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Surgeon RAW novel - Chapter (857)
5화. 수술 시연은 어디로? Ⅰ (2)
다음 날, 유난히 바쁜 하루가 지나갔다.
일과가 끝난 후 피곤해 죽겠다는 신현수와 이경석을 앞에 앉히고 오창도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졸음으로 거의 감겨 가던 눈이 점점 커졌다.
추측과 사실은 거짓과 진실만큼 차이가 크다.
헛소문을 퍼트리는 놈이 누구인지 확실해지자 신현수와 이경석이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학회에서 받은 강렬한 자극이 또 다른 성격의 자극으로 변했다.
“세상 참 흉흉하네. 실력만 뛰어나면 뭐 해. 인간성이 따라 줘야지. 지훈아, 혹시 진충기가 도리어 혼자 수술을 못하는 거 이냐?”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이 정도 말까지 나왔는데 벌써 얘기했겠죠. 말 그대로 실력만 있는 사람 같아요.”
“이건 윤리가 아니라 도덕이다. 국민학교만 나와도 양심에 찔려서 할 수 없는 짓이야. 그런 놈들이 문제가 더 많은 법인데 학술 임원까지 되다니 세상 참 희한해. 현수야, 이렇게 되면 해결 방법은 하나다.”
물끄러미 책상만 보고 있던 신현수의 눈이 번쩍였다.
“우리가 수술 시연을 반드시 따내야죠.”
“송재덕 선생님한테 전화받고 압박 심하게 받았는데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 지훈이가 어제 수술한 환자 소문을 퍼트려서라도 유리하게 만들고 싶네. 똑같은 놈 될 수도 없고 죽겠다.”
“곪으면 결국 터지잖아요. 말다툼 좀 했다고 분원으로 내쫓을 정도면 굳이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퍼져 나갈 겁니다. 작업이 편해질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지훈아, 너도 어제 이준영 선생님께 전화받았지? 시연 계획서부터 확실하게 작성하자.”
은근히 거칠었던 호흡이 가라앉고, 어깨를 짓누르던 피곤은 분노의 불길에 타 버렸다.
이럴 때 은근히 머리가 쌩쌩 돈다. 재빨리 할 일을 해야 할 때였다.
눈빛을 굳히며 머리를 맞대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 전화야? 오늘 누가 당직이지?”
다들 고개를 저었다.
김지훈이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병동에 일이 생겼나? 여보세요?”
(이혁원입니다. 선생님, TV 빨리 켜 보세요.)
“갑자기 TV는 왜?”
(그게……. 하여튼 보시면 압니다. 지금 바로 보세요.)
채널까지 알려 주며 채근을 했다.
도대체 무슨 방송이 나오기에 호들갑일까?
매일 볼 수 있는 뉴스에 불과했다.
그런데 복강경을 이용한 간 절제술이란 자막이 떡하니 떠 있었다. 어느 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수술실 광경이 비쳐져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의외의 얼굴이 보였다.
최인호 교수였다.
『복강경을 이용한 간 절제는 선진국에서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수술입니다. 그런 수술을 본원에서 처음 시도해 성공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처음이라는 말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환자분도 작은 절개 창과 개복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술 후 통증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수술을 통해 국내 의료 발전과 환자분들의 빠른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수술은 더욱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믿습니다.』
진충기까지 인터뷰를 했다.
『처음 시도하는 수술이기에 의미가 상당하지만 정보조차 거의 없어 신중하게 결정했습니다. 집도 중 어려움이 꽤 컸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복강경 센터를 운용하며 축적된 수많은 경험 덕이었습니다. 지금은 양성 질환에 국한되지만 이후 1기 간암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매진할 생각입니다.』
국내 최초의 쾌거라는 아나운서의 멘트를 끝으로 방송이 끝났다. 모두들 TV를 끌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눈만 멀뚱거렸다.
방송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막강하다. H 병원은 막대한 홍보 효과를 취하고,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는 자신들이 원했던 명성을 얻을 것이다.
결코 비상식적이거나 정당하지 못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정훈철 덕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문제는 중간중간 들린 몇몇 말이었다.
처음, 두 번째, 세 번째. 국내 최초!
단어 하나에 불과하다고 무시할 말이 아니었다. 최초라는 말은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기에 함부로 써서도 안 된다. 더구나 이미 김지훈이 성공한 수술이었다.
수술 시연 병원 선정과 맞물려 더욱 민감하게 들렸다.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송사 의도가 아니라면 H 병원 관계자의 실언, 혹은 고의일 수도 있었다.
한 번 불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이다.
김지훈을 비롯해 전임들도 마찬가지였다.
헛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고의로 제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취재 중 분명 최초라는 말이 거론됐을 것이다. 그때 바로잡지 않았다면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H 병원과 원수가 될 운명일지도 몰랐다.
이경석이 의자에 바짝 당겨 앉았다.
“국내 최초? 이거 정정해 달라고 요청해야 하는 거 아냐? 처음이라는 말도 참 교묘하게 사용했어. 학회 임원들은 우리 병원이 최초라는 것을 빤히 알고 있다고 해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잖아.”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H 병원 보도가 나온 것도 신경이 쓰이네요. 방송국에서 우연히 알게 돼 보도했다고 보기에는 시점이 꽤 묘하기도 하고요. 지훈아, 혹시 정 피디님께 간 절제에 대해 말한 적 있어?”
“가끔 통화하지만 수술 얘기는 안 해.”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보통은 그렇겠지? 병원 PR을 위해 방송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으면 해야 할 일일 수 있어. 그렇다고 해도 과장이나 거짓 정보는 별개 문제인데.”
“고의로 그랬다면 결국 몇 배로 돌려받게 된다. 아니면 우리가 나서서라도 바로잡고 사과받아야지.”
김지훈은 눈가만 찡그린 채였다.
과민한 걸까? 아니면 과민하게 대처해야 할 일일까?
당장은 답이 안 보이는 문제였다.
방송국이 달라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정훈철에게 연락해 상의하기로 했다.
당면한 일부터 해결해야 할 시간이었다. 국내 최초란 말이 진충기에 대한 분노와 맞물려 강한 투지로 변했다.
“이렇게 된 이상 시연 계획서부터 확실하게 만들어야 돼. H 병원에서도 제출할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 뭔가 좀 특별해야 콱 눌러 버릴 것 같지 않아?”
김지훈이 눈가를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의사들 앞에서 자랑하려고 시연하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원칙이 강한 힘을 발휘한다. 시연할 때만 예외적이라면 본래의 의미까지 퇴색할 것이다.
“특별한 계획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방식이 완벽하진 않아도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바탕으로 계획을 잡죠.”
“나도 지훈이 의견에 찬성입니다.”
“오케이! 그래도 포장이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성의가 있어 보여야 돼. 같은 표현도 세련되게 해야 하고.”
전임 3명이 머리를 맞댔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까지 가세하면 더욱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다.
윤곽을 잡은 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 끊임없는 자극을 주는 H 병원이었다. 국내 최초란 말만 들리지 않았으면 발전을 위한 자극이었을 텐데, 불행히도 진흙탕 싸움에 빠진 것 같은 느낌만 들었다.
이대로 두고 보며 참는 것은 능사가 아니었다.
‘내일 잊지 말고 훈철이 형한테 전화해야겠다.’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자.
그것이 의료 윤리이자 세상 살아가는 도리다.
다음 날, 정훈철과 통화했다.
(H 병원하고 방송국 이해관계가 딱 맞았네. 보통 사람들은 국내 최초라는 말만 듣지, 거짓인지 아닌지는 별로 관심이 없어. 한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벌인 거야.)
“해결 방법이 있나요?”
(왜? 최초라는 말을 엉뚱한 사람이 가져가니까 화나?)
“형님, 저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입 다물고 있나? 그런 수술을 했으면 형한테 먼저 알렸어야지. 김지훈 선생님의 겸손함 덕분에 좋은 기삿거리 하나 놓쳤습니다. 내가 화낼 일이야.)
“죄송합니다.”
(화나는 일이지. 내 업적을 애먼 놈이 가로채려 하는데 왜 안 나겠어? 그런데 방송국이 그렇게 만만치 않아. 내가 정확한 상황을 알아볼 테니까 신경 끄고 기다려.)
“매번 이런 일로 전화드려서 죄송해요.”
(말만 그러지 말고 술 한잔하자. 얼굴도 보기 힘든데 형 동생 사이라고 말할 수나 있겠어? 우리 잘하자. 지훈아, 똑바로 하자.)
조만간 만나기로 하고 통화를 끝냈다.
정훈철에게까지 똑바로 하자는 말을 들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술보다 더 급한 일이 남았다. 박병두 환자에게 유독 신경이 쓰였다.
오창도 문제도 있지만 무사히 회복될 시점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었다. 극히 제한적 간 절제와 봉합이라고 해도 어딘가 터지면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운동하시는 건 좋은데 무리하진 마세요.”
“알겠습니다. 애초에 선생님께 수술받을 걸 무슨 생각으로 그놈의 병원에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놈의 병원이란 말이 귀에 턱 걸렸다. 상황이 어떻든 다른 병원이나 의사라 해도 환자에게 욕을 먹으면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에휴! 이게 다 진충기 때문이야. 제대로 처신했으면 나까지 곤란할 일은 없었잖아.’
그나마 매일 저녁 환자를 찾는 오창도 덕에 마음이 풀렸다. 환자와 보호자의 눈빛도 많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 몰라도 섣불리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우연히 오창도와 마주쳤다.
“이번 주를 끝으로 그만두게 됐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하는데 선생님께 폐만 끼칩니다.”
“아닙니다. 잘 해결되시는 것 같아서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진료하신 선생님은 안 오시나요?”
“보호자분과 한 차례 만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로따로 만나나? 집도의 책임이 가장 크다지만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닐 텐데 이상하네.’
사람에 따라 대처 방식이 다르다고 해도 오창도와 함께 만나면 가장 좋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어쨌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의사를 알게 됐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씁쓸한 와중의 흡족함이었다.
여전히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시간 날 때마다 박승준 교수 밑으로는 빠짐없이 모였다. 계획서를 작성하며 좋은 방법이 있는지 고민했다. 중구난방이었던 의견이 점차 하나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때론 의견이 충돌해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둘만 모여도 시끄러운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일어설 때 앙금만 남아 있지 않으면 족한 일이었다.
“그럼 오늘 논의된 방안으로 확정하고, 내일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봅시다. 지 교수, 우리 전임 선생들과 시간 약속 잡고 내일 오전에 알려 줘.”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박승준 교수였다. 처음 왔을 때 실력만이 아니라 많은 면에서 촉망받는 의사였다는 말이 결코 뜬소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동훈 교수의 눈빛도 갈수록 편안해지고 있었다. 이경석은 스스럼없는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상당한 친밀감을 드러내곤 했다.
‘오늘 받은 느낌이 바로 우리 과의 진정한 힘이겠지?’
뿌듯함이 강해질수록 즐거움도 배가 됐다.
불타는 한 주가 성큼 지나갔다.
어느새 토요일이 밝았다. 여느 때보다 더 무시무시한 주말 집담회였다.
목표가 너무 명확했다.
박병두 환자 수술에 참여한 이경석이 김지훈과 함께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언제 불길이 날아들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나종진이 맥없이 쓰러졌다.
“하석아, 너도 이제 1년 차 중반이구나. 이 수술에서 뭘 봤니? 뭘? 간 봉합할 때 실은 몇 번을 썼지? 왜 그걸 썼을까? 원칙이 있겠지? 원칙이. 빨리 말해 봐, 빨리.”
“예. 그게 그러니까…….”
“음! 네가 만석이, 놈놈놈 동생이었구나. 그럼 안 되지. 안 되고말고. 하석아, 열심히 하자. 열심히.”
이젠 봐줄 때 지났다. 동네 아저씨 망치에 단발머리가 휘청거렸다.
한 팀이 모조리 쓰러진 후에야 집담회가 끝났다.
전임들의 긴장이 누그러들지 않았다. 교수들에게 계획서를 보이고 점검받아야 할 날이기 때문이었다.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와 함께 마지막까지 검토를 거듭하던 신현수와 이경석이 힐끗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지훈아,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시계는 왜 그렇게 봐? 무슨 일 있어? 형이 해결해 줘?”
“김지훈, 얌전히 자리에 앉으면 안 돼? 정신 사납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아닌 게 아니라,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계를 보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째깍’ 소리와 함께 시계 침이 11시 정각을 가리켰다.
김지훈이 후다닥 달려 나갔다.
“박승준 선생님, 12시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준비할 것도 많은데 갑자기 어디 가?”
얼마나 급한지 문이 활짝 열린 채였다.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산부인과 갔다 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일이었다.
마지막 산전 검사 날이다.
그동안 일도 바쁘고, 일과 중에 산전 검진을 받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다. 오늘은 절대 빠질 수 없었다. 고경아의 살벌한 눈초리도 무섭지만 산부인과 교수가 결정적인 사실을 알려 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고경아와 만나 초음파실로 직행했다. 혈압, 체중을 비롯해 기본적인 사항을 점검한 산부인과 교수가 초음파 검사를 시작했다.
까만 눈이 반짝이는 커다란 머리.
폴딱폴딱 뛰는 작은 심장.
엄마의 아기집을 누르는 자극에 놀란 듯 앙증맞게 톡톡 움직이는 팔다리.
마디까지 보이는 것 같은 손가락과 발가락.
언제 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은 동그라미에 불과했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모를 일이었다.
8개월이 넘도록 아빠라고 한 일도 없는데, 그저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고경아와 함께 삶의 희망이자 힘이었다.
‘고맙다, 우리 아기. 경아 씨, 고마워요.’
얼마 안 있으면 아빠, 엄마의 피를 나눈 아이가 빛을 볼 날이 온다. 울컥 눈가가 붉어지려는 순간 산부인과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자라고 있네. 고 간호사, 출산휴가는 언제부터예요?”
“다음 주부터 쉬기로 했어요.”
“이제 다 컸으니까 안심할 때긴 하지만 무리하지 말아요. 양수 일찍 터지면 엄마도 아기도 다 힘들어요.”
“네. 조심할게요.”
“김지훈 선생, 아이가 이렇게 잘 크고 있는데 몇 번 못 봤지? 그동안 너무 무심했어. 지금이 제일 힘들 때니까 옆에서 잘 봐야 돼. 알았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핀잔에도 불구하고 김지훈의 눈이 반짝거렸다.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