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변화 (2)
황실 기사단장, 그리웰 폰 라이들러는 예행식의 경계를 서면서도 틈틈이 발렌티아 공작을 훔쳐보기 바빴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어색하게 경례를 한 것도 벌써 두 번.
‘빌어먹을.’
티가 나서는 안 되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일의 가장 큰 변수는 저자다. 저자가 움직이기 전에 티넬을 제외한 황족들을 모두 처리해야 해.’
불안감이 들 때마다 품 안에 든 3개의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감각으로도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구슬. 심지어 악마추종자나 위험한 아티팩트에 반응하는 황실 결계에도 감지되지 않은 것들.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이 거사의 핵심이었다.
– 마나를 주입해 깨우면 6서클급 파괴자가 소환될 거요. 그분이 특별히 애를 써서 만들어 낸 특등품이지.
– 계획대로 결계가 마기 대신 황족들의 마나를 억제하도록 변형되면, 우리가 먼저 거사를 시작하겠소. 그때 파괴자의 구슬을 검제에게 던지시오. 결계의 방해가 없어진 이상, 놈들이 초인을 잠시나마 막아 줄 거요.
– 어차피 예행식이니, 아예 발렌티아 공작을 잠시 다른 곳으로 유인한 뒤에 녀석들을 풀어놓는 것도 좋을 듯하오. 그사이 당신들은 우리가 심어 놓은 이들과 함께 살아남은 황족들을 죽이기만 하면 될 거요.
– 거사의 신호? 흐,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요.
조금 불안한 것이 있다면 거사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그놈들이 ‘심어 놓은 이’들이 누군지 그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신호가 안 오면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럼 절호의 기회는 사라지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는 있을 테니까.
‘카르티아가 결계를 변형시켰다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말이지.’
그리고 예정대로만 진행된다면, 놈들의 계획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파괴자’의 힘은 그도 한번 시험해 보았다. 그러니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이놈들을 발렌티아 공작에게 쓰지 않고 대전 한가운데에 풀어놓는다면.
‘놈들이 준비한 다른 수작이 뭐건, 이것만으로도 황족들 대다수가 순식간에 죽어 나갈 거야.’
황태자를 비롯한 직계 황족이라 해도 6서클급 괴물을 막을 힘은 없다.
그리고 정작 그것을 막아야 할 황실 기사단은.
‘내가 통제하고 있으니까.’
조직이 심어 놓은 이들이 누군지 모른다는 사소한 걱정 정도야 떨칠 수 있었다.
‘발렌티아 공작만 잘 견제하면 돼.’
멀쩡한 황궁 결계 속에서도 70~80%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오러유저. 그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놈들은 자신이 황족들을 공격해도 아무도 신경 못 쓸 정도로 대혼란이 일어날 거라 말했지만.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야 없지. 최대한 빨리 황족들을 처리하고 도망친다.’
그리고 살아남기만 한다면, 5황자 티넬을 제외하고 황제를 비롯한 모든 황족이 죽는다면…….
결국 자신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황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될 테니까.
‘카르티아가 결계를 조정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곧…….’
그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부단장에게 신호를 보냈다.
발렌티아 공작을 잠시 밖으로 유인하라는 의미.
본식이라면 정말 긴급한 사안이 아닌 이상 자리를 지키려 하겠지만, 예행식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보안을 들먹이면 움직일 것이다.
만약 그가 계획대로 식장 밖으로 나가 주기만 한다면, 뒷일은 훨씬 쉬워지리라.
‘제발 좀 밖으로 꺼져라, 위대하신 검제 나리.’
그리웰이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공작과 그에게 다가가는 부단장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때.
그의 눈에, 갑자기 뛰어 들어온 발렌티아가의 쌍둥이가 보였다.
‘응?’
* * *
아무리 본식이 아닌 예행식이라 한들 모이는 이들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황족들의 자리에는 무료한 시간을 버티게 도와줄 각종 다과와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물경 10년을 근무한 시종 론은 까마득한 후배들이나 할 법한 음식 준비를 실로 오랜만에 직접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오늘 이후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자신의 가족들이 모두 맞아 죽었음에도 고작 은화 몇 개 던져 주는 걸로 무마하려 들었던 귀족들에게 직접 불벼락을 내릴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 억울하지 않나?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데.
10년 전, 자신에게 몰락 귀족의 가짜 신분을 주고 황궁의 시종으로 들여보낸 조직.
그 조직의 거사가 바로 오늘 일어난다. 그리고 그 거사는 자신의 손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 X 같은 신분제……!’
이 불합리한 사회의 정점에 있는 제국의 황족들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10년간의 인내도 오늘로 끝이다!’
그 생각만 하면 고된 일에도 피곤하긴커녕 웃음만 나왔다.
론은 테이블마다 놓인 형형색색의 ‘구슬’을 최대한 예쁘게 장식하기 위해 애썼다.
이 위대한 대업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 조직에서 심혈을 기울여 특별 제작한 강력한 무기, 폭뢰.
한 테이블당 일곱 개의 폭뢰를 장식품으로 위장해 올려놓았으니, 잠시 후 이 안에 있는 황족들은 몰살당할 것이다.
그렇게 그가 흐릿하게 웃는데.
“거기, 너. 이게 뭐지?”
황족 중 하나가 예쁘장하게 위장된 폭뢰를 가리키며 물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지만, 론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하하. 요즘 귀족 사회에서 최신 유행하는 글로리아스라는 장식품입니다. 보시는 대로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지요.”
물론 조금 있으면 다 똑같이 붉게 달아오를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 유행이라…….”
다행히 그 황족은 흥미로운 눈길로 폭뢰를 주시할 뿐, 더 이상 그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한심한 것들.’
유행에만 관심을 보이는 저놈의 눈빛이 부패한 귀족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 준다.
하는 일 없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짠 결과로 놀고먹기만 하는 놈들.
아마 저 게을러터진 돼지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대륙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아스란의 황궁에서 곧 벌어질 일들을.
‘이제 곧…….’
론은 눈짓으로 자신처럼 잠입한 다른 두 명의 협력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100여 명의 시종 중 고작 세 자리를 차지하는 데 그친 것은 황궁의 신분 검열이 그만큼 엄격했다는 증거지만 상관없었다. ‘장식품’ 담당은 그 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배신자가 나올 리도 없고.’
그들 외에도 조직에서 심어 놓은 이들이 먼저 일을 벌인다고 했다.
같은 일을 맡은 자들 외에 다른 방수는 모르는 상황.
허튼짓을 하다 아군의 눈에 띄었다간 죽을 테니까.
‘드디어 복수의 때가 온다.’
론이 또다시 남몰래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는데.
– 트렌 폰 발렌티아, 글렌 폰 발렌티아 공자 입궁하셨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손님이 또 있었다.
‘이런…….’
거사가 벌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 한가운데서 새로운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게 생겼다.
미소 짓던 론의 얼굴이 점차 차갑게 굳어 가고, 그의 손끝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 * *
‘흠, 카르티아 황비야 안 올 테지만…….’
황태자, 브레들리 반 아스란은 식장의 면면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황비는 내일 본식에서 황제와 함께 오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오늘은 참석하지 않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웰과 황실 기사단만으로 반란을 일으킨다고?’
그들의 배후에 악마추종자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놈들은 황실의 결계가 흐트러지지 않는 한 궁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다. 황실의 마법진은 성물보다 확실하게 악마추종자들을 걸러 내니까.
그리고 놈들의 수작으로 결계가 흐트러진다 해도, 발렌티아 기사들이 있는 한 외부의 침입자들이 이 안에 발을 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터였다.
‘발렌티아 기사단을 괜히 불렀나? 공작에게만 몰래 말을 전하는 게 최선이었을까?’
이렇게 되면 놈들이 일을 벌이지 않을 수도 있다. 괜히 안전함을 추구하다가 적의 꼬리를 잡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아니지. 아바마마만 변을 당하고, 여기서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지.’
하지만 악마추종자들은 이곳의 일을 신호로 황제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차라리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것이 나을지도…….
‘아비의 죽음을 바라는 주제에 다른 변고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 나라는 놈도 참 졸렬하구나.’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얼굴 좀 펴시지요. 남들이 봅니다.”
“음?”
고개를 돌리자 자신과 같은, 하지만 걱정이 가득한 황금안이 보였다.
“로트…….”
“왜 그렇게 생각이 많으십니까? 황제의 홀을 받게 되는 본식은 내일이고, 오늘은 그저 예행식일 뿐인데요.”
손아래 동생의 말에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홀, 그것을 넘겨받는 것의 의미 따위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안하구나, 로트…….’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곧 숙청될 카르티아 황비는 이 녀석의 친모.
이리도 자신을 잘 따르는 녀석이 호의를 보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쓴웃음이 나오는데, 옆에서 들려온 다른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결혼식보다는 다른 곳에 마음이 가 있는 것 같은데? 예를 들면 황제의 자리라거나.”
“누님!!”
로트가 나무라듯 소리를 질렀지만, 1황녀인 주니퍼 반 아스란은 태연히 대꾸할 뿐이었다.
“뭐, 내가 틀린 말을 했느냐? 황제의 홀을 받으면 이제 남은 것은 대관식뿐일 터인데. 나도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그러자 그 사이로 또 귀에 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호오? 형님 전하가 황제가 되면, 누님은 황제의 누이가 되는 겁니다. 그럼 시집가기가 더 힘들어지실 텐데?”
1황녀의 미간이 찌푸려지게 만든 주인공, 3황자 요르단 반 아스란이 그 거대한 체격과 사나운 인상을 드러내며 웃었다.
“뭐, 형님을 경계하시는 아바마마께서 황제 자리를 그리 순순히 넘기실지는 두고 봐야겠습니다만.”
씨익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꼴을 보아하니, 녀석은 여전히 주제에 맞지 않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2황비 소생인 로트와는 달리 요르단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황후의 소생이니, 자신이 지위를 잃으면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하나 본데…….
‘어리석은 동생아, 아바마마는 내가 싫어서 경계하시는 게 아니라 그저 황제의 자리를 놓기 싫으신 거란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데다가 욕심이 너무 많아서 배다른 동생인 로트보다 오히려 멀리하게 되는 친동생.
브레들리가 요르단의 말에 굳이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 피식 웃고 말았는데, 그때 누님이 끼어들었다.
“요르단, 이 멍청한 녀석아. 아무리 아바마마라도 황실의 법도를 어길 수는 없다. 귀족들이 모두 들고일어나면 황실도 버틸 수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누님은 항상 이랬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사람.
늘 그날이 오길 기다린다고 말하는데, 그게 어째 자신이 황제가 되는 날을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무슨 생각일까 궁금했지만, 누님의 성격상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을 터.
그는 작은 한숨과 함께 형제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러자.
“형님, 혹시 결혼이 싫으시나요?”
자신의 허리께에 키가 닿는 막내가 불쑥 물었다.
테이블에 놓인 주먹만 한 구슬만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하던 녀석이 갑자기 그렇게 물어 오니,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티넬…….”
티넬 반 아스란. 직계 형제 중에서는 드물게 황금안을 타고나지 못한 아이. 그래서 항상 기가 죽어 있는 아이.
적어도 이 아이만큼은 냉정하게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
“그런데 표정이 너무 좋지 않으셔서…….”
“어른이 되니 이런저런 생각할 게 많아져서 그렇단다.”
“헤헤, 그렇군요. 아무튼 형님, 결혼 축하드려요. 내일은 제가 발언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고맙구나, 티넬.”
눈을 맞추며 인사를 전하자 녀석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이 아이도 오늘 이후에는 나를 원망하게 되겠지.’
그 생각에 씁쓸해졌지만, 적어도 마지막까지는 미소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
– 뎅!
청아한 종소리와 함께 대주교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 다들 자리로 돌아갑시다. 내일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오늘의 재앙을 실패 없이 막아 내기 위해서라도.
‘믿겠습니다, 공작. 아니, 장인어른.’
브레들리는 멀리서 표정을 굳히는 공작과 눈을 잠시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에 안색이 더욱 굳어지는 공작의 모습을 보니, 아직 장내에서 특별히 수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황궁 깊숙한 곳에서도 역시나 소란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아바마마께도 아무 일이 없는 듯했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롭게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게…….’
막상 이 지경에 이르러 흔들리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는 그때.
– 자, 잠시만!
– 트렌 폰 발렌티아, 글렌 폰 발렌티아 공자 입궁하셨습니다!
잠시 식의 진행을 방해하는 목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람들이 뛰어 들어와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이내.
‘그 정령?’
발렌티아의 쌍둥이가 내민 손바닥 위 작은 강아지를 보는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타이니 경이 벌써?’
평화롭게 일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