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est Extra in History RAW novel - Chapter (83)
사상 최강의 엑스트라 83화
29장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3)
리처드 팔라어.
《망자들의 제국》 소설 속 주인공은 어두운 소설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다운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지금 스스로를 리처드 팔라어라고 소개한 남자에게서는 짙은 어둠만 느껴졌다.
‘제기랄,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레이먼은 속으로 욕설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피가 새어 나왔다. 언젠가는 주인공과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급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적으로 만나게 될 경우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눈앞의 리처드는 본래대로라면 자신이 마땅히 가져갔어야 할 ‘기연’을 빼앗겼다는 걸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말해준 거지?’
의문이었지만 당장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리처드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기연을 빼앗겼다는 걸 스스로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종말 협회와 관련이 있나?’
정의로워야 할 주인공이 진정한 악당이라고 할 수 있는 종말 협회의 편에 서게 되었으니, 그들에게서 뭔가 들은 게 틀림없다.
레이먼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영혼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독에 중독되었지만 싸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고, 영혼검은 여전히 선명한 백색의 빛을 잃지 않았다.
조용히 전투 자세를 갖추는 황제의 모습을 본 게슈타인은 말없이 앞으로 나섰다. 블리자드 후작 또한 가면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기분이 어떤가?”
리처드는 차분하지만 동시에 증오가 뚝뚝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착용한 가면의 틈새로 보이는 공허한 눈동자에서 차가운 분노가 엿보였다.
레이먼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죄책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주연급 등장인물조차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망자들의 제국》이라는 소설의 미친 세계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넌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리처드의 날카로운 물음에 레이먼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 그런 것인가?”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었다. 리처드가 고개를 저으며 왼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뒤편에서 무장한 협회 전투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30명이 넘는 숫자였는데, 그들이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으니, 결코 쉽게 길을 열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대에게 종언을…….”
“전도사님. 잠시…….”
리처드가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그의 곁으로 협회 전투원 한 명이 다가가 어떤 내용을 속삭였다.
“하늘은 내게 복수마저 미루라고 하는가…….”
리처드가 한탄했다.
드디어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할 날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시딩턴 남작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황제와 그 호위들의 전투력을 가늠하는 것 또한 끝냈으니, 이제 그 목을 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거늘…… 하늘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여, 운이 좋구나.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다.”
흔한 악역들의 대사를 내뱉으며, 소설 속의 진짜 주인공은 부하들과 함께 그림자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왜 저들이 물러났을까요?”
누군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리듯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실비아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군이 오고 있거든요.”
앞서 걷는 자, 그녀는 가장 먼저 황군의 접근을 감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희미한 뿔 나팔 소리가 전해졌다.
계속된 전투로 지친 이들은 그것이 황군이 사용하는 뿔 나팔 소리라는 걸 알아차리고서 환호했다. 실비아의 말대로 카시야스의 황군이 타이밍 좋게 등장한 것이다.
* * *
“리처드 경. 이대로 물러나도 괜찮겠습니까? 그토록 염원하던 대계의 완성을 코앞에 둔 순간이었지 않습니까?”
황제와 합류하려는 황군을 피해 물러나는 중이었다. 동행하고 있는 종말 협회의 하급 간부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적어도 리처드가 필리어스 제국의 황제, 레이먼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한, 레이먼은 종말 협회의 표적이기도 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제거하는 게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리처드가 물러나라는 지시를 내린 것에 대한 사소한 불만 또한 품고 있는 상태였다.
“어리석은 놈.”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질책이었다.
“리처드 경……?”
“일천의 황군이 접근하는 걸 감지하지 못했단 말이더냐? 그러고도 네가 협회의 간부인가?”
“죄송합니다, 리처드 경.”
일천이나 되는 황군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아직 기회는 많다.”
* * *
카시야스가 일천의 황군을 이끌고 나타났다. 오직 황제를 안전하게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처음의 약속 장소보다 더욱 깊숙한 곳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군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산악 공작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아직 벨피앙 영지군 전체에 완전히 퍼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저항이 있었지만, 그의 광신에 가까운 충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황제 폐하! 벨피앙 공작령의 경계까지 안전하게 모시겠나이다!”
카이야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산악 공작의 죽음을 접하지 못한 벨피앙 영지군이 추격해 올 확률이 높았지만, 그는 부상을 입은 황제와 그의 지친 일행들을 필리어스 제국군이 주둔한 곳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갈 자신이 있었다.
“잘 부탁한다, 카시야스 경.”
“단언컨대, 황제 폐하의 앞길을 막는 이들이 있다면 황군이 섬멸할 것입니다!”
레이먼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카시야스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격려했다. 황제의 응원을 받은 카시야스는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앞으로 달려가 황군을 지휘했다.
황군이 길을 열었다. 감히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이들은 없었다. 중간에 이천의 벨피앙 영지군과 조우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산악 공작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인지 중심도시 방향으로 바쁘게 이동 중이었다.
“벌써 소식이 퍼졌나 보군.”
중심도시 방향으로 깃발을 펄럭이며 이동 중인 벨피앙 영지군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먼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세계관에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마법 통신이 존재한다. 연락용 수정구를 다룰 수 있는 최상급 마법사를 보유한 부대가 먼저 소식을 접했을 것이고, 그들이 가까운 다른 부대로 전령을 보내 산악 공작의 죽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다.
“카시야스 경.”
“예, 황제 폐하.”
“속도를 올려라. 최대한 빨리 지휘부와 합류해야 한다.”
레이먼의 노력 덕분에 데시아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군의 이동 속도를 올려도 될 정도였다.
황군이 이동 속도를 올리고 레이먼이 데시아를 보살피는 동안, 로열 가드의 고위 마법사 블리자드 후작은 휴대하고 있던 연락용 수정구를 사용하여 되니츠 백작에게 마법 통신을 연결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북부 중앙군의 기마대 넷을 마중 보낼 테니, 그들과 합류하여 귀환하세요. 벨피앙 영지군은 지금 혼란 상태이니, 3천이 넘는 군세를 갖춘다면 주력군과 조우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선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되니츠 백작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전선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전선에 배치된 벨피앙 영지군은 당연히 최상급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 중심도시의 영주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법 통신을 전달받았다.
벨피앙 공작 가문과 그 영지의 구심점이나 다를 바 없는 산악 공작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혼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귀족들과 기사들과도 같은 지휘관들에게만 전해진 소식이었지만, 되니츠 백작의 정보 공작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급 장교들은 물론이고 일반 병사들까지 모두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혼란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기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제나 ‘변수’라는 건 존재하니까요.
“로열 가드와 황군이 황제 폐하를 안전하게 모실 것입니다.”
블리자드 후작의 목소리가 다소 날카로워졌다. 되니츠 백작의 말투에서 로열 가드와 황군에 대한 미약한 불신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연회장 습격과 피의 장례식 때문에 로열 가드의 호위 능력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는 귀족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무리도 아니었다.
-후작과 로열 가드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변수에 주의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연락용 수정구에서 되니츠 백작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처세술은 나쁘지 않았다.
블리자드 후작은 금방 마음을 정돈했다. 지금처럼 위급한 상황에서의 언쟁은 불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로열 가드가 지휘부까지 황제 폐하를 안전하게 모실 것입니다.”
블리자드 후작이 확언했다.
-필리어스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고대의 유물이자 결전 병기인 거신병을 다룰 수 있는 필리어스 황족이 피의 장례식에서 레이먼을 제외하고서 몰살을 당했으니, 현 황제인 그가 목숨을 잃는다면 이제야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태동하는 필리어스 제국의 미래는 단숨에 증발하게 된다.
되니츠 백작은 본래 산악 공작을 모시던 귀족이었으나, 필리어스 제국민이기도 했다. 그는 결코 이런 결말을 바라지 않았다.
“단언컨대, 벨피앙 영지군은 황가의 방패를 꿰뚫지 못할 겁니다.”
-믿겠습니다. 블리자드 후작.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종료되면서 연락용 수정구가 빛을 잃었다.
블리자드 후작은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으면서 다시 한번 의지를 정돈하며 백작급의 로열 가드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 중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동면에서 깨어난 알폰스 백작과도 같은 경우도 있었다.
“산악 공작이 사망했으나, 이 소식은 아직 벨피앙 영지군 전체에 전파되지 않았다. 지휘부에 도착하기 전에 교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할 것이다.”
블리자드 후작은 결연하게 말했지만, 예상과 달리 벨피앙 전선의 필리어스 제국군 지휘부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산악 공작 휘하의 영지군과의 교전은 없었다.
“황제 폐하의 깃발이 보입니다!”
외곽에서 경계 임무에 임하고 있던 기사가 마나를 담아 외쳤다. 지휘부 진지에서 대기하던 고위급 인사들이 일제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황제가 오고 있다는 걸 마법 통신으로 전달받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인근에 도착했을 때 되니츠 백작이 제국군을 보내 주변의 안전을 확보했다고는 하지만 귀족들은 안심하지 못한 모양이다.
“황제 폐하께서 고위 기사인 산악 공작의 목을 직접 치셨다지?”
“고위 마법사인 리카도 엔슬 또한 전사했다고 하네.”
“그뿐인가? 지엄한 그분께서는 이미 고위 마검사의 경지에 오르셨다는 정보가 있다네.”
기사들과 함께 진지 밖으로 마중 나온 귀족들이 긴장감을 내려놓기 위해 수다를 떨었다.
그들이 얻었다고 하는 정보는 대부분 되니츠 백작이 레이먼으로부터 허락을 맡고 의도적으로 푼 것들이었다.
믿기 힘들 정도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거짓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 고위 기사인 산악 공작을 꺾었다는 말입니까?”
비슷한 작위의 다른 귀족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묻는 이는 라티엘 백작령에서 가장 최근 전선에 합류한 디크 자작이었다.
그는 라티엘 백작 산하 귀족이면서 군부에서도 1황자의 가장 큰 지지세력이었던 기사 여단 소속의 상급 기사였다.
“아, 디크 자작! 자네는 이번에 합류해서 모를 테지.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말일세.”
자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늙은 귀족은 디크 자작을 붙잡고서 그동안 황제가 북부에서 보여준 활약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다림은 길었고 설명조차 요약 과정이 상당히 생략되어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황제의 무용담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을 때 디크 자작의 눈동자는 그 무엇보다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자작께서 설명해 주신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 또한 황제 폐하의 위대함을 다시 말할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네.”
늙은 자작이 소리 내어 껄껄껄 웃었다. 디크 자작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자신의 부관을 찾았다.
“부관.”
“예, 자작 각하. 하명하십시오.”
붉은 제복을 입은 차가운 인상의 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디크 자작은 두 눈을 반짝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여단장님께 급히 전할 소식이 있으니, 통신 마법이 사용 가능한 마법사를 찾아라.”
“존명.”
디크 자작의 명을 받은 기사가 고개를 숙이고는 진지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드디어 기사 여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