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황태자
황궁의 변란이 간신히 수습된 직후.
“……전하,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익실란이 황태자 옆에 다가서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황궁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보다 더 안 좋은 소식이 있나?”
황태자가 피식 웃으며 익실란을 바라보자 덩달아 쓴웃음을 지은 익실란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림자단에 대한 권한과 훈련소 위치, 조직 상황까지 전부 점검해 보았습니다만, 그들 중 최정예 병력은 모두 발렌티아 공작과 웨폰 마스터에게 전멸당한 것 같습니다.”
“……전부?”
“다른 임무에 차출되었다는 차기 수장 하나는 아직 복귀하지 않았고, 나머지는 ‘악몽’을 사용하지 못하는 2진급 그림자들뿐입니다.”
그 말에 황태자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좁아졌다.
‘아버지가 참 말도 안 되는 카드를 가지고 계셨어.’
악몽. 그것에 대해서는 이제 황태자도 알고 있었다.
황궁 결계의 힘을 바탕으로 고작 수십의 암살자가 오러유저를 밀어붙이게 만드는 경이적인 합격진.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면, 사실상 그림자단의 가치는 절반, 아니 그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차기 수장이라는 자가 악몽에 대해 알고 있을까? 정예를 잃은 상황에서 그걸 복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럴 것이라 기대는 하고 있습니다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 어쩔 수 없지. 그 차기 수장이라는 자가 복귀하면 다시 보고하도록.”
“저, 그게…….”
“음?”
“사실 증표를 가지고 접촉을 시도했을 때 그들이 나타나긴 했으나, 특별한 경우라 나왔을 뿐이라면서 정식 소속을 거부했습니다.”
“뭐?!”
“물론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증표를 가진 ‘정식’ 황제만이 자신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차기 수장으로 내정된 자가 돌아온다면 즉위식 이후에 따로 찾아뵙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하…….”
답답한 마음에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궁 산하의 조직 하나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이 다시금 자괴감을 키웠다.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다.’
악마추종자들의 수를 잘못 예단하고, 최악의 사태를 방관하고 말았다.
자신의 휘하 전력과 정보력만으로도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 근거 없이 낙관했고, 최후에나 마지못해 발렌티아 공작에게 알렸다. 하지만 정작 술수를 부린 악마추종자들도, 이 계획의 목표였던 아바마마도 모두 자신의 생각을 벗어난 수를 꺼내 들었다.
열심히 노력해 왔고, 또 그만한 성취를 거뒀다고 자부했지만 전부 착각이었던 것이다.
‘주변에서 떠받들어 준 것에 취했던 거야.’
이번 일로 결국 좁은 시야가 고스란히 증명된 셈이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창피하고 우스웠다.
‘이 결과는 그저 운일 뿐이야. 반성하자, 브레들리. 생각은 더 깊게, 판단은 더 신중하게.’
이를 악물며 다시금 다짐하고, 한숨을 토해 내면서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덜어 냈다.
“그나마 수습이 된다니 다행이군. 그나저나, 로트와 티넬은 여전히 그대로인가?”
“……예, 여전히 황태자 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꿈쩍도 않고 계십니다. 로트 황자님은 몰라도, 티넬 황자님은 이미 쓰러지기 직전인 상태입니다.”
“얼마나 됐지?”
“이제 12시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2황비 카르티아와 황실 기사단장 그리웰 폰 라이들러가 악마추종자와 협력했다는 혐의로 지하 감옥에 수감된 것이 딱 12시간 전이었다.
밀려오는 막막함에 황태자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어린 티넬은 몰라도, 로트 녀석은 이게 용서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로트 황자님은 여전히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극형만 면하게 해 주시면, 자신이 책임지고 어미를 유폐하고 다른 생각 못 하도록 감시하겠다고요.”
“하…….”
이제는 한숨이 나오다 못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아버지를 제거하고 자신이 제국의 황위에 앉게 되면 다시 천년을 이어 갈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자부했는데.
‘그 자리에 앉기도 전부터 골이 쑤시는군.’
그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보았지만, 그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하긴 뭘 어찌해. 반역죄를 사면한 사례가 제국 역사에 있던가?”
“하면……?”
“카르티아와 그리웰은 극형에 처한다. 이 난리를 책임질 사람은 있어야지.”
그 단호한 말에 익실란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움찔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반역의 마침표를 찍은 것은 자신과 황태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
하지만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없었던 일.
‘그래, 사사로운 욕심이면 몰라도 제국을 위한 일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변호하면서도 찜찜한 마음이 들자, 익실란은 결국 보고하기를 망설이던 사안을 꺼내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조금 면구스러운 심문 결과가 있습니다.”
“음?”
“그리웰 놈이 심문 끝에 미쳐서 한 헛소리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티넬 황자님이…… 제 핏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뭐!?”
그 말에는 황태자도 순간 체면을 잊고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봐. 놈이 정확히 뭐라고 했지!?”
“……약 15년 전부터 2황비와 부정을 저질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뭐, 뭐라?”
“티넬 황자님이 황금안이 아니라 녹안인 이유, 그리고 백금발이 아니라 금발인 이유는 전부 자신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이미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황태자의 입에서 결국 노성이 터져 나왔다.
황실 직계에 대한 보호, 달리 보면 감시도 엄정한 황궁에서 간통이라니?
더구나 태어날 때부터 혈통 감별이라는 복잡한 마법으로 핏줄을 확인하는 황실에서?!
“티넬 황자님이 태어났을 당시의 혈통 감별을 통과한 것도 로트 황자님의 피와 바꿔치기한 것이라고…… 자백했습니다.”
“……어이가 없군.”
‘아니, 아니지. 황실 직계를 보호하는 주체가 정작 황실 기사단이니까.’
기사단장인 그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 여자가 가문의 일로 선황에게 앙심을 품었다면, 일부러라도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황태자의 고개가 다시 익실란에게 돌아갔다.
“2황비는!? 뭐라고 하더냐?”
“극구 부인하였습니다만, 마법 탐지 결과는 그것이 거짓이라 나왔습니다.
“……빌어먹을.”
물론 지금 익실란이 말한 마법 탐지라는 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건드리는 마법은 여신이 정한 금기(禁忌)의 영역인 데다가, 금기 따위 무시하는 흑마법사들조차 일시적인 현혹이나 기억 삭제라면 모를까 영혼을 검열하거나 직접 조작하는 마법이 가능한 이는 극히 드물다 알려져 있었다.
즉, 지금 황실의 마법 탐지는 죄수가 심문에 답변하는 순간의 맥박 등을 측정해서 간접적으로 진위를 판단하는 방법일 뿐.
그렇다면…….
“혈통 검사를 다시 하면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리지?”
“일주일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생각은 어떨 것 같나?”
“애초에 그리웰 경이 2황비와 협력하여 반란한 동기 자체가 불분명하긴 했습니다.”
적어도 익실란은 이미 그리웰의 주장이 진실이라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 대답에 입술을 질끈 깨문 황태자가 심각한 얼굴로 잠시간 주위를 서성이더니,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 여자와 티넬의 혈통 검사는 비밀리에 다시 진행한다. 그리고 로트에게 그 사실을 알려.”
“……예?”
심복인 익실란조차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의문을 표하자, 황태자는 냉혹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로트에게 알리라고. 당장 그 쓸데없는 시위를 멈추지 않으면 검사 결과에 따라 티넬이 죽게 될 것이라고.”
그 말에 익실란의 눈이 커졌다.
황실의 피를 잇지 않은 자가 황자로서 십 년이 넘게 호사를 누렸다면, 그것이 본인의 의도가 아니라 한들 극형으로 다스리기 충분한 ‘죄’였다.
하지만 평소 동생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중에서도 특히 로트와 티넬을 아끼던 황태자의 모습을 아는 익실란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하, 왜 그렇게까지…….”
“제국을 위함이다. 지금은 로트의 힘이 필요해. 내가 진정으로 믿을 만한 자가 몇 없어.”
“하, 하오나 전하. 로트 황자님께서 폐인이 되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로트는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야. 지금 저렇게 시위하는 것도 어미를 책임지려는 것일 뿐, 티넬을 죽게 놔둘 성격은 못 된다. 또 다른 핏줄에 대한 책임감이 녀석을 일으키는 셈이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하를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익실란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채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읽었는지 황태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익실란, 그런 눈으로 볼 필요는 없다. 2황비를 처형하면 어차피 원망은 받게 되어 있다. 애초에 그 일을 방관하기로 했을 때부터 예정되었던 일이야.”
“하오나 전하…….”
“그만! 나는 녀석들의 형이기 전에 제국의 황제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
“그 대신 티넬이 설령 부정한 자식이라 하더라도 여생을 황족으로 살게 해 주겠다고 전해라. 그리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익실란이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려는데.
“……익실란.”
멍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황태자가 물러나려던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예, 전하.”
“후회하지 않는가?”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익실란은 그 물음을 듣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전하.”
대답은 단호했고, 확신이 어려 있었다.
황실 기사단의 최고 유망주로서 어린 황자의 호위 기사가 되었던 젊은 시절의 첫 만남부터, 그는 이 어린 주인이 제국의 천년 영화를 이끌어 갈 것임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익실란의 짤막한 대답에는 그 오랜 세월과 그간의 수많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것을 느낀 것일까.
“……그래.”
창밖을 보던 황태자는 그 자세 그대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 하네. 그러니 조금만 더 내게 힘을 실어 주게, 익실란.”
“물론입니다, 전하.”
“그래, 가 보게. 아, 이 변란을 수습한 공신들에 대한 보상은 며칠 내로 확실히 처리하도록 하고. 대신들을 모두 끌어모아 최대한 화려하게 준비해야 하네. 마치 이런 재앙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전하.”
“자네에게만 너무 많은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네. 하지만 당장은 조금만 더 힘써 주게.”
“아닙니다. 저에겐 영광일 뿐입니다, 전하.”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렇게 대화가 끝나는 것 같았지만, 익실란이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황태자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도 잘 있겠지?”
마치 혼잣말 같은 그 물음에 익실란은 예상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 지금으로선 복잡한 황궁보다는 가족들 곁에 있는 것이 태자비 마마께도 좋은 것 같습니다. 잘 선택하신 겁니다.”
무거운 이야기 중에 그나마 가벼운 이야기.
태자비, 발렌티아 공녀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나마 이 어린 주군이 제 나이다워 보였기에 자연스레 미소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공작가를 생각하다 보니 또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사태를 수습하느라 바쁘기에 하지 못했던, 정확히는 자신의 사견에 불과하기에 생략했던 보고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애송이…… 아니, 이제는 진짜 기사가 되어 있었지.’
그 이야기가 어쩌면 지금의 주군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익실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음?”
“전하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선황은 누가 봐도 제국의 암 덩어리였으니까요.”
“그거야…….”
정혼자의 일을 물어보느라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던 황태자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비단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음?”
“그날 제가 손을 쓰지 않았더라도 선황은 죽었을지 모릅니다. 전하의 사람이 아니라도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
황태자가 의문을 표하자 익실란은 그날 자신이 보았던 워해머를 든 기사의 모습을 설명했다.
울분에 차서 불끈 쥔 손, 멀리서도 살벌하게 느껴지던 살기.
자신이 조금만 늦었다면 틀림없이 황제의 머리 위로 떨어졌을 그 둔중한 무기의 주인을.
“그림자의 증표만 아니었으면 차라리 그렇게 되도록 놔두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발렌티아 공작가도 더 확실하게 견제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는 조금씩 상기되는 주군의 표정을 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황태자가 물었다.
“……그 어린 천재가 정말 그리했던가?”
“예, 틀림없습니다.”
“하, 그 친구 정말……. 새삼 마음에 드는군.”
마음의 부담을 확연히 덜어 낸 듯한 황태자의 모습에 익실란이 내심 흐뭇함을 느낄 때.
“아무래도 그냥 보상 정도로는 안 되겠는걸?”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변란 후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사흘 뒤.
임시 황제가 된 황태자의 명으로, ‘크레임 궁 변란’ 사건의 정리를 위한 대전 회의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