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오크족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암실 전체에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이은 실패로 조직의 사기가 저하된 지금, ‘대법’을 위해 자리를 비운 수장 대신 상석에 앉은 자가 그 사기를 바닥까지 떨어트리는 말을 꺼낸 것이다.
“상황이 이럴수록 저희는 더욱 힘을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렇게 한 발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물러서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대법을 완성하고 돌아오시는 날, 저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만 있었다고 하면 과연 좋아하시겠습니까!?”
말실수 하나로 목이 날아가기도 하는 조직의 생리에서 이례적으로 날 선 반론들이 튀어나왔다.
잇따른 실패가 모두의 마음에 다급함을 심은 탓이었는데, 그럼에도 상석의 그림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엘븐하임에서 가장 확실한 비수가 되어야 했을 일레인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잊었느냐?”
하지만 그럼에도 원탁의 그림자들은 여전히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 그는 철저히 가명을 썼고 그의 시체도 이미 사라졌습니다. 신전의 보고에도 엘븐하임에서는 흑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그저 낭설로 치부하고 있는 마당에, 그 하나 없어졌다고 계획을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완성된 폭뢰가 있습니다. 충분히 일레인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단순히 일레인의 부재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광휘의 기사라 불리는 타이니 모르스, 그놈이다.”
“……그거야.”
“으음…….”
상석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확고한 어조로 꺼낸 말에 원탁이 침묵에 잠겼다.
“아스란 황실의 발표만 봐도, 놈이 단순히 용의 눈에 소속된 조직원이 아님은 알 수 있다. 우리의 그 착각이 이번 실패에 한몫한 셈이지.”
“그럼 대체 그놈은 어떻게……?”
“그래서 더 문제라는 거야. 대체 놈은 어떻게 우리의 일에 대해 알았을까? 심지어 용의 눈의 간자를 걸러 내고 계획도 바꿨는데?”
그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이내.
“아직 우리 중에 간자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미처 걸러 내지 못한…….”
구석 자리의 그림자 하나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하지만 상석의 그림자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황궁의 피해가 그렇게 극심하지 않았겠지. 무엇보다 황제까지 죽었단 말이다!”
쾅.
“비록 그로 인한 혼란은 오지 않았지만, 바뀐 계획이 알려지고 푸른 여우까지 노출되었다면! 거사는 시작 단계에서 좌초되었을 것이 분명해. 그러니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탁자까지 두드리면서 한 그 확언은 다른 그림자들의 불안감을 오히려 더욱 키웠다.
“그럼 대체 그놈은…….”
“어떻게 된 거야.”
“도통…….”
“그래서 나는 이번에 놈에게서 그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웅성거림으로 가득한 원탁에 단호한 목소리가 퍼지자, 모든 이의 시선이 대번에 상석으로 몰렸다.
“예?”
“어떻게……?”
“일단 우리의 목표를 바꾼다. 마침 제국이 혼란에 빠지지 않은 탓에 내부의 혼란을 토해 낼 기회를 잃은 종족이 있지 않느냐.”
그 말에 원탁에 있던 그림자 대다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다다음 목표가 되었어야 할, 제국의 서부 초원과 구릉 지대에 자리 잡은 전투 종족.
“오크…….”
“그래. 예정보다 시기가 이르지만, 곪아 가는 오크 연합 내부를 아예 썩어 버리게 만들 작전은 지금이 적기다.”
“그럼 그놈은……?”
“앞선 두 번의 실패가 우연이나 간자에 의한 정보 누설 때문이었다면, 놈은 이미 충분한 영명을 얻었으니 이번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설명을 이어 가던 차분한 음성이 어느 순간 말끝을 흐렸다.
“만약 놈이 바토르로 온다면, 3호의 말대로 우리 중에 아직 간자가 있는 것일 테지.”
그 말과 함께 스르륵 들어 올린 손길에 따라 원탁 주변에 살벌한 살기가 맴돌았다.
“그리고 혹시, 설마 그럴 리야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만약 놈이 엘븐하임으로 간다면…….”
말과는 달리, 상석의 그림자의 어조에는 분명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여신의 신탁을 받은 놈, 용사라는 뜻이겠지.”
그리고 이어진 말은 한순간 원탁을 고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왕을 섬기는 악마추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상극에 있는 이름이 튀어나온 것 때문이 아니었다.
“푸하하하. 진실된 신도 아닌 불완전한 관리자가 또 역사에 남을 삽질을 시작했다는 겁니까, 설마?”
웃음과 함께 터져 나온 그 말에는 왠지 모를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내.
“이 불안한 세상의 관리자는 정해진 운명밖에 보지 못하니.”
“지나친 간섭으로 변화한 세상을 읽지 못한다.”
“운명에서 벗어난 세상은 더욱 빠르게 파멸을 향해 다가가고.”
“차원의 경계 역시 더욱 쉽게 흐트러져, 진실된 주인들이 더욱 빠르게 돌아올 통로를 만들었다.”
원탁의 장로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저마다 조직에 전해지는 고대의 ‘역사’를 읊조렸다.
고대에 있었던 첫 번째 마계 대전을 일으킨 원흉.
인류의 기록과는 다르게, 그들은 그것이 여신의 간섭으로 시작된 세상의 불균형 때문이라 알고 있었다.
“본디 파멸과 창생을 반복해야 할 세상. 그러나 여신은 그 파멸을 막기 위한 신탁을 내려 운명을 비틀었다.”
그 탓에 조용한 수확자이자 새 시대의 창생자가 되어야 했을 ‘진실된 주인’들이 흔들린 차원을 뚫고 나타나 진정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니, 그것이 고대의 마계 대전이라.
인류의 승리라 기록된 현시대 역사서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고대의 문명을 거의 멸망시킬 뻔했던 첫 번째 마계 대전에서의 승자가 마족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역과 대미궁이라는 엄연한 증거가 대륙에 남아 있었으니까.
“만약 정말 놈이 용사라면, 우리의 염원이 더욱 쉽게 이루어지겠지.”
“이거 생각만 해도…….”
단숨에 소란스러워진 원탁의 분위기.
하지만 그때 모두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나타났다.
“놈들이 이미 제거된 간자의 정보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구석 자리에서 조용히 제기된 그 말이 달아오르던 원탁의 분위기를 단숨에 식혔다.
살벌한 눈초리들이 그에게로 향했지만.
“아스란의 일도 간자가 흘린 정보 내에서 대응하다가 어중간하게 막힌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게 더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덧붙인 지적 또한 타당하다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상석의 그림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놈이 움직이는 행태를 봐라.”
“예?”
“여태 놈은 우리의 일이 진행되는 시기에 맞춰 카룬으로, 또 아세리안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였다.”
“아…….”
“그리고 놈이 대동하는 세력을 보면 더 확실해지겠지.”
“예?”
“놈은 이미 성과를 거둬 세상에 인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이나 카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소수로 움직인다면, 놈이 용사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아는 이가 많아질수록 차원의 흔들림이 커질 테니까.”
그 명쾌한 결론에 원탁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금방이라도 다시 들끓을 듯한 분위기를 상석의 그림자가 다시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8호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 그러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도록. 놈이 엘븐하임이나 바토르로 향하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큰 데다 설령 놈이 움직인다 해도 아마 제국의 병력을 대동할 테니, 우리의 기대는 일단 기대로 그쳐야 할 것이다. 그분께도 아직은 보고를 드리지 않았다.”
실제로는 연이은 실패가 ‘대법’에 지장을 미칠까 염려하여 보고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놈이 용사여야 한다. 그놈이. 그래야 연이은 실패의 책임을 면할 수 있어.’
상석의 그림자는 그렇게 속마음을 감추며 원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대로 몰고 가려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8호를 잠시 응시하다 명령을 내렸다.
“만약 놈이 엘븐하임으로 직행하고 제국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8호가 직접 움직여 놈을 처리하도록. 조직의 총력을 집중해도 좋다.”
“……예.”
놈은 반드시 엘븐하임으로 움직일 것이다.
놈이 일레인을 처리한 게 우연이든 아니든, 지금쯤이면 작년에 만난 그녀에 대한 의심과 걱정을 하고 있을 테니까.
‘연달아 재앙이 터졌으니 생각이 날 거야. 예방 차원에서라도 최대한 빨리 엘븐하임에 가 보겠지. 만약 놈이 그냥 용의 눈의 선전용 인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원탁의 장로들이 잇따른 실패에 따른 공황으로 이성적인 생각을 못 할 때 놈을 용사로 몰고 가서 죽여야 한다.
‘진짜라면 더욱 좋겠지만.’
상석의 그림자는 그리 내심을 다스린 뒤, 침묵에 잠긴 원탁을 보며 조용히 구호를 내뱉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위해!!”
* * *
“자, 드디어 초원 지대군. 자네, 여기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게 뭔지 알고 있겠지?”
“오크죠.”
“그렇지.”
지체 없이 나온 타이니의 대답에 가렌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것은 웬만한 기사라면 알아야 할 상식이었다.
제국의 서부 초원 지대에서부터 엘븐하임이 위치한 대수림 근처의 구릉 지대까지, 다수의 부족으로 나뉘어 생활하는 오크족은 그 광대한 지역의 패자나 다름없었으니까.
“상단이라면 세력이 큰 종족에게 적당히 통행료를 바치고 통과하거나 종족의 경계를 타고 움직이는 아슬아슬한 길을 택해야 하지. 하지만 전자의 길을 택하면 굴복한 약자로 간주되어 초원을 질주하는 것이 금지되고, 후자의 길은 그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그럼 우리는 어쩌는 것이 좋을까?”
마치 선생이 제자에게 부러 어려운 문제를 낼 때처럼 짓궂은 표정을 한 가렌이 타이니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사의 도전이죠.”
타이니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이곳에서부터 엘븐하임까지 일직선으로 질주하면 만나게 되는 오크 종족이 모두 셋입니다. 딱 세 번만 일대일 대결에서 이긴다면, 더 이상 우리를 가로막는 오크는 없을 겁니다.”
그 말에 가렌의 얼굴에 살짝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정답. 천, 크흠. 빈민 출신이라더니, 이런 건 또 누구한테 배웠나?”
“주워들은 게 많은 거지요.”
“뭐 어쨌건, 우리가 둘이니 두 번씩 여섯 번은 싸워야 할 것이야. 자신 있나? 오크족은 자네가 여태 싸워 온 인간과는 전혀 달라. 특히 그들의 육체 능력은 마나의 경지와 상관없는 변수를 만들기도 하…….”
“잘,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전엔 주워들었다 말해 놓고는 이번에는 아주 잘 안다는 듯 확언하는 타이니.
‘……참 숨기는 게 많은 아이야.’
하지만 가렌은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이 상식을 초월하는 천재에 대해 굳이 의문을 품지 말라는 주군의 명이 있기도 했지만.
‘친구의 비밀을 감싸 줄 줄도 알아야 진짜 친구니까.’
가렌 클레멘은 그리 생각하며 피식 웃어넘겼다.
“좋아. 그럼 대결에서 그들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지?”
“예.”
“반면에 상대는 자네가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물론입니다.”
“……좋아, 가자. 하!”
히이이이이잉!
가렌이 힘차게 고삐를 당기며 튀어 나가려는 순간.
번쩍.
“크르르르.”
푸르륵.
“히이이이잉!”
은빛 털에 태양광을 반사시키며 위용을 뽐내는 거대한 늑대의 등장에 달려 나가려던 그의 말이 경기를 일으켰다
국경까지 오는 동안 내내 보았음에도 그의 애마 산드라는 저 정령에게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헐…….”
“아, 이런. 죄송하지만 먼저 가겠습니다.”
늑대와 기수가 주춤하는 기마를 두고 바람처럼 튀어 나가고, 한숨을 내쉰 가렌이 간신히 말을 진정시키고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니는 전면에서 질주해 오는 십여 기의 거대 도마뱀과 마주했다.
‘토모도!’
거대 도마뱀이라고는 해도 말보다는 덩치가 작았다.
하지만 평균 신장이 2m를 훌쩍 넘고 체중도 200kg에 가까운 오크 전사들을 태운 채 초원을 질주해 오는데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 그야말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유독 큰 오크.
녹색 피부에 험상궂은 얼굴, 큰 어금니 두 개가 윗입술 쪽으로 솟아오른 오크가 타이니를 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фофстоал вдйлввды!!”
오크어야 잘 모르지만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타이니는, 저릭에게 배운 유일한 오크어 문장을 아직 외우고 있었다.
“ылыьы цоыелвьд едпофвьа втоыплыул!!(나는 전사의 시험을 원한다!)”
타이니의 고함이 평원을 달려오는 토모도족 오크 전사들을 향해 울려 퍼졌다.
“……요즘엔 오크족도 공용어 많이 알아듣는데.”
어쩌다 보니 한참 뒤에서 달려오던 가렌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타이니에게도, 오크들에게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