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엘프 장로회
그 허를 찌르는 말에 일행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일레인이라는 이름은 낯설었지만, 누구를 말하는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그런 생각이라면 저희를 엘븐하임 안으로 들이지도 않았겠지요. 사실 당신들도 판단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 것 아닙니까?”
타이니의 대답은 마치 미리 준비된 듯 빨랐다.
– 엘프는 순수하나 지극히 이성적이니, 감정적인 충동만으로 행동하는 것을 경멸합니다. 종족 전체가 착하다는 말도 안 되는 전제가 성립하는 것도, 잘못된 행동임을 알면 행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 그래서 엘프는 그 반대로 직감을 중시하는 드워프나 감정적인 오크들을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뭐 인간도 그리…… 흠, 흠.
– 그러니 절대, 욱해서 일을 저지르시면 안 됩니다.
이곳에 오기 전 신신당부했던 제이의 말과.
– 나를 보고 우리 동족을 판단하면 곤란해.
– 수호자나, 수행자, 혹은 외부인을 자주 만나는 엘프 레인저들은 좀 융통성이 있는 편이지만, 엘븐하임의 대다수 엘프들은 안 그렇거든.
전생에 들은 에스티나의 말이 연달아 오버랩되며 차분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렇지. 말 잘했네, 타이니 경. 다른 종족들의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중앙 신전의 고변은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루드엘 님?”
가렌마저 말을 보태자 루드엘의 표정이 살짝 굳어 버렸다.
그 순간부터 시작된 잠시간의 침묵은 엘븐 티의 고소한 향이 세 사람이 있는 공간을 가득 메운 뒤에야 깨어졌다.
“……우리는 신전이라고 특별히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기에 관한 일은 종족의 사명과 닿아 있기에 무시할 수 없었을 뿐. 그렇기에 당신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호로록.
태연히 차를 마시는 루드엘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이들은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조심스러운 척해도 엘프는 엘프라는 건가.’
이제 와 태연한 척하기에는 직전의 침묵이 너무 길었는데, 애써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어색했던 것이다.
루드엘 역시 그 실수를 느꼈는지 표정을 굳히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친구의 증표를 지니고 있기에 엘븐하임에 들이긴 했습니다만, 하루엘과의 만남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으시다면 당신은 우리의 시험을 받아야 할 겁니다.”
“음?”
“당신은 숨겨진 마기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악마추종자들을 쫓고 있다는 것도.”
“하?”
“우리의 시험을 통과한다면, 당신의 목적을 위해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지요.”
‘내가 무슨 목적인 줄 알고?’
이 어설픈 제안도 그렇고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거, 바라던 바네요.”
“뭐라고요?”
“안 그래도 혹시나 엘프족의 수뇌부 중에 악마추종자가 있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그 말에 루드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하, 만약 당신이 그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어찌 될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요?”
화난 모습이 역력한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는 그녀.
하지만 그 엄포가 결코 과한 것이 아님을 타이니는 잘 알고 있었다.
엘프는 감정에 휩쓸려 이성적이지 않은 판단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뿐, 만약 자신의 분노가 온당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경우에는.
– 세상 어떤 이들보다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우리 엘프야.
고위 마족을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그 오염된 피를 뒤집어쓴 채로 웃고 있던 에스티나의 모습은 아직도 꽤나 섬뜩한 기억으로 머릿속 한편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시험을 통과한다면,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참고로 말하지만, 우리가 마련한 시험은 우리 중에 악마추종자를 구별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절대.”
“저도 부디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무튼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시겠다는 말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흠, 내게 가능한 일이라면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다스리지 못하면서도 완전히 감정에 말려들지는 않는 모습이 엘프답다면 엘프답다고나 할까.
“어려운 부탁은 아닐 겁니다.”
그럼, 담장 지킴이 정도면 세계수의 가지 파편 정도야.
환하게 웃고 있을 꼬마…… 아니, 드워프의 얼굴을 떠올린 타이니는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 자신만만한 얼굴이 언제까지 가는지 지켜보겠어요.”
붉어진 얼굴에 차가운 눈빛, 루드엘이 그야말로 엘프나 지을 수 있는 모순적인 표정으로 돌아서려는데.
“아, 그런데 혹시 그 시험이라는 걸 치를 때 에스티나 님도 나오십니까?”
이어진 타이니의 말에 그녀의 발길이 멈칫했다.
“그거야 당신이 굳이 알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냉랭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아니, 지금 자리에 안 계신 듯해서 말입니다.”
“그건 또 어떻게?”
놀란 듯 돌아보는 모습에 타이니는 다시금 옛 동료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장 높은 가지에 카일룸(Calum)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 카일룸은 쉬는 날이면 엘븐하임의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대수림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지.
– 다시 그런 날이 와야 할 텐데, 가능하겠지?
대정령 카일룸(Calum).
에스티나의 정령이자, 세계수의 수호자에게 대대로 내려온 정령의 이름이었다.
엘븐하임에 들어섰을 때, 타이니가 가장 먼저 찾으려 했던 것도 그 거대한 독수리 정령이었다. 그것을 찾지 못했기에 당혹스럽기도 했었고 말이다.
“당신, 우리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뭘 이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여기 계시지 않네요. 혹시 그 부탁이라는 게 그분을 뵙는 것인가요?”
물론 만나긴 해야겠지만.
“뭐 부탁이랄 것까지야. 에스티나 님은 특별히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자리에 계신다면 뵙기 어렵지는 않을 테죠.”
그러니 그것으로 세계수의 가지를 대신할 수야 없지.
그 단언에 루드엘의 표정이 다시 묘하게 변했다.
“당신, 에스티나 님을 만난 적이 있나요?”
어쩐지 무언가 기대하는 느낌이었지만, 지금 타이니는 그 기대를 채워 줄 수가 없었다.
“……없습니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말이지.
“그래서 더 만나 뵙고 싶기도 하고요.”
그 대답에 다시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루드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흠, 안타깝군요. 그분은 당신 짐작대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당신의 시험은 장로회에서 주관할 것이니 그리 알고 계시면 됩니다.”
“에스티나 님이 언제 돌아오시는지도 알 수 없는 겁니까?”
“엘프의 일입니다. 수호자의 일이지요. 그걸 외부인에게 쉽게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나요?”
그 서릿발 같은 태도에 타이니는 아쉬움을 삼키며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이 그 능력을 증명하지 못할 경우를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언가 맺힌 듯한 말과 함께 루드엘은 그대로 나무 아래로 사라졌다.
‘이거 곤란한데. 적어도 에스티나가 언제 돌아올지는 알아야 하는데…….’
그리고 루드엘이 떠난 자리에서 가렌 역시 묘한 표정으로 타이니를 향해 물었다.
“세계수의 수호자를 만나야 하는 일인가?”
“아, 가렌 경. 예, 뭐…… 그녀에게 악마추종자들의 일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생각했습니다.”
“내 친우가 그에 관해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하루엘이라는 엘프 말입니까?”
“그래, 세계수의 수행자인 엘프들 대다수가 결국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않나.”
“……마경 전투조.”
마기로 가득한 마역에서 태동한 몬스터들이 대수림으로 몰려드는 것을 막아 내는 전투 부대.
대수림을 수색하여 외부에서 흘러들어 온 몬스터나 마수를 처리하는 것이 엘프 레인저라면, 그들은 따로 엘븐나이트라 불리며 대수림의 영역 최전선을 지키는 엘프들의 최정예였다.
“그래, 결국 수호자 휘하의 전투 부대가 되지. 그를 만나면 수호자의 행방에 대해 물어보겠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역시 돌아가는 길은 어디에나 있는 법인가. 가렌의 말이 그나마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불과 1시간 뒤.
“……없단 말입니까?”
“하루엘도 지금 임무 수행 중입니다. 안됐지만 당장 만날 수는 없겠군요.”
안내인이라며 찾아온 엘프의 말에 가렌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타이니는 그 엘프의 표정을 보고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그럼 혹시 엘븐나이트 중에 엘븐하임에 계신 분이 있나요?”
“예?”
“엘븐나이트들은 마역에 교대로 출진하지 않습니까. 남아 계신 분들도 있을 텐데요? 그분들을 뵙고 싶어서 말입니다.”
“아……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없구나.
그 순간 가렌과 타이니의 눈빛이 부딪쳤다.
거짓말은 악한 일. 그렇기에 보통의 엘프들은 거짓말을 할 때 심하게 티가 나기 마련이라.
지금 눈앞에 있는 안내인 역의 엘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는 건.
‘설마 했는데 엘븐나이트 전원이 마역으로 출동했다?’
엘븐하임에 비상 상황이 걸렸다는 말이었다.
“몬스터 웨이브 기간인가 보군요, 젠장.”
안내인이 돌아간 이후 타이니는 길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주기적으로든 불규칙적으로든, 유독 마역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때가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엘븐하임은 그야말로 완전히 전투태세에 들어가기 때문에, 엘프 레인저의 다수도 마역으로 파견을 간다고 했던가.
“대수림을 횡단하는 동안 유난히 몬스터가 많이 튀어나온다 했더니, 우리가 날을 잘못 고른 거 같네.”
가렌은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미안한 듯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괜찮습니다. 몬스터 웨이브 기간은 길어야 한 달이라고 들었으니, 여기서 버티다 보면 만날 수 있겠죠.”
타이니 딴에는 가렌을 위로하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그렇게나 오래 있으려고!?”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얼마를 예상하고 계셨던 건데요? 공작 각하께 들은 게 없으셨습니까?”
“전혀! 난 그냥 자네를 엘븐하임에 들여보내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지. 이게 이렇게까지 장기 임무라고는 듣지 못했단 말일세!”
“……유감이군요.”
“그렇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영지를 오래 내 일을 드렉슬러 그 친구가 다 해야 하는데, 그럼 다시 만났을 때 날 죽이려고 할걸?”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장난스레 할 말이 아니라고…….”
가렌이 그렇게 울상을 짓는 순간.
똑. 똑.
그들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대. 시험입니다.”
루드엘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타이니를 불렀다.
“엘프들은 일 처리가 느리다고 들었는데…….”
가렌이 뒤에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차라리 잘됐어.’
타이니는 오히려 가뿐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무려 2시간여를 걸은 뒤에야 엘븐하임의 가장 큰 나무 안쪽으로 들어섰다.
우우우웅.
‘역시 세계수는 이 근처에 있는 건가?’
들어가는 순간 넘치도록 느껴지는 마나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거대한 나무의 가장 큰 방.
인간식으로 따지면 내성의 대전쯤 되는 거대한 옹이구멍 안에는, 노년의 엘프들이 나뭇결이 돌출된 벽면 높은 곳에서 제각기 흩어져 앉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창백한 피부에 푸르스름한 혈관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이들.
그것은 바로 강력한 이능력의 증명이었다.
엘프 하면 궁술이나 정령이 더 유명하긴 하지만, 엘프족의 진짜 무력은 다른 것에 기반해 있었다.
바로…….
‘전부 강력한 소서러. 역시 엘프 장로들인가.’
고대 요정의 피에서 발현한 혈통 마법.
가장 강력한 소서러인 장로들이 타이니를 주시하는 가운데, 그들 중 정면에 서 있던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엘프가 그를 지팡이로 가리켰다.
“재앙을 막는 자, 마기를 쫓는 자라 불리는 인간이여. 그리고 또 우리 동족을 살해한 자여. 지금부터 그대의 능력을 증명하는 시간을 갖겠다.”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강력한 마나가 뿜어지며 그를 압박했지만.
“……이게 시험입니까?”
삐죽이 웃은 타이니는 태연한 표정으로 반문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