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Surgeon RAW novel - Chapter (531)
제2화 신세계 Ⅱ (2)
“김지훈, 나머지 처리하고 마무리해.”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과정을 채 절반도 진행하지 못했다. 이준영 교수의 의도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난리가 났다. 별별 표정을 다 짓고 있었다.
언뜻 지금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별말 아닌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첫 시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진행됐고, 특별한 문제도 없었다.
운이 아니라 실력이 뒷받침됐기에 첫 시도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지훈이 아닌 이준영 교수의 경험과 실력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렇게 노련한 의사의 어깨에도 팽팽한 긴장이 걸려 있었다.
더구나 송재덕 교수의 말처럼 교수들의 눈에 보인 가장 큰 어려움은 수처였다.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단순한 수처가 아니었다. 마치 손으로 직접 수처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기구를 다뤄야 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허술하면 재발이나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전공의에게 수술을 넘긴다?
김지훈에게는 아뻬를 라파로로 한 번 했다는 것이 실제 경험의 다였다. 담낭 절제술을 무수하게 보았다지만 간접적인 경험일 뿐이었다.
김지훈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영 교수의 신뢰를 느끼는 순간 최소한 시도는 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힘차게 대답을 한 김지훈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교수들은 물론 수술을 준비해야 할 치프들까지 발을 떼지 못했다. 송재덕 교수마저 힐끗힐끗 시계를 보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과연 김지훈은 해낼 수 있을까?
아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해야 한다.
은근한 긴장에 손이 떨렸다.
스승과 고경아의 눈에 가득한 믿음과 응원에도 불구하고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수처가 이렇게 어려워 보일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뻬 라파로와는 또 다른 기술적 숙련도가 요구되는 과정이었다.
입에 힘을 꽉 주었다.
‘그래. 기구만 다를 뿐이야. 손안에 꼭 잡히든, 기다란 막대 끝에 달렸든 어차피 니들 홀더에 불과해. 복막을 떠 패치와 연결하는 게 다야.’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시작하겠습니다.”
침착하게 화면 속에 비친 기구들을 움직였다.
켈리로 복막을 잡으려는 순간 예상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각도가 맞지 않아 복막을 제대로 잡을 수조차 없었다. 마치 기름칠을 한 것처럼 켈리 끝이 미끄러졌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답을 보았다. 스승의 손놀림을 기억해 냈다.
왼쪽 손목의 위치와 자세를 바꿔 가며 켈리가 복막과 수직이 되도록 했다. 복막이 잡혔다. 살짝 잡아당긴 후 바늘 끝을 가져갔다.
각도가 제대로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역시 이미 눈으로 보고 배웠다.
복막을 잡은 채 왼손을 자연스럽게 풀어 주고 오른 손목의 위치를 바꿨다.
적당한 각도가 나왔다. 복막을 가능한 한 두껍게 뜬 후, 켈리로 패치를 잡았다. 테두리에서 2~3밀리미터 정도 여유를 두고 실을 통과시켰다.
이제 니들 홀더로 타이를 해야 한다.
개복 시에는 손으로 하는 것만큼 쉬운 술기다. 그런데 기다란 막대가 방해를 했다. 얼마만큼의 힘을 주어야 적당한지 알 수가 없었다. 막대를 통해 전해지는 힘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구 끝을 통해 가벼운 힘이 전해졌다. 매듭을 점점 강하게 조이자 팽팽한 압력이 느껴졌다. 복막과 패치가 단단하게 밀착되도록 조여야 했다.
경험을 십분 활용해야 할 때였다. 화면으로 보이는 매듭과 손으로 전해지는 느낌으로 결정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삼중으로 매듭을 짓고 잘랐다.
카메라가 조용히 타이한 부분을 비쳤다. 복막과 패치가 정확하고도 확실하게 봉합됐다.
이준영 교수의 나직한 숨소리가 들렸다. 잘했다는 의미였다.
다음 부위를 수처했다. 하면 할수록 요령이 붙는지 점점 익숙해졌다.
손에 신바람이 붙었다. 건성건성, 혹은 자만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있다는 성취감과 흥분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심지어 재미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느새 패치의 거의 모든 부분이 복막에 밀착됐다.
이준영 교수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김지훈이 그동안 해 온 노력과 가진 자질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음성에서 보았던 김지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툭하면 날 놀라게 하더니 지금도 여전하네. 네가 가진 잠재력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구나.’
송재덕 교수를 비롯한 교수들 모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준영 교수도 긴장하며 힘들어한 수처다. 그런데 전공의가 그에 못지않은 모습을 보였다. 눈에 보이는 차이는 단지 기구를 다뤄 본 경험의 차이일 뿐이었다.
9시 15분이다. 더 이상 수술을 미루고 참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말했다. 수술 중이라는 사실마저 잊었는지 목소리가 조금은 높았다.
“허어! 젊은 놈들이 역시 기계는 잘 다루네. 그래. 호치키스고 라파로고 뭐고, 새로운 것은 당연히 너희들이 해야지. 현수야, 일석아, 가자. 가서 수술하자. 열심히 하면 너희도 지훈이하고 똑같이 할 수 있어. 암! 그렇고말고. 지훈아, 경석이랑 대장 하자. 대장. 좋다. 좋아.”
이혁민 교수가 수술실을 나가며 신현수를 보았다. 상당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정이 가, 지금은 김지훈보다 더 애틋하게 아껴 주고 싶은 제자였다.
“신현수,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간담도와 위장관은 확실히 다르다. 라파로만 수술이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믿는다.”
확고한 신뢰가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랬다. 가진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았던 신현수였다. 한때는 웬만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고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젠 지적할 거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발전했다.
지금처럼만 하면 머지않아 위장관을 모두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젊기에, 그리고 노력하기에 자신보다 더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라고 이혁민 교수는 굳게 믿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금은 처졌던 신현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신기동 교수의 눈빛이 묘했다.
‘이 자식을 조금 더 갈고닦아야 하는데 답답하네.’
“손일석, 군 복무 기간 준다는 소리는 없어?”
느닷없는 소리였지만 손일석은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른 놈이다. 더구나 그동안 무수하게 많은 수술을 함께했다. 다들 이준영 교수만큼 무서워했지만 이제는 친근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머릿속이 휙휙 두세 바퀴 도는 순간 답이 나왔다.
“선생님, 허리라도 강제로 꺾을까요? 디스크면 면제도 가능할 텐데요. 혈관만 가르쳐 주신다면 허리가 문제겠습니까?”
신기동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남자는 허리야, 인마. 나중에 누굴 원망하려고. 아니다. 내 허리도 아닌데 상관없네. 일석아, 수술하는 데 지장 없을 정도로 허리 한 번만 꺾자. 내가 꺾어 줄까?”
언제, 어디서든 잘못한 것을 보면 여지없이 차가운 비수를 날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농담을 다 했다. 손일석과 단둘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일석도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신기동 교수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수술 준비하겠습니다.”
“오후 수술을 벌써 준비해?”
“이론도 수술만큼 중요하다는 말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세 방에서 수술을 할지 모르는데, 미리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일석이 바람과 함께 휘리릭! 사라졌다. 신기동 교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어딘지 모르게 나사가 풀어진 것 같지만, 누구보다도 속이 꽉 찬 놈이 바로 손일석이었다.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전공의기도 했다.
‘후우! 정말 마음에 드는 놈 하나 건졌는데, 1년도 채 안 남았네. 군대 가 있는 동안 손이 썩지 말아야 하는데, 저놈 성격에 그게 될까?’
당연히 군대에서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할 것이다. 하기에 마음에 쏙 들 수밖에 없었다.
교수들과 치프들의 놀람과 어수선함이 사라질 때쯤 탈장 수술이 끝났다.
첫 시도였지만 깔끔하고 완벽하게 해냈다. 김지훈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준영 교수는 마무리를 하는 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과는 어딘가 달랐다.
“수고했어. 수요일에 T-tube 넣어야 할 환자 있으니까 확실하게 준비해.”
바로 이것이 고민한 이유였다.
현재 라파로 수준에서 T-tube 삽입술은 가장 어렵고 위험한 술기였다. 그런데 라파로로 가능하다고 생각한 수술을 연이어 한다는 사실에 고민보다는 흥분이 앞섰다. 젊은 의사의 도전 정신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눈가에 힘까지 주어 가며 힘차게 대답하는 모습에 이준영 교수가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환자와 수술 앞에서는 겸손과 신중함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덕목이지만, 때론 과감하고 대범한 자세도 필요하다. 그래야 발전이 있을 것이다.
‘그래. 너마저 두려워하면 여기서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겠지. 최선을 다해 보자.’
스승과 제자의 넘침과 부족함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잠시 수요일에 있을 수술을 생각하던 김지훈이 회복실로 발길을 옮겼다.
곧 병실로 올라가도 좋을 정도로 마취에서 깨어난 것이 분명한 용동남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할아버지, 수술 정말 잘됐어요. 그냥 마음 놓고 움직이셔도 됩니다. 거의 안 아프시다는 거 다 알아요.”
“으으으으! 지금 내가 얼마나 아픈지 누가 알겠어.”
아직 마취 기운 때문에 큰 통증은 없을 텐데 이 정도라니, 병실에서는 어떨지 걱정이 앞섰다. 그렇기에 더욱 라파로로 하길 잘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수술을 했으면 아마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김지훈이 서둘러 다음 수술을 준비했다. 라파로 두 개와 개복 수술 두 건이 더 있었다.
금경태가 구속된 이후 이준영 교수 혼자 외래 환자와 내과 컨설트를 모두 보아야 했다. 그 덕에 수술하는 날인 월, 수, 금에는 수술실을 벗어날 시간이 없었다.
김지훈이 다음 수술을 앞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환자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이혁원이 우연히 그 모습을 보았다.
‘다음 수술은 수없이 보셨을 담낭 절제술인데, 지금도 수술 과정을 반복하시는 거겠지?’
습관처럼 굳어진 일이 분명했다. 이혁원이 주머니 속에 접혀 있던 수술 기록을 꺼냈다. 김지훈도 처음에는 분명 가장 기본이 되는 과정을 외우고, 또 외웠을 것이다.
중얼중얼.
선배와 후배의 넘침과 부족함이 묘하게 겹쳤다.
***
신현수가 왔는데도 빡빡하다.
화요일은 수술이 없지만 라파로로 T-tube를 넣어야 할 수술 준비로 오전 내내 골머리를 썩었다. 오후에는 수술 3개가 동시에 벌어져 퍼스트를 선 데다, 총치프 문제로 연락을 주고받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통화를 끝내고 치프들과 마주한 김지훈이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훈아, 경석이 형은 절대 안 한다고 펄쩍 뛰네.”
“그래서?”
“너보고 하란다. 천안에서는 뭐래?”
김지훈이 한숨만 쉬었다.
“역시 너구나. 잘됐다. 사실 니가 하는 게 제일 무난해. 실력이 다는 아니지만 널 내려다볼 사람도 없고, 인간성이야 나한테는 조금 달리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잖아. 고민하지 말고 그냥 해. 딱이다. 현수야, 니 생각은 어때?”
손일석의 마지막 목소리가 왠지 묘했다.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리며 입술을 모았다. 하고 싶다는 욕심과 현실은 별개였다.
실력으로만 뽑는다면 혹시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총치프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실력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능력과 함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할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지난 3년의 세월일 것이다. 어쩌면 학창 시절과 인턴 때의 모습도 영향을 끼칠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김지훈이라는 사실에 자존심에 살짝 금이 갔지만 인정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 신현수도 누가 총치프가 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게 부족한 면이 많았고, 솔직히 라파로 하는 걸 보면서 실력으로도 널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이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야.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야. 이젠 널 이기고 싶은 마음보다는 내 한계가 어디인지 알고 싶어.’
신현수의 얼굴이 갑자기 편해 보였다.
“축하한다. 나도 일석이 말에 동의해. 너만큼 잘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야. 힘들면 언제든 발 벗고 나설 테니까, 다른 걱정은 안 했으면 좋겠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신현수 맞나?
머리부터 발끝만이 아니라 속까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누구보다도 강했던 자존심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옛말에 상투를 올려야 진짜 어른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어쨌든 당황스럽다.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손일석도 한참 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현수는 여전히 편안해 보였다.
그 순간 지금까지 서로의 마음속에 단단히 버티고 있던 벽 하나가 와르르 무너졌다.
“고맙다, 현수야. 열심히 할게. 많이 도와줘야 한다.”
“걱정하지 마.”
“야! 이 자식들이 아주 날 농락하고 있었구나. 한 놈은 실력을 숨기고, 또 한 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네. 니들 내가 알던 놈들 맞아? 특히 신현수 너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이런 문제는 물러설 니가 아니잖아.”
직격탄이다. 그런데 신현수는 웃기만 했다. 도리어 속에 있던 마음을 팍팍 내뱉는 손일석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속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김지훈이 마음의 짐을 훌훌 털고 오프를 갔다.
정말 간만에 데이트다.
남들처럼 함께 밥 먹고 커피 한잔했을 뿐인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아쉬움이 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어느새 12시가 넘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들어가기 싫다는 마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후우! 현수가 결혼을 해서 그런가? 점점 보내기가 힘들어지네. 에이! 결혼이고 뭐고, 일단 같이 살자고 해 볼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응급실 옆을 지나던 김지훈이 귀를 쫑긋거렸다.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야이 개새끼들아! 왜 내 말을 안 믿어? 빨리 안 내놔!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
소리만 들어도 인턴이나 간호사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청원경찰도 환자 문제에는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 누군가는 나서서 해결해 주어야 한다. 정 말이 안 통하면 힘으로라도 말이다.
김지훈이 어깨에 힘을 주며 응급실 문을 열었다.
제길! 열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