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9)
“상관없다?”
루시안의 눈빛이 어둡게 끓어올랐다.
“그것이 내 것이 되겠다 하더군. 그쪽에서 먼저 손을 뻗은 이상, 나는 내 것을 빼앗길 생각이 없어. 물론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말을 마친 그가 대공의 책상 위에 결혼 동의서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대공은 무덤덤하게 동의서를 기울여 훑어보곤 서명했다.
“허락하마. 지척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대공의 서명을 그린 잉크가 기묘한 빛을 발하며 푸르스름하게 스며들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루시안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그래, 나와 당신은 이런 괴물이지.
그는 대공의 서명이 그려진 결혼 동의서를 구기듯 손에 쥐었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
문을 나서는 대공자의 기세는 세상의 공기를 모두 얼어 붙일 것처럼 냉랭했다.
대공 마티어스의 귀에 루시안의 마지막 말이 섬뜩하게 들려왔다.
“성인이 되면 당신부터 죽여버리겠어.”
문이 쾅 닫힌 후 집무실에 홀로 남은 대공은 꽤나 무기력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놈 같으니.”
* * *
흰 커튼 위로 한 겹 더 처져 있던 암막 커튼이 걷히며 거대한 방 안에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쳐들었다.
“일어나세요, 꼬마 아가씨.”
“우웅…….”
아리엘은 눈이 부셔서 팔로 얼굴을 가리고 베개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베개는 조그만 아리엘의 머리통을 폭 숨겨줄 정도로 커다랗고 푹신했다.
“아가씨.”
아리엘의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한 것은 낯선 부름이었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어른 여자의 목소리.
평생 그런 목소리로 잠을 깨본 적 없는 아리엘은 불에 데인 듯 눈을 떴다.
몸을 발딱 일으키자 눈앞에 있는 중년 여인이 포근한 미소를 건넸다.
“잠투정도 하지 않고, 기특하시네요.”
상황 파악을 하느라 눈을 깜박거리자 여인이 다정하게 아리엘의 등 뒤에 쿠션을 받쳐 바르게 앉혀 주었다.
“귀한 집 아가씨라 들었답니다. 아침엔 보통 어떻게 식사를 하셨지요? 간단하게 맑은 스프로 드셨나요? 아니면 반숙 계란과 흰 밀빵, 짙은 콩스프로 든든하게 드실 건가요?”
마침내 자신이 어제 후작가를 나와 대공저에 와있다는 것을 인식한 아리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저, 누구세요?”
중년 여인은 눈앞의 소녀가 귀여워죽겠다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 집에는 온통 남자들뿐이라 여자아이는 귀하고도 귀했다.
“저는 이 댁의 안살림을 총괄하는 하녀장, 마담 수잔이랍니다.”
하녀장……?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하녀장이 한 집안에서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진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녀장은 안주인의 오른팔 같은 존재였다.
아리엘네 집처럼 안주인이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 위세가 높았다.
오죽하면 하녀장에게 잘못 보이면 국물도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신분이 높은 가문의 하녀장은 웬만한 준귀족 취급을 받기도 했다.
아리엘이 본 하녀들은 모두 하녀장의 말을 두려워했다.
“아, 안녕하세요. 마담 수잔.”
아리엘이 보통의 후작 영애였다면 하녀장에게 곧장 하대를 하며 편하게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엘은 집에서 하녀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았었기에, 그녀에게 하녀장은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여겨졌다.
눈앞의 어린 소녀가 자신을 존중하고 있다는 걸 느낀 수잔은 아리엘에게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아리엘의 배경을 모르는 수잔으로서는 귀한 집 아가씨가 겸손함까지 갖췄다고 생각된 것이다.
수잔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선 저를 편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저는 아직 모르는 게 많은걸요. 앞으로 마담 수잔에게 배우기만 할 텐데, 낮춰 부를 수는 없지요.”
아리엘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머지않아 결혼을 하면 아리엘은 정말로 배울 것이 많을 게 분명했으니까.
아리엘의 대답에 수잔의 가슴 속에는 잔잔한 감격의 파문이 일었다.
앳된 목소리로 배움을 말하는 어린 소녀는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좋아요, 아가씨. 다만 저를 제외한 다른 하녀들에게는 모두 하대를 하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마담 수잔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수잔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나요?”
“되고말고요. 아가씨께 친근하고 싶어 부탁을 드리는 거랍니다.”
수잔의 다정한 말에 아리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럼…… 수잔…… 이라고 부를게요.”
수잔은 빙긋 웃고는 아리엘에게 아침 식사를 권했다.
“무리가 되지 않으신다면 조금 든든하게 식사를 하시는 게 좋겠어요. 오늘은 어린 아가씨께 무척 고된 날이 될 테니까요.”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여 상을 받았다.
침대에 앉은 채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베드 테이블이 놓여지고, 수잔이 그 위에 음식들을 세팅했다.
아리엘은 부드러운 우유향이 감도는 완두콩 스프를 한 입 먹고 깜짝 놀랐다.
“맛있어요!”
수잔은 아리엘의 아이다운 반응에 흐뭇하게 웃었다.
“대공가의 주방장은 솜씨가 아주 뛰어나답니다. 그래도 아가씨 입맛에 맞으신다니 무척 다행이네요.”
아리엘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스프는 멀건 국물에 초라한 건더기가 든 게 전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완두콩 스프는 진하고, 크림이 듬뿍 들어가 달콤했다.
그녀의 뺨은 황홀함으로 살짝 달아올랐다.
고소한 반숙으로 익힌 촉촉한 수란과 노릇하게 구워진 흰 밀빵의 맛도 기가 막혔다.
딱히 요리 솜씨를 발휘할 필요가 없는 간단한 음식 같지만 원래 이런 간단한 요리가 맛있으려면 노력이 두세 배 들어가는 법이었다.
아리엘이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치자 수잔이 나긋나긋하게 말을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대공자님과 함께 친정에 가시게 될 거예요. 아가씨 아버님께 결혼 허락을 맡으러 가는 거지요.”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성년의 어린 영애와 영식이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동의가 가장 우선적이었다.
대공자와 아리엘이 결혼을 약속했더라도, 대공과 후작이 허락하지 않으면 결혼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대공자와 계약 결혼의 조건을 상의하기 이전에 먼저 양쪽 부모에게 허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과연 대공님이 외동아들의 결혼을 순순히 허락하셨을까?’
아리엘의 표정이 걱정스러워진 것을 본 수잔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님께선 이미 루시안님과 아가씨의 혼인에 동의하셨답니다. 이제 대공자님이 남의 집 귀한 딸을 빼앗아 오느라 고생하실 차례지요.”
귀한 딸…….
아리엘은 조금 곤란해지려고 하는 표정을 감추었다.
‘수잔은 아까부터 나를 귀한 대접 받고 자란 후작 영애처럼 대하고 있네. 사실은 전혀 아닌데…….’
식사한 그릇을 깨끗하게 치운 수잔이 활기차게 박수를 짝 쳤다.
“배불리 먹었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수잔은 아리엘을 욕실로 데려가면서, 오늘 몸단장을 도울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으신 아가씨들은 본가 사용인들 외에 손타는 것을 삼가야 하니까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아리엘이 들어갈 석조 욕조에 무럭무럭 김이 나는 목욕물을 받고, 그 위에 향긋한 거품을 잔뜩 만들어냈다.
“자아, 아가씨. 욕조로 들어오세요.”
아리엘은 주춤하며 앞섶을 꼭 쥐었다.
“혼자 씻으면 안 되나요?”
어린 소녀의 부끄러움이라 여겼는지 수잔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짜 어른이 된 아가씨들은 목욕 시중받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답니다. 이건 익숙해지셔야 해요.”
“하지만…….”
“어서요! 자, 만세!”
정신없이 답싹 끌려간 아리엘의 머리 위로 옷이 벗겨졌다.
수잔은 아리엘을 달랑 들어 올려서 욕조 안에 퐁당 집어넣었다.
“옳지요,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아리엘은 자그마한 손과 팔로 몸을 가려보려고 했으나 이미 발가벗겨진 몸을 다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잔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쩜 이렇게 마르셨을…….”
앙상하고 조그마한 아리엘의 체구를 보며 중얼거리던 수잔의 말이 뚝 멎었다.
겨우 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소녀의 등과 온몸에는 맞아서 생긴 흉터들이 가득했다.
“아가씨. 이게 무슨…….”
아리엘은 눈을 꾹 감았다. 마치 이 시간이 사라져버리기를 바라는 듯이.
수잔은 한 줌 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소녀를 누군가가 때렸다는 것에 무척이나 분노했다.
대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녀는 눈을 이글거리며 아리엘의 흉터를 샅샅이 훑었다.
이렇게 어린 귀족 영애를 상습적으로 폭행할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이었다.
부친.
수잔은 아리엘이 평탄하게 살아온 보통 양갓집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빛을 바꾸고 부드러운 손길로 아리엘을 돌려 세웠다.
아리엘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수잔이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물을까 봐 겁이 났다.
후작가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아리엘이 잘못해서 맞았다고 말했다.
네가 잘못해서 때린 거라고.
맞을 짓을 했으니 맞은 거라고.
아리엘은 처음 만난 수잔이 자신을 그렇게 볼까 봐, 그리고 후작에 대해서 자세히 물을까 봐 겁이 나고 부끄러웠다.
그때 수잔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직 아픈 흉터가 있나요?”
아리엘은 고개를 젓다가, 비교적 최근에 맞았던 팔 쪽을 가리켰다.
“여기 말고는…… 이제 아프지 않아요.”
수잔은 안타까운 시선을 거두고 상냥하게 아리엘을 감싸 안아주었다.
“좋아요. 이제 깨끗이 거품 내 씻겨드릴게요. 아프면 말하세요.”
목욕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수잔은 전혀 아프지 않게, 그러면서도 솜씨 좋게 재빨리 아리엘을 씻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