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예행식
떨어져 있는 주인과 최대치로 동기화된 월랑이 빠르게 검제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부족한 부분은 글렌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으니 정보는 빠짐없이 전달되었고, 그것을 전해 들은 검제의 눈은 거의 두 배로 커졌다.
다만.
“마나를 품지 않은 소모성 아티팩트? 그게 말이 되느냐? 그것도 위력이…….”
작게 속삭이는 공작의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서려 있었다.
기존의 상식을 붕괴시키는 듯한 그 이야기는 그 역시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았다.
그래서 월랑이 다시 한번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내가 겪었음. 죽을 뻔.]그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안색을 굳힌 검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는 다급히 대전 전체를 훑어보았다.
“젠장, 검은 구슬이라니? 그걸 여기서 어떻게 찾는단 말이냐! 방법은 생각해 뒀겠지, 타이니?”
검제의 시선이 다시 글렌의 손바닥 위, 작은 강아지에게 향했다.
대전 곳곳의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만 봐도 빛나는 수정 구슬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결혼식을 위해 마련된 단상과 그 주변에도 둥근 구슬들이 잔뜩 장식되어 있었다.
그 순간 검제를 따라 시선을 돌리던 강아지가 멈칫하고, 녀석과 링크하고 있던 타이니는 당황한 듯 두 눈을 또르르 굴리기만 했다.
‘검은 구슬이…… 없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려 황태자의 결혼식인데 칙칙한 검은 구슬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을 리는 없으니까.
분명히 위장이 되어 있을 텐데…….
‘빌어먹을. 생각 못 했어!’
이 순간만큼은 자기를 돌대가리라고 말하던 검제의 비난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방법이 없는 거냐?”
“깽.”
마치 씹어 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공작의 모습에 월랑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때, 생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기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황실 기사단 부단장의 지위를 가진 중년의 기사.
황실의 은근한 기사 무시 정책에 따른 실력 저하를 증명하듯,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씩이나 되어서 고작 블레이더급밖에 되지 않는 자였다.
외부에서야 강한 축에 들지도 모르지만, 검제에게는 이름조차 기억에 남지 않은 자가 감히 공작가 부자의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거기다.
“궁의 외부 경계 태세에 대해 건의를 드릴 점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좀 내어 주실 수 있을까요?”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공작은 피식 웃으며 멀리 서 있는 황실 기사단장 그리웰을 쳐다보았다.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는 놈.
하지만 이미 황태자가 반역자로 못 박은 놈들의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내 기사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이제 곧 예행연습이 시작될 테니 자리로 돌아가라.”
“그, 그래도 혹시나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황태자 전하께서…….”
“너희들을 탓하시겠지. 그러니 그렇게 신경 쓰인다면 네놈들이 나가 보도록.”
냉기가 풀풀 풍기는 거절에 부단장의 안색이 시꺼멓게 죽었다.
간절한 눈으로 뒤쪽의 단장을 바라봤지만, 이미 검제의 눈길을 의식해 돌아선 그리웰은 그가 처한 상황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정면을 보면 아예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대전을 살피는 검제가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까득.
‘기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지금 황실은 뒤집혀야 한다.’
부단장 역시 이 거사에 운명을 건바, 그는 발렌티아 공작의 존재가 이 거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 그는 작정한 듯 한 손에 마나를 잔뜩 실어 그대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빠아아악.
“꺽! 가, 각하 갑자기 왜……?”
피를 토하며 쓰러진 부단장의 입가에는 치아까지 몇 개 튀어나와 있었다.
억울한 눈으로 검제를 응시하는 연기는 덤.
검제를 비롯한 공작가의 직계들과 강아지 한 마리까지, 모두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왜 이러십니까! 각하!”
또 한 번의 고함으로 대전의 시선을 모으는 데엔 완벽하게 성공했다.
“뭐야?”
“발렌티아 공작?”
“황실 기사단이랑 무슨 일이야?”
“왜?”
황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
“하, 이 미친놈들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검제가 살벌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초인의 분노는 황실 결계의 마나 동결을 뚫고 주변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각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체통을 지키시지요, 각하.”
“경사스러운 날을 앞두시고 왜…….”
그 즉시 주변의 황실 기사단원들이 모여들었다.
‘하, 이것들이 전부 한통속이라…….’
황실 기사단의 조장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이 그를 걱정하는 척하며 오히려 공작의 울화에 불을 지피는 순간.
“……잠시 식을 연기하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공작님?”
단상 위의 대주교까지 이곳을 주목하자, 이 식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가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공작.”
“부단장이 갑자기 자해를 하며 쓰러지더군요. 그러더니 제가 자신을 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더니, 공작의 차가운 미소가 황실 기사단원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저희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각하께서 부단장님께 무례하다며…….”
“기사의 명예를 걸겠습니다!”
황실 기사단의 조장들, 수위 기사들은 일제히 부단장을 감쌌고.
“제, 제가 무례를 범한 탓에 각하께서 진노하신 겁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부단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누가 봐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황태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내가 못 미더워도 당장은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다. 공작과 나를 내보내겠지.’
경사스러운 날을 불과 하루 앞둔 상황, 이런 트러블이 있다면 당사자들끼리 풀도록 중재하는 게 당연하다.
부단장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벌해 달라니 해 줘야지. 황실 기사단 부단장, 에스트로웰 경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 근신하라. 추후 진상 조사 뒤 책임을 묻겠다.”
황태자의 결단은 그의 예상과는 한참 달랐다.
“전하!?”
“전하, 어찌 그리…….”
“하오면…….”
황실 기사단원들은 억울한 눈으로 공작을 향해 넌지시 눈짓을 했다.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처벌을 하려면 트러블의 다른 당사자도 해야 하지 않냐는 의미의 제스처.
하지만 황태자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조금 전 부단장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나? 에스트로웰 경은 내 명을 따르고, 기사들은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라.”
그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기사들.
그중에서도 고개를 숙인 부단장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만사 공정하다 알려진 황태자가……? 뭔가 잘못됐다.’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슬쩍 옆을 돌아보자, 단장이 어느새 그의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역시나 당황한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단장이 한쪽 무릎을 꿇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전하! 어찌 경사스러운 날을 앞두고 한쪽 편만 벌하시옵니까! 전하께서도 저희 황실 기사들을 차별하시는 겁니까!?”
논리를 따지는 것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울림.
그에 경비를 서던 황실 기사단 정예들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같은 아픔을 공유한 동지들의 분노.
그럼에도 황태자는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경사스러운 날의 주인공으로서 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만스럽다면, 황실 기사단은 아예 식장에서 나가도 좋다.”
그 말에 대전의 모두가 들으라는 듯 고함을 지르던 그리웰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렸다.
일순간 부단장과 마주치는 그의 시선.
– 황태자가 무언가 알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눈빛만으로도 순식간에 공감이 이루어지는데.
– 포기합시다, 이렇게 되면 거사는 글렀소.
고개를 젓는 부단장과는 달리 그리웰은 쉽게 물러설 수가 없었다.
부단장이야 미수로 그치면 걸릴 것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신이 악마추종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황태자가 안다면 지금 상황이 어찌 풀리건 그는 처형일 테니까.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작정한 듯 그리웰의 손이 품 안으로 들어가는데.
“흠, 지나치게 소란스럽군요. 제가 건의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황태자 전하?”
단상 위에 있던 대주교가 목소리를 높이며 장내의 시선을 모았다.
“말씀하십시오, 대주교.”
“황제 폐하와 교황 성하의 권한을 일시적으로 이양받은 제가 권유드리겠습니다. 두 분 다 흥분하신 듯하니, 당사자분들을 궁 밖에서 잠시 쉬시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미 예정된 식의 시작 시간이 꽤 지체되었습니다.”
푸근한 미소를 지은 대주교의 말에 당사자들의 희비가 엇갈리던 그때.
그 소동에 이목이 쏠린 틈을 타, 검제의 손바닥에서 벗어난 작은 은빛 강아지가 대전을 정신없이 누비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보는 눈이 많은 만큼 황궁의 대리석 바닥을 갈아엎고 대량의 폭뢰를 매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예행식을 준비하면서 대전에 반입된 물건 중에 있을 것이다.
특히나 구슬 모양의 물건 말이다.
콰직.
– 컹.
‘이건 아니고…….’
구별할 방법이 없으니 구슬 모양의 장식을 하나하나 다 깨 보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전부 깨트릴 시간은 없으니 종류별로 하나씩만.
그 폭뢰라는 것이 어떤 원리로 그런 파괴력을 내는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나름대로 믿는 구석은 있었다.
‘그 매캐한 냄새는 기억하고 있어.’
문제라면, 대전 안에 있는 구슬 장식만 해도 백수십 가지는 되는 것 같았으니.
‘젠장, 이런 식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황족들이 사치에 정신이 나간 건지, 아니면 악마추종자 놈들이 작정하고 숨긴 건지. 사방에 가득한 구슬 장식들을 보니 답답해서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 줘, 영감.’
흘깃 검제를 보며 월랑과 동기화한 몸을 열심히 움직이는데,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구석진 곳의 장식들부터 확인하던 중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카리나에서의 경험상…….
‘궁 전체를 날릴 생각이라면 한두 개로는 모자랄 텐데? 그 많은 걸 숨겼다면 진작 하나라도 나왔어야 해.’
크레임 궁 전체를 날려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만 노린다는 뜻.
‘사람을 죽이고자 한다면 그 사람 근처에 숨겨 둘 텐데?’
이런 X신 같은!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이.’
그 생각이 들자마자 달라진 시야가 빠르게 해답을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천장의 샹들리에에 달린 구슬 장식. 다음으론 황족들의 테이블 위에 놓인 쟁반의 구슬 장식과 그들의 의자에 박혀 있는 수정구.
의심 가는 건 이 세 가지였다.
마법으로 대전 곳곳에 빛을 반사하는 투명한 샹들리에 장식은 속이 다 비치니 가능성이 작다.
그렇다면…….
‘의자의 등받이 양쪽에 박힌 수정구 혹은 쟁반에 장식된 구슬이야.’
혹시 그것조차 아니라면……이라는 가능성은 떠올리지 않았다. 선택지를 늘리기엔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기껏 추론한 사실을 검제에게 알리려 하는데.
“……대주교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공작, 잠시 궁 밖에서 화를 식히시지요.”
똥 씹은 표정으로 대주교에게 대꾸하는 황태자의 말에 대전을 엎어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검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황태자가 뭐라 귓속말을 하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이를 갈며 자리를 떠 버렸다.
성질난 척하며 자기 아들들을 잡아끌고 나가는 것을 보니 확실히 위기 상황을 인식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왜 나가!? 이 상황에!?’
결계가 멀쩡한 상황에서 일이 벌어진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와 초인인 검제뿐이다.
‘대주교가 뭐라 하든 진상을 부려서라도 남았어야지, 영감! 뭐 하는 짓이야!!? 이제 와서 자기 자식들만 지키면 땡이야?’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검제와 눈이 마주쳤다.
– 믿는다.
그 뜻은 전해졌지만, 행동의 의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왜 나가냐고!!’
대체 황태자가 뭐라고 한 거야!?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타이니는 속이 타들어 갈 뿐이었다.
결국.
‘어쩔 수 없지.’
타이니는 월랑의 몸을 통해 감각을 최대한 증폭시켰다.
강아지의 모습으로 황족들 근처에서 일일이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
‘한 번에 처리한다.’
모두를 놀라게 했던 타이니의 초월적 마나 감응력이, 결계의 영향으로 동결된 마나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조금씩 그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뭐지, 어디서 바람이?”
“창문이 열렸나?”
“시종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하네.”
“내버려 둬, 무슨 마법 효과인가 보지.”
장내의 변화를 느낀 황족들이 하나둘씩 눈살을 찌푸리는데.
타이니는 얼마 전 터득한 영혼의 힘으로 자신의 마나를 의심이 가는 구슬들에 조금씩 붙여서 연결하고 있었다.
허공에 흩어 놓은 마나를 이용하여 한 번에 넓은 범위를 휩쓰는 그의 기술, 폭풍 휘두르기의 원리를 영혼의 힘으로 응용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마나의 줄기가 월랑의 자그마한 몸에서 희미하게 뻗어 나가 황족들의 의자와 테이블에 있는 구슬들에 달라붙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한 번에 처리하려면 되도록 많은 구슬을 연결해야 했다.
하지만 월랑과 동기화한 상태에서 황실 결계를 뚫고 마나를 연결하는 것은 그에게도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자, 본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등을 꺼 주세요.”
대주교의 말에 따라 천장 곳곳에 매달린 샹들리에에서 빛이 사라지고, 대전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귀빈들의 축복하는 마음을 담아, 각 자리에 조용한 빛을 띄우겠습니다.”
그 이어진 말과 함께, 테이블 뒤에 서 있던 시종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일제히 움직였다.
초에 불을 붙이는 작은 아티팩트를 테이블 위의 구슬에 갖다 대기 시작한 것이다.
“오오.”
“아름답군…….”
테이블마다 자리한 일곱 개의 구슬이 은은한 붉은색으로 빛나며 어둠을 밝히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석양처럼 빛나는 옅은 붉은색의 조명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자신이 연결한 마나를 통해 그 구슬 내부의 변화를 느끼고 있던 강아지 한 마리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리고 그런 상황을 모르는 듯, 대주교는 여유로운 음성으로 진행을 이어 갔다.
“자,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 황태자비 클로이 폰 발렌티아 양께서 들어오십니다!”
대주교의 외침과 함께 대전의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