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Duke’s Little Lady RAW novel - Chapter (95)
진짜 아내였다면 대공자비가 대공자 방을 새로 꾸미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계약 아내였다.
아리엘은 거기까지는 자신이 욕심낼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아리엘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이 잡아먹을 것같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삽시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리엘은 꼴깍 침을 삼켰다.
‘왜, 왜 저렇게 기분이 나빠보이지? 내가 뭐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뭐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집도 많이 바꾸었고, 혹시 몰라 그의 물건에 손대지도 않았는데.
한참 그렇게 노려보던 루시안이 잇새로 누른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좋아. 집을 다 바꿨으니 이제 뭘 더 바꾸고 싶지?”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리엘을 응시했다.
그녀가 온 집안을 바꿨으면서도 자신만 쏙 빼놓는 것이, 루시안은 아주 거슬렸다.
마치 그와 그녀는 계약이 아니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말이다.
‘나라고 대답해.’
루시안은 명령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잔뜩 겁먹은 어린 아내에게서 나온 대답은 완전히 뜻밖이었다.
“그건…… 비밀이에요!”
아리엘은 오들오들 떨며 소리쳤다.
루시안이 넘겨짚은 것처럼, 그녀에게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한 다음 계획이 있었다.
라카트옐 대공가에 온 뒤로 줄곧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어.’
그에게 말하면 아무 소용없어지는 계획이니까.
아리엘은 다른 어떤 것보다, 마티어스와 루시안 사이의 관계를 바꿔보고 싶었다.
강하고 아름다운 두 부자는 사이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이걸 바꿔보려면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쁜 건지 알아야 하는데 그녀는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아리엘은 이 생각을 마음 속에만 품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비밀이야.’
아리엘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이 어이를 상실한 듯 속눈썹을 치켜떴다.
“감히 나한테, 비밀이라고?”
“……네.”
“…….”
한참 그녀를 훑어보던 루시안이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넘겼다.
“유감이군.”
“뭐가요?”
“널 고문해서 실토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게.”
“그, 그게 왜 유감이에요?!”
아리엘은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기겁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그녀의 반응에 루시안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기울며 지는 오렌지빛 태양이 유리 온실 안을 가득 채우며 그를 비추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흰 피부, 홀릴 듯한 마력을 지닌 푸른 눈.
곧은 콧날과 악마같이 붉은 입술.
그리고 그 아래로 뻗은 희고 긴 목선.
석양에 비친 루시안은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치명적이게 아름다웠다.
방금까지 그의 말에 질겁했음에도, 아리엘의 심장은 루시안을 보고 콩닥 뛰었다.
‘뭐, 뭐야…….’
그녀는 얼른 밀크티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심장 소리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했다.
‘역시 루시안 외모는 너무 위험해.’
* * *
다음날.
노집사 알렌은 달튼에게 전해받은 서류를 루시안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대공자님. 알렌입니다.”
“들어와.”
그 자신의 미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엄청나게 호화로운 방에 늘어져 있는 반나신의 소년이 그를 맞았다.
루시안은 느지막히 씻은 듯 아직 젖은 몸과 머리카락으로 긴 의자에 기대앉아있었다.
윗옷을 걸치지 않아 물기 어린 소년의 흰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에게 유혹이자 공포인 그 아름다운 모습에도 알렌은 꿋꿋이 자기 임무를 다했다.
라카트옐 가를 대대로 모시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익숙해져야 할 모습이었다.
“재무관이 넘긴 서류입니다. 녹스 남작에 대한 모든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루시안이 손만 까닥여 서류를 받아들었다.
서류 뭉치는 납작했다.
북부 변방의 작은 영지를 가진 녹스 남작은 조사할 내용도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라카트옐 가의 정보망은 별 것 없는 중에도 녹스 남작의 머리카락 개수까지 알아내 왔을 것이다.
손의 물기를 마나로 대강 말린 뒤 서류를 넘기는 소년의 얼굴에 벽난로 불꽃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찰나 그의 눈동자 안에도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
“…….”
서류를 츠르륵 넘기며 죄다 확인한 루시안은 녹스 남작이 아리엘과 아무런 접점도 없음을 알아차렸다.
하나도 없다.
두 사람은 이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
하물며 아리엘의 친정인 루실리온 후작가와도 인연이 없다.
녹스 남작은 원하든 원치않든 아리엘에게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시안은 불쾌한 듯 혀를 찼다.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었다면 바로 죽여버렸을 텐데.
접점이 없으니 내막을 알 때까지는 살려두는 수밖에.
그때 창밖에서 맑은 풍경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안은 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알렌이 서둘러 그의 몸에 가운을 걸쳐주었다.
창으로 내려다보자 아래 정원에서 헥터, 랄프와 함께 꽃을 꺾으며 노는 아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소녀의 품에는 꽃이 한 아름 안겨있었고, 아리엘의 뺨은 생기있게 발그레해져 사랑스러웠다.
“아기 마님. 이것 좀 보십시오.”
“와, 랄프! 어떻게 잡았어요?”
몸놀림이 잽싼 랄프가 소드마스터답게 한 손으로 잠자리를 잡아 아리엘에게 보여주었다.
덩치가 집채만한 헥터는 잠자리를 쫓아버리거나 죽이지 않고는 좀처럼 잡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날개를 오래 잡고 있으면 안 좋대요.”
아리엘이 말하자 랄프가 부드럽게 잠자리를 놓아주었다.
놓인 잠자리가 어리둥절하게 지그재그로 날다가, 아리엘을 보고 그녀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아리엘이 손을 뻗자 이끌린 듯 그녀의 손끝에 살포시 앉는다.
까르르, 아리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잠자리는 인사하는 것처럼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떠나갔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있던 알렌은 조심스레 루시안에게 말했다.
“가서 함께 어울리시지요.”
“감히 상관하지 마.”
즉시 사나운 대꾸가 떨어졌다.
알렌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루시안이 창가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느리게 창문에 손을 대었다.
다시 꽃을 모으며 즐거워하는 아리엘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뗐다.
“……그냥 보는 게 좋아.”
알렌은 놀란 듯 루시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내려가면 잠자리 잡기 같은 건 못하겠지. 미물이 날 피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가 자조하듯 날카롭게 웃었다.
“지금도 내가 기세를 가두고 있지 않으면 반경 내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거다.
그러니…….”
루시안은 좀 더 편하게 아리엘을 지켜보려는 듯 창틀에 걸터앉았다.
“저대로 내버려 둬.”
“…….”
알렌은 가슴 속에서 벅차오르는 흐뭇함을 느꼈다.
때론 증손자같이 애틋하고, 평소엔 지극히 어려운 상전인 작은 주인에게서도 변화가 느껴졌다.
루시안은 잔인하게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것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던 냉혹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녀에게 고정된 그의 눈빛은 잔혹함과는 달라 보였다.
새삼 노집사는 아리엘이 이 집에 들어온 1년 사이에 남자 느낌이 물씬 나게 바뀐 루시안을 훑어보았다.
소년은 키가 훌쩍 크고 날로 미색을 더해가면서도 점점 강한 수컷의 느낌을 덧입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면 나라 한두 개쯤은 손쉽게 무너뜨릴만한 남자가 될 것이다.
알렌은 아홉 달 전 루시안의 결혼식에서 보았던 두 소년소녀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결혼이란 참 놀라운 것이로구나.
소년은 남자가 되고, 비쩍 마르고 병든 새끼병아리 같던 소녀는 반짝이는 붉은 보석처럼 예쁘고 건강해졌다.
알렌은 지금의 이 행복이 오래 이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똑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