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est Extra in History RAW novel - Chapter (29)
사상 최강의 엑스트라 29화
11장 악역을 만나다(2)
엘피스.
원래 소설 속의 전개대로라면 주인공, 리처드가 영혼검을 얻기 위한 여정을 떠날 때 만년 설산에서 마주치는 ‘악역’이다.
지금 시기에 그녀가 검은 산맥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가능하면 여기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장난스러운 표정과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1권 후반부의 악역 중에서 가장 잔혹한 성정을 가졌다.
그녀의 비전 마법은 마물에 대한 제한적인 지배. 그래서 최소한 검은 산맥에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제한적인 지배라고는 하지만 마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검은 산맥은 엘피스에게는 무기고나 다름없었으니까.
마나만 충분하다면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산맥 전체에 한 가득인 셈이다.
‘잠깐만,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
레이먼이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주변을 훑었다. 동굴 안에 마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훗날 방해가 될 게 분명한 악역 하나를 처단할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엘피스가 퇴로를 차단했기 때문에 그녀를 쓰러뜨려야만 동굴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레이먼은 카시야스와 크론에게 신호를 보냈다.
두 기사가 엘피스를 향해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데시아는 만약을 대비해 옆에 바짝 붙어서 방어 마법을 준비했고, 레이먼은 카시야스와 크론을 엄호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 올렸다.
“파이어 애로우!”
붉은 화염의 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일직선으로 엘피스에게 꽂혔다.
방어 마법에 막힌 듯 기대했던 비명은 터져 나오지 않았으나, 아직 카시야스와 크론이 남아 있다. 두 기사는 엘피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엘피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오히려 감히 달려드는 불나방을 보는 듯, 재밌다는 웃음을 가늘게 흘렸다.
‘분명 마물은 없을 터인데?’
지배를 받고 있을 것으로 유력한 오크들의 모습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지켜줄 방패는 어디에도 없거늘, 어찌 저리 여유롭다는 말인가?’
카시야스의 검에 깃든 마나 소드가 엘피스의 마나 실드를 노리려는 찰나였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동굴의 벽을 뚫고 튀어나온 뭔가가 카시야스의 몸을 들이받았다.
“크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튕겨 나간 카시야스가 동굴 벽에 처박혔다. 서서히 가라앉는 흙먼지 너머로 그의 몸이 발작하듯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는 모양이다. 훗날 황군에서 지지층이 되어줄 카시야스를 이런 곳에서 잃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단역에 가까운 캐릭터지만 나름 세밀한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검술에도 재능이 있으며, 소설 속에서 피의 장례식 이후, 필리어스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는 캐릭터 중 하나로 설정되어 있다.
“제기랄! 하필 여기서 ‘바위 포식자’가!”
크론이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바위 포식자는 동굴에서 조우할 수 있는 마물 중에서도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마나 소드를 사용하지 못하는 평기사 수준의 크론이 상대할 만한 마물이 아니다.
물러나는 게 현명할 터, 그는 무모한 용기를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게슈타인.”
레이먼은 조용히 게슈타인을 불렀다. 외팔의 친위대장은 쉽게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잃어버렸던 검술을 되찾을 방법을 알려준 주군이 위험에 처할까 싶은 걱정 탓이다.
“나에게는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가 있으니, 그대는 나의 검이 되어 저 마법사의 목을 쳐라.”
“데시아 경. 주군을 부탁하네.”
“걱정 마세요, 친위대장님. 제 방패는 우려하실 만큼 약하지 않답니다.”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데시아. 그녀는 상급의 경지이면서도 앱솔루트 실드를 완성했던 경험이 있는 방어 특화의 마법사다. 게슈타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조금 안심이 된 것일까? 외팔의 고위 기사는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뗐다.
서서히 속도를 좁히려나 싶은 순간, 땅을 박차고 번개처럼 바위 포식자의 밑으로 파고들어 검을 휘두른다.
“키에에에에엑!”
바위 포식자, 철갑을 두른 듯한 갑각이 갈라지면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질척한 피가 동굴 벽면과 게슈타인에게 잔뜩 튀었다.
“와, 여기 고위 기사가 있네요?”
엘피스가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최상급 마법사이니, 마나 소드를 보고 경지를 짐작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신이 앞으로 나오면……. 뒤에 계신 분은 어떻게 되려나?”
그녀가 스태프를 겨누자 전격을 머금은 한 마리의 매가 생성되어 날개를 펼쳤다.
최상급 마법답게 마나의 기운이 진하다. 게슈타인은 짧은 순간 아차! 하는 심정이었지만 레이먼은 여유로웠다. 그에게는 믿음직한 ‘방패’가 있었으니까.
“데시아.”
“걱정 마세요. 5황자 전하의 앞에는 제가 있답니다.”
데시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스태프를 흔들자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기이한 문양을 품은 푸른빛의 마법진이 한 바퀴 회전을 끝낸 순간, 거대한 마나 실드가 펼쳐졌다.
뇌전의 매는 마나 실드를 뚫지 못하고 힘없이 고꾸라졌다.
“어라, 이럴 리 없는데……?”
최상급 마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고작 상급 마법사의 마나 실드를 뚫지 못했다고? 엘피스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잠시나마 흔들렸다.
‘역시 대마법사의 혈통답군. 주인공의 눈이 틀리지 않았어.’
레이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데시아, 그녀는 수호의 대마법사를 배출한 헬리 가문의 혈통이다.
레이먼이 효율적인 성장을 위해 옆에서 보조해 줬다고는 하지만, 그녀 또한 가문의 비밀 전승, 비전 마법을 전수하였다.
‘방패는 그 어떤 폭풍에도 흔들림 없어야 한다.’
헬리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르침이다.
레이먼은 엘피스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의 눈동자는 곧 데시아에게 향했다.
160cm 정도 되는 크지 않은 키에 가녀린 체구의 뒷모습이었지만 그 어떤 기사를 앞에 둔 것보다 든든했다.
시선이 닿는 것을 느낀 것일까? 데시아는 자신의 뒤에 선 레이먼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고, 입가에는 싱그러운 미소가 맺혀 있다.
당신을 지키는 방패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에, 레이먼은 엘피스를 견제하기 위한 마법을 영창했다.
“파이어 애로우.”
화염의 화살이 어두운 공간을 꿰뚫었으나 엘피스의 마나 실드는 관통하지 못했다.
푸른 마나의 방패에 충돌하여 힘없이 흩어지는 불의 마법을 보는 엘피스의 입가에는 더욱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레이먼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급 마법이 최상급 마법사의 방어를 뚫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게슈타인이 전진하는 동안 엘피스의 시선을 잠시 잡아두는 견제 목적일 뿐이다.
“어머나? 벌써 여기까지 온 거예요?”
진흙을 머금은 땅 위에는 바위 포식자가 쓰러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신에 피 칠갑을 한 게슈타인이 소름 끼치도록 섬뜩한 눈빛을 반짝이며 엘피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거운 중갑을 입었음에도 한달음에 달려가는 움직임이 날렵했다.
“어라? 죽어버렸네요.”
엘피스가 중얼거렸다. 당황한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외팔의 고위 기사가 코앞까지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그녀 특유의 표정은 변함없다.
“그럼 이번에는 둘이에요.”
그녀가 스태프를 가볍게 흔들자 동굴의 벽과 천장을 뚫고 바위 포식자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 엘피스에게 닿기까지 3m 앞두고 있던 게슈타인은 갑작스러운 개입에 황급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위조차 씹어먹는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돋아 있는 입을 쩌억 벌리는 두 마리의 바위 포식자들을 보는 게슈타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바위 포식자가 두 마리나 더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에 게슈타인과 크론은 표정이 굳었지만, 누구보다 당황한 이는 레이먼이었다.
‘엘피스가 이 정도였나?’
소설 속 묘사와 설정을 보면 마물에 대한 엘피스의 지배력은 높지 않다.
지배의 비전 마법을 다룬다고는 하지만 그 이해도가 부족해서 기껏해야 바위 포식자 하나를 지배할 수 있고, 그나마도 내릴 수 있는 명령에 상당한 제한이 따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됐다. 뭔가 잘못됐다.’
레이먼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소설 속 설정과 묘사를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설정이 변했을 리도 없다. 소설에서 ‘설정’은 절대적이니까. 그렇다면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개가 변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볼 때, 굵직한 사건들은 변하지 않았다.
즉,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악역 엑스트라인 5황자의 몸에 들어간 상태로 여러 사건을 벌이면서 일종의 변수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변수가 ‘전개’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이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걸로 전개를 알고 있다는 이점을 일부 상실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소설의 절대적인 ‘설정’은 결코 변할 리가 없고, 레이먼은 그 설정을 모두 외우고 있으니까.
“크론 경! 5황자 전하를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게슈타인이 외쳤다. 또 다른 바위 포식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의식을 잃은 카시야스를 대신해 크론이 레이먼에게 달려왔다. 데시아가 있다고는 하지만 호위는 많을수록 좋다.
“게슈타인! 저 여자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
톱니바퀴 하나가 오작동을 일으키면 결국에는 장비가 정지하게 된다. 변수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게슈타인은 대답 대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피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마나 소드가 빛을 발했고, 바위 포식자들의 갑각이 갈라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엘피스는 바위 포식자 두 마리를 지배하는 데 마력 대부분을 쏟고 있었기에 마법으로 게슈타인을 견제할 여력이 없었다.
“이거, 오늘은 이만 물러나야겠네요.”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분한 듯 말을 마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아직 고위 기사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 누군가 오고 있다.
“오늘은 ‘협회’에 출석해야 해서, 이 정도까지만. 다음에는 더 재밌게 놀아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그녀의 몸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게슈타인이 휘두른 검이 마지막까지 버티던 바위 포식자를 두 동강 냈다.
“통로 쪽에서 강대한 마나가 느껴져요.”
데시아가 말했다. 경고와는 다르게 안도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모습에 레이먼도 안심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강대한 마나 반응이라면 적탑주나 청탑주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환한 라이트 마법과 함께 등장한 이는 붉은 로브의 적탑주였다.
조금 전까지 강력한 산불을 확산시키고 있던 탓에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고위 마법사의 합류는 든든했다.
“베레누스 경. 생각보다 빨리 왔군.”
“5황자 전하가 걱정되어서 말이지요. 청탑주, 그 늙은이는 혼자서 잘하고 있을 터이니, 이곳에 먼저 오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잘 와주었다. 적탑주가 함께해 주니, 정말 든든하군.”
레이먼은 솔직하게 말했다. 카시야스와 크레이어 후작은 극심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고 이곳은 유령 부대의 은신처였다.
언제 다른 적들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탑주의 존재는 큰 힘이 되었다.
다만, 그가 5분만 더 빨리 와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엘피스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2번째는 없을 거다. 엘피스.’
조금 전까지 엘피스가 있었던 곳에 레이먼의 시선이 꽂혔다. 다음에 조우하게 된다면 반드시 죽일 것이다. 후환을 남겨둘 필요는 없으니까, 철저하게 죽인다.
애초에 1권 후반부에서 그녀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놓쳤다고는 하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 언급했던 ‘협회’의 존재다.
‘신경 쓰여.’
《망자들의 제국》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의 설정집에는 ‘협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집단이 하나밖에 없다.
종말 협회.
설정충인 작가의 설정집에 유일하게 ‘이름’과 단 한 줄의 설명만이 적혀 있었던, 의문의 집단.
‘그들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수수께끼와 같은 설명. 그게 끝이었다. 레이먼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톱을 깨물었다.
《망자들의 제국》의 작가는 언제나 길고 자세한 설정을 적어 놓는 거로 유명했는데, ‘종말 협회’만은 달랐다.
정보가 없는 이 비밀 단체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당장 감이 오지 않았다.
‘종말 협회에 대해 모른다면 다른 정보를 활용하면 돼.’
레이먼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비록 종말 협회에 대해서는 가진 정보가 없지만, 그는 작가의 설정집을 외우고 있다.
그러니, 다른 정보들을 활용하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으리라.
‘올 테면 와라. 전력을 다해 맞서주마.’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