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94)
“루시안.”
온실의 긴 벤치에 기대서 나른하게 오후 햇살을 쬐고 있던 아리엘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는 루시안과 있는 게 좋지만, 노곤노곤할 때는 예외였다.
루시안은 그녀를 너무 쉽게 긴장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아리엘은 나른함을 떨치기 위해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네. 둘 다 정말 좋은 친구들이에요.”
“…….”
불만스럽게 침묵한 루시안이 티 테이블의 흰 의자 하나를 난폭하게 꿰차고 앉았다.
“그래서 저것들하고만 차를 마시는 건가?”
“네?”
“나랑도 마셔.”
“……?”
아리엘이 영 어리둥절한 표정이자 그가 협박하듯 내뱉었다.
“저것들이랑은 먹었잖아.”
“아, 알겠어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가끔 루시안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어.
아리엘은 수잔에게 다시 홍차와 티 푸드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수잔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빙그레 웃었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두 번째니까 아기 마님 디저트는 가벼운 걸로요.”
그렇게 아리엘은 그날의 두 번째 티 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 * *
하얀 테이블 위에 홍차 잔 두 개와 예쁘게 썰린 과일이 가지런히 놓인 접시가 올려졌다.
하녀들이 능숙한 솜씨로 번개같이 티 테이블을 세팅한 뒤 사라지자 어색한 침묵이 그 자리를 메웠다.
여태 아리엘과 루시안은 이런 간지러운 사교 시간을 나눈 적이 전혀 없었다.
첫만남에 대뜸 청혼을 한 당돌한 신부에, 내일이 결혼식이라는 걸 신부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미친 신랑이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손편지를 읽는 걸 상상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그가 차와 대화를 음미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일단 마시기로 했으니까…….’
아리엘은 묵직한 도자기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조심조심 들어서 찻잔에 붉은 홍차를 따랐다.
쌉싸름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그녀는 루시안의 찻잔에도 차를 따라주었다.
“식기 전에 마셔요, 루시안.”
루시안은 자기 몫의 홍차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스듬히 다리를 꼬았다.
“왜 인간들은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가 묘한 색기를 풍기는 눈물점 자리를 손으로 쓸며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란셀 후작 부인에게 분명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쓰디 쓴 홍차도 억지로 마시면서 사람들과 티 타임을 가지는걸?
사실 아리엘은 아직 홍차 맛을 제대로 느끼기엔 너무 어렸다.
하지만 그녀는 명색이 대공자비.
어리다는 이유로 차가 쓰다며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대로 아내 노릇을 하기로 루시안과 계약했으니까, 쓴 맛도 익숙해져야지.’
아리엘은 루시안 앞에서도 그런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찻잔을 들고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으, 써라.’
하지만 참아야지.
갓 내린 눈처럼 희고 앳된 얼굴이 쓴 맛을 견디는 걸 잠깐 보고있던 루시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리엘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의 찻잔에 각설탕을 풍덩 빠뜨렸다.
설탕 집게는 싹 무시하고 소드 마나를 사용해서.
뜨거운 차 안에 들어간 각설탕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앗-!”
자신의 의젓함이 설탕과 함께 녹아 사라지는 걸 본 아리엘이 외쳤다.
루시안은 옆에 있는 밀크포트에서 우유도 듬뿍 부어넣었다.
붉고 투명하고 쓰던 홍차는 금세 달콤하고 부드러운 밀크티로 변해버렸다.
잔뜩 울상을 짓는 아리엘에게 루시안이 오만하게 명령했다.
“마셔.”
“……네.”
아리엘은 세상 슬픈 얼굴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기도 모르게 사르르 행복한 미소를 지어 버렸다.
“맛있어요.”
루시안이 제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악랄하게 웃었다.
“역시 어린애 입맛.”
“윽…….”
그 말에 아리엘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자 그의 붉은 입술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루시안이 상당히 일방적이게 명령했다.
“앞으로 그냥 홍차는 금지다.”
“네?”
“열네 살이 될 때까지는 우유를 넣어먹어.”
“하지만 그러면…….”
그러면 대공자비로서의 체면은 어디로 가는 거죠?
루시안이 타락한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자연스레 협박했다.
“계약 조항. 너는 내 말에 무조건 따르기로 했지.”
계약을 들고 나오자 아리엘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건 나한테 너무 유리한 명령 아닌가?
강제로 차에 우유와 설탕을 타 먹을 수 있게 되다니.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그녀는 일단 대답했다.
“……알았어요.”
“좋아.”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 루시안이 우아하게 자기 찻잔을 집어들었다.
와. 루시안도 마신다.
아리엘은 쓴 차를 들이키는 그를 살며시 훔쳐보며 달콤한 밀크티를 홀짝거렸다.
밀크티가 기분좋게 달아서, 그리고 루시안이 차를 마시는 모습이 신기해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단 건 안 먹네.’
루시안은 티 테이블 위의 단 디저트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아리엘 몫으로 동그랗게 썰린 멜론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티 푸드는 플럼 케이크나 초콜릿같이 강한 단맛을 가진 디저트 종류였다.
그는 쓴 차만 들이키면서 밀크티에 푹 빠진 아리엘을 구경했다.
뜨거운 밀크티를 호호 불어 조금씩 먹는 그녀를 보며 루시안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할짝거리는 게 고양이 같아.”
으…… 또 놀린다.
이래도 루시안이 나를 그런 식으로 본다고, 다이아나?
‘이건 잘해야 애완 고양이 아니면…….’
아리엘의 생각은 갑자기 입술 위에 닿은 루시안의 손길에 놀라 멈춰버렸다.
그녀의 입술 위를 느릿하게 손으로 훑은 그가 피식 웃었다.
“우유 수염이나 묻히고.”
창피함에 아리엘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애 취급만 한단 말이야…….’
루시안이 붉은 혀를 내어 제 손에 묻은 우유거품을 핥았다.
아리엘이 할 땐 분명히 새끼 고양이가 우유 접시를 핥는 것 같이 무해하던 동작이, 그가 하니 상당히 위험해보였다.
아리엘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개져버렸다.
어느새 찻잔을 싹 비운 그가 냅킨으로 아무렇게나 입을 닦고 화제를 옮겼다.
“집 안을 싹 바꿨더군.”
* * *
“……?”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아리엘은 이내 깨달았다.
‘아. 지난 번에 했던 명령에 대한 이야기구나.’
지난 번에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 루시안은 아리엘에게 이렇게 요구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집을 네 식대로 다 뜯어고치고 규칙도 바꿔 놔.’
그리고 아리엘은 그 명령에 따라 착실하게 대공저를 바꿔놓았다.
사시사철 똑같은 무채색의 회색 커튼에 따스한 색깔을 넣고, 무늬없는 흰 식기를 화사한 꽃무늬로 채웠다.
정원에는 새로 심은 예쁜 정원수들이 가득해졌다.
내정 예산이 그녀의 개인 금고로 들어가는 걸 막기위해 필사적으로 돈을 썼더니 격에 떨어지지 않게 집을 꾸밀 수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예산이 한참 남아서 걱정이지만…….’
아무튼 루시안에게 달라졌다는 인상을 남겼다니 다행이다.
아리엘은 약간 뿌듯해져서 미소지었다.
그 때 루시안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내 방은 조금도 안 바뀌었더군.”
아리엘은 얼른 대답했다.
“루시안 방은 손 안 댔어요! 집을 꾸미는 건 대공자비로서의 일이지만, 루시안 방은 루시안 거니까…… 바꾸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애초에 그가 그녀에게 바꾸라고 한 건 이 저택이지 그 자신이 아니다.
아리엘은 허락을 받은 뒤 마티어스 주변 환경까지 바꿨으면서도 루시안의 것에는 절대 손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