼른.”
아리엘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명령에 따랐다.
“보, 보고 싶었어. 요?”
그녀의 말을 들은 루시안이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가 아리엘의 뺨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그래. 이제 좀 균형이 맞는군.”
두 작은 주인을 보고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루시안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젓자, 사용인들이 우수수 뒤로 물러났다.
겉옷을 받아든 알렌이 그에게서 넥타이까지 받아들려는 듯 다가왔다.
루시안은 자연스럽게 목을 옆으로 틀어 타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알렌에게 내밀려다가…….
“아.”
그가 자신에게 안겨있는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루시안의 눈이 찰나 악랄하게 빛났다.
“이제는 맬 줄 아나?”
그가 풀어낸 넥타이를 아리엘 눈앞에 드리웠다.
깃털 장난감으로 새끼 고양이를 놀아주는 듯한 행동이었다.
“윽…….”
루시안의 넥타이를 못 매서 쩔쩔맸던 기억이 떠오른 아리엘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아리엘의 반응을 본 그가 픽 웃고는 손을 거두어 알렌에게 넥타이를 맡겼다.
그리고 분홍빛으로 물든 아리엘의 뺨을 쿡 찌르며 말했다.
“매는 건 상관없어. 풀 줄만 알면 되지.”
“루시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아리엘의 이마에 다시 키스한 그가 그녀를 내려주었다.
숨쉴 틈도 없이, 협박하듯 속삭인다.
“내 걸음을 못 따라오면 다시 들고 갈 거야.”
그 순간 아리엘은 진심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제가 다 크면, 제발 루시안보다 다리가 길어지게 해주세요.’
* * *
루시안이 정식으로 돌아온 이유는 가을 데뷔 무도회 때문이었다.
루시안 뿐 아니라 요하네스 아카데미에 다니는 모든 귀족, 황족 남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탔다.
가을 무도회는 그들이 합법적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시즌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시기에 결혼할 상대를 찾고, 약혼을 하는 일이 많았다.
어찌 보면 봄보다 더욱 커플이 많이 탄생하는 때였다.
심지어 황궁 무도회는 귀족 모두에게 초대장이 가기 때문에 낮은 가문의 귀족들도 참여할 수 있다.
그럴듯한 작위나 재산이 없는 하위 귀족 가문의 영애나 영식은 최선을 다해 꾸미고 신분 상승을 꿈꾸었다.
반면 가문끼리의 정략결혼이 약속된 영애, 영식들은 자기들끼리 파트너를 이루어 서로를 탐색했다.
가을 무도회는 마치 사교계의 혼인 전쟁터와 같았다.
루시안의 데뷔 준비는 가문 차원에서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데뷔 무도회까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거의 미리 준비해 두었고, 루시안은 결정만 하면 되었다.
“대공자님, 이것 좀 결정을!”
“작은 주인님 이것도 결정을……!”
“부디 이번엔 태우거나 부수지 마시고…….”
책임을 맡은 재무관 달튼과 총괄 집사 알렌이 루시안에게 몰려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를 귀찮게 하는 사이, 아리엘도 나름 바빠졌다.
데뷔는 루시안이 하지만 아리엘도 아내로서 함께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담 헬렌의 의상실에서는 아리엘의 데뷔 때만큼 공들인 드레스를 몇 벌이나 보내왔다.
모두 예쁜 드레스라 고르기가 힘들었지만, 루시안의 예복 겉 체인에 고정된 보석이 청보석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아리엘은 하늘빛의 물색 드레스로 결정했다.
드레스 자락이 풍성하게 퍼지면서도 부드럽게 물결치고 팔과 상체부분에 얇은 시폰으로 청순한 러플이 달린 드레스였다.
마담 헬렌이 직접 다이아몬드로 수놓은 은은한 나비 모양 보석 자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원래부터 이걸로 고르셨으면 했어요, 전.”
“맞아요. 다 예쁘지만 이게 제일 아기 마님께 잘 어울렸어요!”
옆에서 옷 시중을 들어주던 하녀들이 수선을 떨며 좋아했다.
아리엘은 고른 드레스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초콜릿색 리본이 달린 우윳빛의 고급스러운 포장 상자에 다시 넣어서 드레스룸으로 가져갔다.
가을 시즌 중에 무도회에 갈 일이 더 생긴다면 그 때 입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뭐,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아리엘은 꽤 피곤한 사교계 행사를 생각하고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고개를 젓지?”
“힉!”
아리엘은 갑자기 나타난 루시안 때문에 깜짝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했다.
또 창문으로 넘어 들어온 건지, 그는 창가에 서 있었다.
“히끅. 루시안, 놀랐…… 히끅, 잖아요.”
그가 살벌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남편을 보고 놀라다니. 혼나야겠는데.”
그렇게 나타나면 아무리 남편이라도 놀라거든요.
아리엘은 대들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근데, 달튼은 어쩌고요?”
“성가셔서 치워 버렸어.”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어, 어디로요?”
“멀리.”
짧게 대답한 그가 아리엘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리 와.”
아리엘은 고분고분 그에게 다가갔다.
루시안에게서 싸한 잉크 냄새가 풍겼다.
결재 서류에 어지간히도 묻혀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리엘이 가까이 가자 루시안이 창틀에 기대며 물었다.
“드레스. 골랐나?”
“아. 골랐어요. 보실래요?”
“됐어.”
곧장 가서 드레스 장을 열려는 걸 루시안이 막았다.
손목을 붙잡힌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루시안이 삐딱하게 웃고는 품 속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자.”
“이게 뭐예요?”
“열어 봐.”
아리엘은 그의 말에 따라 상자를 열었다.
또각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났다.
“……루시안?”
아리엘이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오만하게 속눈썹을 기울이며 말했다.
“네 거다.”
그가 건넨 상자 안에 든 것은 목걸이였다.
가느다란 나비 모양 참 아래에 물방울 모양 다이아몬드가 달린 목걸이.
심장이 멎을 만큼 예뻤다.
방금 그녀가 고른 물색 드레스에 꼭 맞을 것 같았다.
어, 근데 내가 이 드레스를 고른 줄은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것보다…….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루시안. 이거…… 왜 주는 거예요?”
목걸이가 홀릴만큼 예쁜 것과는 상관없이, 그가 그녀에게 따로 목걸이를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당연히 대공자비 위신 때문이겠지만.’
아리엘은 이미 안주인으로서 보물고 열쇠-금으로 용무늬가 아로새겨진-도 받았고, 마티어스가 헬렌에게 주문한 장신구들도 갖고 있었다.
필요한 건 모두 있다는 말이다.
이번만 해도 헬렌이 그녀를 위해 디자인한 머리장식 세트가 이미 와 있는 상황이었다.
대공자비의 이름에 모자람이 없는, 아주 예쁘고 비싼 것들이.
그러니 아리엘로서는 루시안이 이러는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질문을 들은 루시안이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그의 주변 기류가 확 바뀌었다.
“뭐라고?”
아리엘은 조금 무서워졌지만, 용기를 짜내 다시 물었다.
“줄 이유가 없잖…… 아요. 이유가 뭐예요?”
지난번 무도회에서 향기 마법이 걸린 붉은 튤립을 가득 받았을 때, 아리엘은 처음으로 이 생각을 했었다.
‘왜?’
라카트옐 남자들이 하는 것은 뭐든 정도가 없는 편이다.
하지만 그 날 루시안이 보낸 튤립은 대공가 위신을 세우는 것 이상이었다.
보란 듯이 아리엘의 머리색과 같은 붉은 꽃에, 값비싼 마법을 걸어서, 엄청난 양을 보내왔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가장 아름다운 루시안 본인이 직접 왔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걸까?’
아리엘은 그녀가 대공자비로서 누리는 것들을 대부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사용인들이 주는 것들이나 마티어스의 선물들을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루시안과 아리엘 사이의 거래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뭘 주든 그건 ‘대공자비’에게 주는 것이니 괜찮았다.
납득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물건은 루시안의 위신과 관련이 있으니 오히려 신경을 썼다.
그래도 하나하나가 모두 고맙고 기뻤고, 매일 충만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루시안이 직접 주는 건 달랐다.
그는 그들 둘 사이의 계약 결혼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우리는 계약 상대일 뿐인데.’
아리엘은 대공자비로서 받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루시안에게 받은 것은 이미 넘치도록 많다.
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나도록 결혼해주는 것.
성인이 될 때까지 이 집에서 보호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리엘에게는 엄청난 선물이었다.
더구나 이제 아리엘에게는 필요한 물건이 모두 있었다.
계약에 나와 있는 대로 루시안은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아내로서도, 그의 마법사로서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인데 말이다.
그러니 루시안에게 따로 개인적인 선물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대공자비로서 살면서 받은 물건들은 나중에 이혼할 때 다 놓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루시안에게 따로 선물을 받는다면 이곳을 떠날 때 놓고 가야할지, 가지고 가야할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유가 없다면…… 받고 싶지 않아요.”
오싹해질 만큼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위협하듯, 무척 강압적인 목소리였다.
“받아. 명령이야.”
……명령이구나.
선물이 아니라 명령이라면 받아야겠지.
아리엘은 군말 없이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루시안이 나지막하게 실소했다.
“하.”
그가 손을 뻗어 아리엘의 하얗고 말랑한 뺨을 세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