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88)
결혼하고 겨우 하루, 아리엘이 죽을 만큼 아팠을 때 고작 2주 같이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한 달은 엄청나게 길고 특별한 일이 분명했다.
‘물론 우리는 계약 관계니까, 신혼이라는 말이 꼭 맞는 건 아니겠지만…….’
그때, 루시안이 그녀에게 슥 다가왔다.
다가온 그가 그녀를 가두듯 아리엘이 기대 있는 난간의 양옆을 천천히 짚었다.
“왜. 내가 오래 있는 게 싫은가?”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편이 집에 머무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안 싫어요.”
“그럼?”
아리엘은 머뭇거렸다.
마음속에 드는 기분은 확실한데 그걸 말하려니까 어쩐지 부끄러워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자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
루시안이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잡아먹힐 것 같은 오싹함과 두근거림이 동시에 아리엘에게 찾아왔다.
한동안 그녀를 보던 그가 억누른 신음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끝이 아리엘의 목걸이에 달린 가냘픈 나비 모양 참을 스쳤다.
“넌 이것을 닮았어.”
이글거리는 무언가를 감춘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거칠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아리엘은 루시안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대공저 앞에서 정신을 잃은 그녀가 깨어났을 때, 그녀가 만든 나비 모양의 마나는 루시안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루시안이 진득한 소유욕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내가 널 붙잡았어. 내 손아귀 안에 넣었고. 넌…… 겁도 없이 천적의 손에 제 발로 떨어졌지.”
아리엘은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관심을 빼앗아간 건 그의 말이 아니라 표정이었다.
루시안은 어딘지 뒤틀린 것 같았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에 대었다.
“루시안. 왜 슬퍼 보여요?”
그가 방어적으로 그녀의 손을 떨쳐냈다.
아리엘은 난간에 등을 대며 조금 물러났다.
“슬프다고? 이 내가?”
사납게 되물은 그는 매혹적인 제 흑발을 한 손으로 헝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웃기는 소리. 그건 내가 아니야.”
왜 이 순간 그 말이 떠오르는 걸까.
레온 영식으로만 알았던 황태자가 했던 말.
‘그는 그런 종류가 아니니까요.’
아리엘은 디트리히가 루시안에 대해 했던 말과 지금 루시안이 하고 있는 말이 같은 의미라고 느꼈다.
노려보는 루시안이 무서웠지만, 아리엘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걸요.”
루시안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탐색하듯 매섭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아.”
아까보다 진정되어 보이는 루시안이 옅은 한숨을 뱉었다.
그가 몸에 힘을 빼고 고개를 기울여 아리엘의 이마에 머리를 툭 기댔다.
“……아리엘라, 넌 겁을 좀 배울 필요가 있어.”
아리엘은 눈을 깜박거렸다.
“나 겁 많은데요? 아까 창문에서 떨어질 때도 막 소리 질렀고…….”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이 못 이기겠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떨림이 이마를 통해 전해져 왔다.
이마를 뗀 그가 아리엘의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진짜 겁이 많다면 날 보고 도망쳤어야지. 결혼하자고 조를 게 아니라.”
아, 원래의 루시안이다.
다시 제멋대로에 자신을 놀리는 그로 돌아온 걸 보고 아리엘은 퍽 안도했다.
여전히 아까 루시안이 보인 괴로운 표정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아리엘은 테라스 난간에 올려놨던 샴페인 잔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둘 중 하나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루시안. 우리 건배해요.”
“뭘 위해서?”
“축하해야죠. 오늘은 루시안의 데뷔탕트 날이니까요.”
그의 눈썹이 오만하게 찌푸려졌다.
“그딴 걸 왜 축하해.”
아리엘은 불만스레 뺨을 가득 부풀리고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축하할만한 날이잖아요. 자. 빨리 짠, 해요.”
루시안이 기가 막힌다는 듯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픽 웃었다.
그가 아리엘의 잔에 자기 잔을 챙 부딪쳤다.
“건배.”
“건배!”
아리엘은 활짝 웃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기분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루시안이 곧장 샴페인을 황궁 덤불에 쏟아버리는 것을 본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키득거렸다.
미성년의 라카트옐 남자는 보통 인간보다 더 술에 면역이 없다는 마티어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루시안이 성년 되기 전에 술 취한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면 이상한 걸까?’
술 마신 남자라면 무조건 무섭고 싫은데, 루시안은 다르게 느껴졌다.
‘루시안은 내가 자길 무서워하길 바라는 것 같지만…… 난 이미 루시안의 모습을 아는걸.’
과거에 아리엘은 그를 만났었다.
그녀가 열일곱, 그가 스물 한살일 때였다.
적으로 만났는데도 루시안은 그녀를 해치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리엘은 지금의 그가 무섭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그녀를 해칠 리 없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아리엘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루시안. 우리 이제 안으로 돌아가요. 다이아나랑 세실도 보고 싶고요.”
“내 앞에서 다른 것들 보고 싶다는 말 하지 마.”
루시안이 위협하듯 으르렁거리며 대꾸했다.
쳇, 말도 못하게 해.
아리엘은 황궁 시종에게 돌려줄 샴페인 잔을 챙긴 뒤 루시안의 뒤를 따라 무도회 홀로 돌아갔다.
들어가면서 그녀는 루시안이 다시 특유의 난폭한 기세를 두르려는 걸 막았다.
“잠깐만 참아봐요. 사람들이 겁먹잖아요.”
그가 삐딱하게 말했다.
“무서워하라고 하는 건데.”
“어휴, 정말…….”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사람들 틈을 지날 때였다.
“대공자님, 대공자비님.”
누군가 용감하게도 루시안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나이가 꽤 많은 초로의 남자 귀족이었다.
인상이 정직해 보였다.
“저는 북부의 녹스 남작입니다.”
루시안은 무관심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적대감을 내보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로서는 대단한 자비를 베푼 셈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달랐다.
“……!”
그녀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숨을 헉 들이쉬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창백해진 손끝이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망치로 내리친 것 같은 충격이 그녀의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말도 안 돼.’
아리엘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과거에 녹스 남작을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악당인 ‘그’의 수하로 지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녹스 남작만큼은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녹스 남작은, 과거의 그녀가 처음으로 죽인 사람이었다.
<2권 끝.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