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증명 (2)
에스티나와 그녀의 부관 라므엘의 시선이 월랑에게 쏠리는 그때.
타이니는 월랑이 왜 그러는지를 알았기에 오히려 자신을 감시하는 엘븐나이트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저놈들 왜 그냥 놔뒀어!”
갑작스러운 고함에 그를 감시하던 엘븐나이트들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타이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는 순간 그들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추종자들을 감시하기로 하지 않았나!?”
전선을 뒤로한 채 대수림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는 두 명의 엘븐나이트들이 보였다.
–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말이 진짜!?
그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
아마도 이 인간의 말을 믿지 않은 동료들이 많았던 탓에 벌어진 사달 같았지만.
“내가 쫓는다! 비켜!”
“안 됩니다!”
그들은 명령받은 대로 타이니를 막아설 뿐이었다.
“이런 젠장!”
고작해야(?) 4, 5단계급 소서러와 마나유저들이다.
힘으로 뿌리치자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다치게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에스티나와 척을 질 수는 없어. 빌어먹을.’
하지만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의 몬스터보다 사람인 척하는 악마추종자들을 잡는 일이 훨씬 시급했다.
더구나 엘븐나이트의 복장까지 갖춘 엘프가 인간족의 나라에서 할 수 있는 분탕질은 얼핏 상상해도 무수히 많았다.
‘월랑, 반드시 잡아!’
– 컹!
직접 나서지는 못해도 반드시 잡아 죽이겠다는 생각.
월랑과 연결된 영혼이 녀석에게 더욱 큰 힘을 부여했다.
그리고 정령의 본질과 생전의 마지막 기억 때문에라도 악마추종자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늑대의 정령은 도망치는 놈들을 향해 그야말로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 푸슉.
작은 소음과 함께, 도망치던 엘븐나이트들의 가슴에서 녹색 화살이 솟아났다.
인간의 갑옷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마나 메탈 갑옷을 꿰뚫어 버린 오러 화살.
“……에스티나?”
타이니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엘프의 수호자에게로 돌아갔다.
그러자 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다시금 옅은 피를 뿜어내는 에스티나가 그대로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에스티나!!!”
버럭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 타이니.
하지만 더 이상 그를 막는 엘프들은 없었다.
아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어, 어떻게?”
“리링, 에스나. 둘이…….”
“정말 악마추종자라고?”
“말도 안 돼!”
에스티나의 화살에 쓰러진 두 엘븐나이트의 몸이 빠르게 부패하더니, 이내 시꺼먼 마기를 토해 내며 주변을 오염시키는 광경을 누구나 볼 수 있었으니까.
* * *
“대체 왜……!?”
무리를 한 걸까.
에스티나를 향해 본능적으로 달려가면서도 타이니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니 월랑이 잡을 수 있었어! 그런데 왜!’
물론 둘 중 하나쯤은 놓쳤을지도 모른다.
엘프가 숲속에서 발휘하는 ‘숲의 걸음’은 그들의 스피드와 감각을 몇 배는 상승시켜 주는 데다가, 자신은 아직 에스티나처럼 초장거리의 정령 소환을 유지하지도 못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악마추종자 하나 잡자고 무리를 하다니. 오히려 손해야.’
엘프의 느린 회복력은 10대 기사 중에서도 최강급에 속하는 에스티나의 거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물론 20년 뒤의 에스티나는 나날이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 지구력을 확보하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긴 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아니었다.
탈진한 후 한나절의 시간이 지났다.
카일룸을 엘븐하임에 보낸 탓에 장거리 소환에 소비한 마나가 크긴 했겠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고작 오러 화살 두 발에 피를 토하는 것은 그가 아는 에스티나의 수준에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물론 오버리바운드 따위로 에스티나가 죽지는 않겠지만.
‘빌어먹을 엘프 몸뚱어리 같으니.’
인간이 겪는 후유증처럼 단순히 몇 달 동안 힘을 못 쓰는 수준에서 그치기를 엘프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
‘오버리바운드의 후유증도 심하면 몇 년을 갈 거야. 어쩌면 몸이 더 약해질 수도 있고.’
10대 기사 중 가장 강력한 전력 한 축이, 이런 어이없는 이유로 약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선 절대 안 된다.
이를 악문 타이니가 쓰러진 에스티나에게 다가가는데.
“멈춰!”
주황색 머리의 부관이 느닷없이 일어난 이변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활을 겨누며 그를 막아섰다.
자신을 가로막는 이유야 충분히 알았지만, 타이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비켜! 내가 회복시킬 수 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물러서라고 했다, 인간!”
상식적으로 오러익시더급의 오버리바운드는 어떤 방법으로도 도와줄 수 없다.
잔여 오러가 신성력조차 튕겨 내고, 강력한 오러의 생명력이 어떤 약초의 효과도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이니는 막무가내였다.
“난 할 수 있어!”
“웃기지 마라! 네가 뭔데……!?”
하지만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부관의 눈빛도, 화살의 끝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믿었던 동료가 악마추종자였다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의 행동과 남겨진 시체가 증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상관이 평생 후유증을 달고 살게 만들고 싶으면 쏴 보든가.”
그 흔들림을 확인한 타이니는 태연히 그녀를 지나쳐 땅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토해 내는 에스티나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에스티나 님.”
쿨럭.
“흐, 내 부하였던 이들, 내가 정리하는 게, 맞다.”
에스티나는 새빨간 정혈(精血)을 토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본인의 손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그랬기에 마수병단의 공중 병력을 처리할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목숨을 내던졌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두지 않겠습니다.”
당장의 후유증을 걱정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 어떤 동료도 허무하게 목숨을 버리게 두지 않을 것이다.
타이니는 그 결심을 담아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지금 뭐, 뭐 하는……?”
그리고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담담히 바라보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 우리 엘프의 마력회로, ‘대자연의 힘’은 두정(頭頂)을 통해 세상의 기운을 받아들인다.
전생에 그녀에게 들었던, 회복이 느리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에게 알려 주었던 비전의 일부.
당시 같은 오러익시더급이면서도 특히 월등한 마나 감응력을 가진 타이니이기에, 육체는 몰라도 그녀의 마나 회복은 도울 수 있었으니까.
비록 현생의 경지는 부족하지만, 영혼은 그때의 괴력의 기사 그대로였다.
‘아니, 그 이상이지.’
전생에 없었던 정령과의 계약, 그것이 3단계까지 오르며 영혼의 힘만큼은 확실히 강해졌다.
게다가 직접 영혼의 힘을 다루게 되면서부터는 마나를 통제하는 힘도 더욱 강화되었다.
거기다.
우우우우우웅.
그의 어깨에서 그 영혼을 더욱 강화시키는 초월무구, 아니무스의 힘은 한계 이상의 마나를 몇 번이고 동원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었다.
그러니 어렵지 않다.
“‘자연의 힘’의 경로에 따라 순수한 마나를 동조시키겠습니다. 받아들이세요.”
“그게 무슨……!”
그 말에 에스티나는 물론,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라므엘의 눈도 두 배로 커지는데.
타이니는 지체 없이 그대로 최대치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노을빛이 붉은빛으로 변했다가, 다시 찬란한 푸른빛으로 주변을 물들일 때.
‘전생과 조금 차이가 있군. 그래도 충분히…… 가능해.’
에스티나의 상태를 파악한 타이니는 조심스레 그녀의 몸에 마나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집중하자.’
까득.
전생에도 이걸 처음 시도했을 때는 상당히 위험했었다.
마력회로 ‘자연의 힘’의 근원은 그녀의 뇌에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에스티나가 그대로 식물인간이 되거나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상황이 급박하지 않았다면 차마 시도도 하지 않았을 일.
‘하지만 그때도 성공했다.’
그 후로는 그가 직접 에스티나의 마나 회복을 돕기도 했었다.
지금 부족한 것은 작금의 경지뿐.
하지만 그걸 보조해 줄 수단은 차고도 넘치는 상황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된다.’
현생에서 새롭게 얻게 된 영혼의 힘.
영혼의 힘으로 에스티나의 영혼과 동조하는 순간, 마나의 파장을 맞추는 것은 전생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는 추측이 들어맞은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이젠 쉽게……. 어!?’
타이니는 자신의 영혼이 어떤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 어, 어떻게?
– 흠?
새하얀 공간에서 영혼 상태로 에스티나의 영혼을 마주했다.
태초의 상태보다 더 원초적인 모습 그대로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
– 이, 이게 대체?
– 어? 어?
하지만 이내 서로의 뜻과는 상관없이 두 사람의 영혼이 점차 가까워지고, 마침내 완전히 겹쳐진 순간.
우웅.
– 아……! 너!?
– 허……!?
에스티나는 타이니가 아직 하지 못한 말을 모두 ‘알게’ 되었고.
타이니 역시 그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영혼의 교류. 당사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발생한 그 낯선 상황에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잠시.
그들은 순식간에 새하얀 공간에서 튕겨 나왔다.
그리고.
“당신 뭐 하는 거야!”
라므엘이 뒤늦게 소리를 지르는 것을 뒤로하고, 에스티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명상에 들었다.
그리고 타이니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나를 더욱 힘차게 쏟아 넣기 시작했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푸른빛이 그들의 주변을 좀 더 진하게 물들여 가자.
“아, 아니, 이게……?”
당황스러워하던 라므엘도 이내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스티나를 회복시키는 과정이 마냥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영혼의 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현생의 경지가 너무나도 차이가 났기에.
“으으으음.”
얼마인지도 모를 긴 시간 동안, 타이니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마나의 최대치를 몇 번이고 끌어다 써야 했다.
강화된 영혼의 힘이 오버리바운드를 막아 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
한도를 넘어서는 마나 동원이 10번이나 반복된 후부터는 횟수를 세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이미 그 한계조차 넘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끄으으으.”
에스티나의 정수리에 올려놓은 타이니의 손에 시퍼런 핏줄이 투두둑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푸른 혈관은 이내 타이니의 전신으로 번졌다.
마치 붉은 피가 아닌 빛나는 푸른 피가 흐르는 듯한 모습.
그렇게 그가 온 힘을 다하는 동안, 명상에 들어간 에스티나의 표정은 점점 더 평온해지고 있었다.
얼핏 봐도 몰아지경에 들어간 에스티나를 강제로 깨웠다가는 반동으로 큰 내상을 입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타이니는 영혼이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을 견뎌 내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든 마나를 동원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우우웅.
염체가 이제 더 이상은 무리라는 듯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할 때쯤.
탁.
그녀의 머리에 닿은 손을 치워 내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으?’
거의 의식을 잃기 직전의 상태였던 타이니가 간신히 눈을 떠 보니.
“어떻게 이런 일이……!?”
어느새 완전히 회복한 듯 녹색 눈을 빛내는 에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프답지 않게 더없이 놀란 감정이 목소리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타이니를 바라보는 에스티나의 눈빛에는 신뢰감이 가득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그녀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타이니를 웃게 했다.
동료였던 전생의 에스티나가 자신을 바라보던 것과 똑같은 눈빛이었으니까.
‘예상을 한참 벗어났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제, 젠장, 쪼, 쪽팔리게…….”
이렇게까지 차이가 심할 줄은 몰랐다고!!
타이니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토해 놓지도 못한 채, 멋대가리 없는 욕설 한마디와 어색한 웃음만을 남기고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