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수습(?)
“……사람 맞냐?”
짤막하게 튀어나온 욕 같은 감탄사.
그에 쓴웃음을 지은 타이니가 한숨을 내쉬며 훌쩍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신체가 약하고 가벼워진 탓에 한순간 박탈감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금방 복구가 가능한 것들이라 크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오히려.
‘저놈 덕분에 불 속성, 번개 속성 마법에 대한 저항력은 크게 올랐다. 따지고 보면 이득이지.’
염체가 가진 적응력, 아니 진화력이라 불러야 마땅한 힘이 또 하나의 특성을 추가한 것이다.
죽음 끝에서의 회생이 단순한 회생이 아니라 발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더구나 영혼의 힘에 대한 이해도 더욱 깊어진 덕에, 월랑과의 결속이 더욱 단단해진 것이 느껴졌다.
– 컹.
그 결과 몸을 회복하는 데 쓰인 마나 중 일부가 영혼 탈진 상태였던 월랑의 피로까지 회복시켰다.
“좋군.”
뚜둑.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팔다리를 이리저리 돌려 본 타이니가 그제야 그리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리드 공.”
“……거참 인사가 빨라서 좋구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괜히 비꼬는 말이 나왔는데.
“예, 뭐 행동이 느린 것보다는 좋지요.”
뚱하니 뱉어 낸 타이니의 한 마디에는 그리드도 머쓱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라…….”
“검제 영감님은 어찌 됐습니까?”
“……쩝, 녀석은 잘 있다. 한 손 거들어 줬더니 금세 정리하더구나. 물론 그 후에 바로 탈진하긴 했지만. 그런데 말이야, 그 녀석을 공격하던 놈들…….”
“아, 그 얘기는 좀 이따가 하시죠. 일단은…….”
“뭐? 야, 인…… 흠, 타이니 경?”
순간 속된 표현을 뱉으려다가 타이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본 그리드.
전신이 속박된 채 눈만 부릅뜨고 있는 황제를 인식하고 나서야 그는 다시 품위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묵묵히 타이니의 뒤를 따랐다. 어쨌거나 여기에 온 목적은 이뤄야 했으니까.
콰드드득.
“크아악, 퉤!”
후욱. 후욱.
입을 막은 단단한 물질을 부숴 내자, 황제가 요란하게 침을 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박이 풀린 이후에도 잠시간 그리드를 노려보던 황제는 이내 옥좌에 털썩 주저앉고는 애써 턱을 치켜들었다.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오늘의 위난에 대한 보상은 황제의 이름으로 약속하겠다. 그, 그리드 공은 이만 돌아가고, 거기 자네는 이 위난이 정리될 때까지 잠시 내 곁을 지켜라.”
마치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는 듯, 타이니와 그리드가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이라 자신하는 표정.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헛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좀 전까지 죽음의 구렁텅이에 한 발을 담그고 있던 자의 태도라기에는 너무 거만했던 것이다.
‘뭐 황제라면 그럴 만하긴 하지만…….’
타이니는 이미 귀족들의 특권 의식에 넌더리가 나 있는지라 굳이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히, 그를 대신해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폐하의 배려는 감사하오나, 이미 상황은 끝났습니다.”
우아한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인 그리드의 말에 황제의 표정이 일변했다.
“끄, 끝났다고?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오며 본바 크레임 궁의 소란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변란의 주축이었던 황실 기사단도 제압됐습니다. 황궁 전역에 출몰한 마물들의 소탕 역시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오!!?”
“다만 마물의 주인과 크레임 궁에서 발렌티아 공작을 암습한 놈들의 정체가 아직은 오리무중이라…….”
그리드가 말끝을 흐리며 부러 떠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반색하던 황제의 표정은 그 말에 그대로 굳어졌다.
‘이 새끼…….’
‘확실하군.’
타이니와 그리드가 눈을 마주치며 심증을 굳힐 때, 반 박자 늦게 황제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마물의 주인 놈들이야 뻔하지. 모두 악마추종자들의 짓이겠군, 암.”
“그 외에는 모르시옵니까? 혹시 짐작 가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폐하.”
타이니의 말에 ‘어디서 건방지게’라는 뜻이 읽힐 정도로 불편한 표정을 짓던 황제는 이내 그리드의 눈치를 살짝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변란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진작 조치를 했겠지. 한데 그대는 지금 감히 나를 추궁하는 건가?”
……감히?
‘이게 목숨을 구해 준 은인한테 할 말인가?’
어이가 없었지만, 타이니로선 그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황제인 만큼 웬만하면 비위를 맞춰 주려고 했는데, 직전까지 개고생을 해서 그런지 이제는 도통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황제의 거만한 태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뭐지, 그 한숨은?”
“아…… 죄송합니다, 폐하. 걱정거리가 있어서…….”
대충 뱉어 낸 변명에 진심이 담겨 있을 리는 없었다.
황제 역시 그것을 눈치챈 듯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렇게 아스란 제국의 황제와 천민 출신의 기사가 냉전을 벌이는 가운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리드는 이내 피식 웃으며 황제를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폐하. 만수무강하시길.”
그 안에 담긴 비웃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그리드가 떠나겠다고 하자 눈에 띄게 반색을 했다.
“오, 그대. 그래, 수고 많았다. 말했듯 내 섭섭지 않게 보상은 챙겨 줄 것이야.”
그 말에 그리드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저야 발렌티아 공작의 부탁으로 참전한 것일 뿐이니, 보상은 그에게 하심이 나을 것 같습니다.”
타국인으로서 예의를 지킨, 지극히 귀족적이고 명예를 아는 기사다운 거절이었지만.
그 말이 황제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뭣이라!? 감히 네놈이 대제국의 황제를 무시하는 것이냐!?”
격전으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대전에 황제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뭐야, 돌았나?’
그 뜬금없는 폭발에 타이니는 물론이거니와 차분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그리드의 얼굴까지 일순간 굳어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황제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분노를 토해 낼 뿐이었다.
“내가 상을 내리겠다 하면 받으면 되는 거야! 감히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연합의 찌꺼기 주제에 초인이랍시고 뭐라도 되는 줄 알아!?”
– 알아아아아!?
황량해진 대전에 메아리치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고.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타이니는 속으로 쌍욕을 퍼부었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웨폰 마스터 그리드 반 셀던은 왕국 연합의 두 주축 중 하나인 셀던 왕국 국왕의 동생이자 현재 연합의 유일한 오러유저.
상대가 황제라고 한들 이런 폭언을 들을 신분이 아닌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 생각 없는 미친놈 때문에.’
타이니가 불타는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는데, 그제야 황제 역시 두 사람의 심각한 표정을 읽었는지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쟁을 우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장 자신의 안위 때문이라는 것에 타이니는 자신의 목도 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흠, 이건 좀 불쾌하군요. 본인 그리드 반 셀던, 셀던의 적자이자 고대 요정의 후예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될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리드가 그 명성답게 한 번 더 인내를 발휘하자, 황제는 얼른 태도를 바꿨다.
“하, 하하. 짐이 말이 좀 심했네, 그리드 공. 내 공의 말대로 함세. 그대의 공은 발렌……티아 공작에게 치하하도록 하겠네.”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늘어놓는 그 말은 사과라기보다 구차한 변명에 가까웠다.
그에 그리드는 냉엄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전 이만. 탈진한 친우를 보살피러 가 봐야 해서.”
그대로 돌아서서 문으로 향하던 그리드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아, 타이니 경. 난 이게 그리 좋은 선택 같진 않군.”
“예?”
“어쩌면, 자네가 말한 예전 상태가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이건’ 방해만 되지 않겠나?”
뒤돌아선 채 툭 던진 모호한 말.
그러나 타이니는 그가 말한 ‘이것’이 뭔지, 무엇에 방해가 된다는 건지 확실히 알아들었다.
솔직히 심정으로는 그 말에 동의하지만.
“……검제 각하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지금으로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런가. 뭐, 그럼 나도 그 친구를 믿어 보도록 하지.”
그 냉랭한 한마디를 끝으로 그리드는 대전을 떠났다.
동시에, 황제의 태도가 바로 바뀌었다.
“하, 연합의 망종 따위가 저리 건방지게…….”
‘이 미친놈이…….’
마음 같아서는 타이니 역시 황제를 남겨 두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 ……그래야 우리가 황궁 기사들을 학살한 명분을 챙길 수 있다!
검제의 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오, 자네. 다른 기사들이 올 때까지 내 곁을 지켜 주게. 허허, 그런데 이름이 타이니? 출신이 어디인가? 가문은? 설마 발렌티아는 아니겠지?”
하지만 더 이상 황제의 쓸데없는 말을 들어 주기는 힘들었기에 타이니는 부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발렌티아 소속입니다.”
“……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발렌티아 가문 소속, 타이니라 합니다. 세상에서는 광휘의 기사라는 과분한 이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짜증이라도 풀 겸 일부러 발렌티아를 강조하며 말했더니, 황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런데.
“이익, 바, 발렌티아……. 아, 흠, 흠. 아, 그래. 뭐 그래도 돼. 외모를 보니 혈연은 아닌 듯한데.”
이어진 황제의 반응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내 그대에게 황실 기사단장의 자리를 내려 줄 터이니 발렌티아에서 나오게. 공작의 부하보다는 제국의 기사단장이 훨씬 낫지 않겠나?”
거만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데, 정말이지 꼴 보기가 싫었다.
‘내가 왜 이놈을 살렸을까? 차라리 죽게 놔두고 황태자가 황위를 이어받게 하는 게 나았을 거 같은데.’
타이니로선 검제의 의중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런 자를 살리겠다고 들인 노력이 아까워 괜스레 속이 쓰릴 뿐이었다.
심지어 황제는 잠시도 입을 다무는 법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지? 설마, 내 제안을 거부하고 발렌티아에 남겠다는 건가? 감히?”
감히, 감히……. 그놈의 감히!
한결같이 재수 없는 태도에 연신 한숨이 새어 나올 뿐이었지만.
“……아닙니다, 폐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공작 각하께도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타이니는 적당히 수준을 맞춘 말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검제가 허락 안 했다고 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아니면 망명 갔다고 하지 뭐.’
그렇게 타이니가 황제의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어떻게 거절할지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것도 모르는 황제는 그저 함박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설마 공작이 그것을 거부할까. 자네가 내 생명을 구했으니 명분조차 완벽하고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우쭐하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재차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빨리 좀 와라, 검제 영감. 내가 속 터져 죽기 전에.’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던 그때, 황제가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그래, 자네 같은 젊은 인재가 내 곁에 있어야지 제국이 번성할 수 있는 거야. 오늘의 일을 기점으로, 제국은 다시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그에 타이니는 순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황제인데 뭔 제국을 또 손에 넣어?’
그는 제국의 황실과 귀족 사이의 세력 구도를 모르기에 황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뜻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로써 제국은 다시 강성해지고, 대륙은 제국의 이름 아래에서 통일될 것이다. 그리고 자네는 그 선두에서 모든 영광을 나와 함께할 것이야!”
옥좌에서 일어서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황제.
그 말에 타이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만, 폐하. 지금 대륙을 통일하겠다고 하셨습니까?”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지만.
“암, 자네도 사내라면 야망을 크게 가져야 할 것 아닌가. 오늘 이후 제국의 권력은 나에게 집중되고, 우리 제국은 더욱 발전하여 대륙 유일의 국가로 우뚝 설 것이야. 자네도 상상해 보게. 우리가…….”
그 뒤로도 쉼 없이 이어진 헛소리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타이니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이놈은 해충이다, 인류의 해충.’
워해머의 손잡이를 쥔 타이니의 손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