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자밍우드
오크. 평균 신장이 1m 80cm를 훌쩍 넘는 이 녹색 피부의 종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강건한 육체를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힘을 가진 이들, 키부터 2m가 넘는 오크 전사들은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인간족의 두 배가 넘는 넓은 어깨를 가진 것이 보통이고, 그에 따른 근육량만 해도 같은 키의 인간을 몇 배 차이로 압도한다.
오크들과 육체적 힘을 겨룰 수 있는 것은 달빛 아래에서 변신한 수인족뿐이라는 것이 정설.
반면 모든 인류 종족 중 지능이 가장 떨어진다는 확실한 단점이 있지만, 그것이 일대일 전투에서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맹수 같은 본능과 힘으로 보다 높은 경지의 강자들조차 종종 꺾어 내는 것이 오크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거대 초원 도마뱀 토모도를 사육하는 토모도 오크족의 순찰 대장 부르칸은 익스퍼트급 마나유저로서, 오크 전사의 자부심을 한가득 품고 있는 이였다.
‘허약한 인간족 따위야. 슈페리어급도 이길 수 있다.’
실제로 전사의 도전에서 블레이더급 기사도 패퇴시켜 본 적이 있는 그였기에, 그 자부심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흐아아아압!”
꽈아아앙!
“큽!”
온 힘을 다해 휘두른 도끼가 자신보다 한참 작은 인간의 망치와 부딪치는 순간, 그는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바람에 토모도를 탄 채로 나자빠지듯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르칸을 더 환장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한 번 더?”
흰 늑대를 타고 한 손을 까닥이는 저 건방진 태도였다.
그도 알아들을 수 있는 짧은 공용어가 더욱 화를 돋웠다.
와중에 문제라면 이 무식한 정면 격돌이 벌써 세 번째라는 것.
자신은 도끼를 잡은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데 놈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거기다 성년식에서 잡은 일각표(一角豹)의 뿔을 깎아 부족의 주술사가 술법을 부여한 애병의 손잡이에 금이 간 것을 발견한 순간에는 벌겋게 충혈된 그의 눈이 아예 뒤집히고 말았다.
“우와아아악! 끝장을 보자!”
쿵.
주인의 살기와 마나를 받아들인 토모도 도마뱀이 비늘을 붉게 물들이며 앞으로 돌진하고, 그 위에 탄 부르칸의 새하얀 도끼가 이글거리는 불꽃의 마나를 품고 커다란 늑대 위의 기수를 노렸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뻐어어억.
“!?”
느닷없는 늑대의 앞발질에 달리는 바위라 불리는 토모도 도마뱀의 고개가 홱 돌아가 버렸고, 그 탓에 부르칸의 도끼는 어이없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이내.
“좀 자라.”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오크에 비하면 한참 작은 인간의 주먹이 부르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쾅!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기 힘든 짧고 강렬한 타격음.
그와 동시에 눈이 풀린 부르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크롸!”
갑자기 주인이 사라지자 분노한 토모도 도마뱀이 다시금 비늘을 세웠지만, 바로 눈앞에 자리한 거대한 늑대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취릭.”
토모도 도마뱀은 그 명성이 무색하게 비늘을 다시 얌전히 눕히고는 땅에 머리를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진 가렌과 다른 오크 전사의 대결에도 이변은 없었다.
“역시 오크들, 끈질겨. 무슨 2단계가 이렇게…….”
가렌이 혀를 내둘렀지만 그냥 너스레일 뿐이었다.
가끔 사람이 너무 가벼워 보여서 그렇지, 그 역시 엄연히 블루윙의 부단장이자 슈페리어급의 강자, 신속의 기사라는 이명까지 있는 기사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 전사의 도전, 통과했다. 하지만…….”
“이미 밝혔듯이 영역 통과 외에 다른 짓을 한다면, 토모도 오크족의 공격을 받아도 인정하겠다.”
오크 전사가 해야 할 말을 먼저 해 버린 가렌은 떨떠름한 표정의 오크 전사에게서 작은 뼈 목걸이를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토모도 오크족의 영역을 통과할 수 있다는 허락의 증표.
“난 다 똑같아 보이는데, 이게 부족마다 다르다더군. 자네는 차이를 알겠나?”
“글쎄요. 저희야 그냥 통과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깨를 으쓱한 타이니의 대답에 가렌 역시 피식 웃으며 증표를 품 안에 넣었다.
“정답이야. 그럼 가세나. 아, 거기 늑대는 살기 좀 거두고. 내 사랑스러운 산드라가 무서워하잖나.”
“그거야 쉽죠.”
말과는 달리, 타이니는 전사의 도전을 위해 일반 말 크기로 줄였던 월랑의 덩치를 오히려 다시 키웠다.
“안 무서워하게만 하면 되죠?”
2m가 넘는 체고 탓에 거의 흰색 바위처럼 보이는 압도적인 체구.
영갑 아니무스의 힘으로 더욱 강력해진 늑대의 정령이 가렌의 말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 복종하라.
생전에 거대한 숲의 주인이자 지배자였던 늑대 정령의 위세가 고작 조련된 말 하나를 향해 쏟아지자, 잠깐 푸르륵거리던 말은 마치 사람의 예절을 흉내 내듯 바로 머리를 숙이며 앞발을 살짝 구부렸다.
굳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상황에 가렌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이렇게?”
“어쨌든 겁은 안 먹은 거 같습니다만?”
“하…… 하, 하. 그, 그래.”
어색한 미소를 보이다가 말 머리를 돌리는 가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린 타이니는 이내 월랑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월랑이 보인 일종의 피어(Fear)는 자신이 정령술사의 다음 단계에 거의 도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전에는 월랑 스스로도 짐작하지 못했던 길이었지만.
‘이젠 그 길이 보여.’
그 또한 영갑 아니무스로 강화된 영혼의 힘 덕분이었으니, 새삼 아니무스를 얻은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 * *
토모도 오크족의 영지를 지나 붉은 멧돼지 오크족의 대도시, 자밍우드에 도착한 것은 황도를 떠난 지 한 달만의 성과였다.
타이니야 계속 질주해서 엘븐하임으로 직행하고 싶었지만.
“산드라의 체력이 한계일세. 좀 쉬었다 가세나.”
제나스처럼 오랜 시간 마력 질주를 사용할 감각이 없는 가렌 때문에 잠시간 쉬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거 미안하구먼. 내가 발목을 잡을 줄이야.”
“아닙니다. 가렌 경이 있어야 엘븐하임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경에게 맞추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
민망한 표정의 가렌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큰 짐승의 뼈를 엮어 만든 듯한 거대한 목책 형태의 성벽 앞에 도착했다.
지름이 10m는 될 듯한 커다란 짐승의 두개골이 성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그곳에는 덩치 큰 오크 전사 몇이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이내 두 사람을 발견한 오크 전사들은 곧장 무기를 들어 올렸다.
“фтофсто!!”
“서라, 인간!”
“우리는 전사의 도전을 치렀다!”
이미 붉은 멧돼지들을 타고 다니는 오크들과 한차례 전사의 도전을 치른 마당.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던 오크 경비병들은 가렌이 증표를 들어 올리자 무기를 거두곤 콧김을 뿜어내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규칙이니 어쩔 수 없이 물러선다는 듯한 태도.
“이쪽의 오크들은 아무래도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은 것 같군요.”
“그럴 수밖에. 구릉 지대의 부족들은 몰라도 초원의 부족들은 몇 세대에 한 번쯤은 제국과 전쟁을 치르곤 했으니까.”
“아…….”
그 말에는 타이니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제국 내전이 심화된 이후, 초원의 오크족들이 혼란을 틈타 날뛰며 제국 서부를 약탈하기도 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수 대에 걸쳐 쌓아 온 원한 탓이겠지.’
하지만 현생에선 제국이 건재하니,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오크 족의 내란. 아직 몇 년 남았지만…….’
그때를 대비해 오크의 도시에 대해 좀 더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통과 의례는 이게 끝이죠?”
“그래, 오크들은 전반적으로 허례허식을 싫어하니.”
“그럼 들어가시죠.”
일행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성벽 안쪽으로 향했다.
“врдйтвды…….”
“елввдывдыкл?”
웅성웅성.
저마다 자신들을 쏘아보며 잠깐씩 멈춰 서는 오크들의 경계 어린 눈길은 익숙해지기 어려웠지만, 이방인을 향한 경계라 생각하면 납득이 갔다.
그렇게 들어선 도시, 자밍우드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방으로 늘어선 거대한 천막들의 향연.
그것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호오!”
대체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중 큰 천막들은 인간 도시의 5층짜리 건물보다 더욱 커 보였다.
형형색색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천막들은 기워 낸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고, 저마다 다른 동물의 뼈와 무늬를 자랑하며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천막들 사이사이, 인간의 건축물로 치면 2, 3층 정도의 높이에는 뼈로 된 통로가 이어져 있어서 수많은 오크가 그 위로 왕래하고 있었다.
인간족의 문명과는 전혀 다른, 가죽 공예와 뼈 가공 건축 문명이 자아낸 신기하고 아름다운 도시.
타이니의 눈에 들어온 자밍우드는 그야말로 인상적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멋지군요.”
그 솔직한 감탄에 가렌이 피식 웃으며 부연 설명을 했다.
“오크의 도시에 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오크족을 야만족이라 무시하지. 하지만 이런 대도시에 한 번이라도 와 봤다면 절대 그런 말을 못 할 거야.”
“그럴 것 같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네요.”
“그래. 더구나 오크들의 고기 요리는 가짓수도 많고 맛도 끝내주지. 자네도 한번 맛보면 놀랄걸?”
“그 정도입니까?”
“그럼! 그런데 자네는 오크 말도 조금은 아는 것 같더니,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 놀라는구먼. 정작 오크 도시에 와 본 적은 없나 보지?”
“……예, 그때는 그럴 환경이 아니었으니까요.”
멍한 표정으로 자밍우드의 거리를 둘러보던 타이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마수병단의 강림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종족은 아무래도 대수림의 엘프들과 초원의 오크들이었다.
마수들이 수림과 초원에 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근처를 마기로 오염시켰고, 그 탓에 두 종족에 속한 일파들은 맞서 싸우다 전멸하거나 수 대에 걸쳐 쌓아 온 문명을 버리고 후퇴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타이니가 오크의 도시에 대해 아는 거라곤 워로드 저릭에게 말로만 들은 것이 전부였다.
‘저릭이 그리 자랑할 만했어. 자밍우드가 이 정도라면 바토르는 더욱 대단하겠지.’
오크족의 성지이자 중심 도시인 바토르에 있을 옛 동료를 떠올린 타이니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사신과 검제가 10대 기사 중 자신과 가장 껄끄러운 관계였다면, 워로드 저릭과 문나이트 실버 팽은 가장 친한 동료였다.
일단 덩치가 서로 비슷했고, 누가 육체적으로 가장 강한가를 두고 심심찮게 내기를 하며 친목을 다진 덕이었다.
물론 그것이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 왜 대화로 하면 될 일을 항상 주먹다짐을 하죠? 당신들은 인류예요, 인류! 대수림의 맹수가 아니라!!
에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학을 떼긴 했지만, 그들은 그 육체의 대화를 통해 10대 기사들 중 그 누구보다 빠르게 우의를 쌓았었다.
마나를 전혀 쓰지 않은, 순수 육체의 힘겨루기로 말이다.
‘각기 5승 4패, 7승 5패였지 아마? 결국 내 육체가 제일 강했다는 거지. 뭐, 지금 상태로 다시 경지에 오른다면 1패도 없겠지만.’
타이니가 그 말세의 나날 중 몇 되지 않은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대도시라면 상인들이 묵는 여관 같은 곳이 있을 거야. 그곳에서 쉬다가 말이 회복되는 대로 떠나세. 그리고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 절대, 절대 다른 오크들과 시비가 붙어선 안 되네.”
가렌의 말이 그를 다시 현실로 데려왔다.
“예?”
“나도 강한 오크 전사들과 더 친분을 쌓아 보고 싶긴 하지만, 요즘 초원의 분위기가 안 좋다는 소문이 있어. 일단 우리 일정도 있고 하니, 최대한 몸을 사리라는 말이지.”
그 말에 타이니의 표정 역시 살짝 굳어졌다.
친구 사귀는 것이 취미라는 가렌이 이리 말할 정도면 그냥 분위기가 안 좋은 정도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의 울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인이 아닌 인간은 오랜만인데. 이 시국에 자밍우드엔 무슨 일이지?”
굉장히 유창한 공용어가 그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