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오크족의 변화
– 아우우우우우!
동이 터 오기 시작한 새벽.
등 뒤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배경으로, 거대한 늑대가 5단계급 마수 트리탄의 시체를 밟고 서서 승리의 포효를 토해 냈다.
“그렇지!”
“♬♪!!!”
그에 호응하듯, 전선에 늘어선 엘븐나이트들도 저마다 활이나 검을 내려놓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 중 대다수의 시선은 특히나 엄청난 활약을 보여 준 에스티나에게 꽂혀 있었다.
“역시 에스티나 님!!”
마치 타이니에게 들으라는 듯이 공용어로 외치는 한 엘프의 목소리가 그들 모두의 심경을 대변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전신에 튄 피를 바람 속성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이, 타이니에게는 공부가 되었다.
‘자신의 원래 속성이 아닌데도 자연스러워. 정령의 힘도 저리 쓸 수 있다는 거겠지.’
에스티나의 본래 마나 속성은 엘프에게서 흔히 발현되는 ‘식물’.
나무가 가득한 곳에서 전투력이 배가되는 특이 속성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활용도가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카일룸의 능력으로 바람 속성 또한 저렇게 쉽게 다루는 데다가 가속이라는 특이 능력까지 갖췄으니, 그녀는 확실히 이 시점 인류 최강의 기사라고 불릴 만한 존재였다.
그리고 지난밤 동안, 그녀는 그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했다.
물론 본인은 그저 덤덤해 보였지만 말이다.
“확실히 몬스터가 줄었어. 이 이상할 정도로 심각했던 몬스터 웨이브도 결국 끝나 가네.”
막 쏟아지기 시작한 햇살 사이에서 웃고 있는 에스티나.
그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여,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어……?’
그리고 금세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많이 웃네…….’
거의 연 단위의 시간을 함께했던 전생보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현생에서 더욱 웃는 모습을 많이 본 것 같았다.
‘아마 아직 말세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세계수가 불타고 엘프들의 터전이 반파되기 전, 즉 마왕군이 강림하기 전인 지금.
그의 동료였던 천공의 기사는 확실히 전생보다 밝은 모습이었다.
“……보기 좋네.”
“뭐?”
“아니, 아니야.”
아마 이게 에스티나의 본래 모습일 것이다.
찢어발긴 마족의 핏물을 뒤집어쓰고 소름 끼치게 웃던 그녀도, 300살이 다 되어 가면서도 엘프 생애 주기로 따지자면 자기가 더 청춘이라며 반말하라던 그녀도.
전부 같은 사람이지만, 본래의 모습에 가까운 것은 아무래도 후자이지 않을까.
‘이젠 전자의 모습은 보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보고 있자니, 에스티나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으로 웃는 거야?”
“……뭐?”
“너 지금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날 보던 것처럼 웃었어.”
그 말에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안색을 굳혔다.
– 죄책감이 드는 만큼, 더욱 확실하게 의무를 다해라.
죄책감 속에 빠져 있던 어린 에스티나를 다시 세상에 끄집어내 준 그녀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에스티나의 마음도 그의 뇌리를 스쳤다.
“어……. 아니, 아니야.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조금은 마음이 놓여서.”
풀썩 웃으며 얼버무리자, 오히려 에스티나가 살짝 정색했다.
“아직 엘븐하임에서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았어. 마음 놓지 마.”
“……알고 있어.”
“뭐, 엘븐하임에서의 정리만 끝내면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놈들이야 똥줄이 타겠지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자 에스티나가 오히려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지만, 타이니로선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다른 곳에서 별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지금 엘븐하임에 벌어질 일을 잘 예방해서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과거가 틀어져서 놈들의 수작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직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다가온 에스티나가 헤드록을 걸었다.
“잘해 왔잖아.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어. 너답지 않게 무슨 잔걱정이야?”
“어, 어윽. 그, 그래.”
조금은 과격한 스킨십 탓에 몸이 너무 밀착되자 타이니의 얼굴이 벌게지는데, 피식 웃으며 그를 놓아준 에스티나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놈들 본거지가 어딜까?”
“응?”
“악마추종자 놈들이 다 흩어져서 살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뭐, 그 폭뢰라는 것도 만들었다며? 그럼 그걸 만든 생산지, 적어도 마을 규모의 본거지가 있을 텐데?”
그녀의 말은 여태 생각지 못한 맹점을 찔렀다.
언제나 음지에 숨어 흩어져서 활동하던 악마추종자들.
인간 사회 곳곳에 침투한 병마 같다고만 느꼈지, 어딘가에 모여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대번에 낭패라는 생각이 들며 자연스레 신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을 안 해 봤어. 젠장.”
그 솔직한 대답에 에스티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뭐, 네가 생각 못 했더라도 검제는 했겠지. 그럴 만한 양반 같으니.”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그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런 게 있었으면 예전에 토벌됐겠지!!”
순간 발끈해서 내뱉은 소리지만, 말하고 보니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랬으면, 네가 말한 그 폭뢰라는 건 만들 수가 없어. 분명히 어딘가 있을 거야. 제국이나 발렌티아와는 별개로 우리도 찾아봐야겠어. 일단 청소부터 끝내고.”
에스티나의 말이 더 그럴듯했고, ‘청소’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의 눈에 번뜩이는 살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본거지라……. 악마추종자 놈들이 모여 있을 만한 곳이, 세상에 있나?’
그 생각이 머릿속에 콱 박힐 수밖에 없었다.
바로 떠오르는 곳은 하나 있었지만.
‘무법 도시? 에이,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제국과 연합에서 허락한 치외 법권 지역이라도, 악마추종자들과 관계가 있다면 이미 박살이 났을 것이다.
‘아, 씁…… 없을 것 같은데…….’
괜한 고민만 깊어지며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었다.
* * *
에스티나의 추측대로, 몬스터 웨이브는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웨이브가 끝나도 소수의 몬스터들은 넘어오겠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경계를 전부 틀어막고 지킬 수는 없으니까.”
에스티나는 그 말을 전하고는 공식적으로 몬스터 웨이브 종료를 알렸다. 그리고 엘븐하임으로 귀환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타이니는 엘븐나이트 내부에 남은 배신자들을 추려 내기 위해 에스티나와 함께 이동했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
“아, 혹시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드워프가 있는데, 그에게 세계수의 가지 하나만 전달해 줄 수 있을까?”
“흠, 드워프라. 안 주면 배신자 색출 안 도와주려고?”
“그럴 리가. 그냥 내가 약속한 게 있어서 그래. 아주 낮은 확률 같지만, 어쩌면 녀석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드워프 하나가?”
“낮은 확률이래도. 그래서 그냥 부탁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들어줄 수야 없지. 세계수 님의 가지 떨어진 것 정도면 되지?”
“물론.”
예상보다 훨씬 쉽게 그란돌에게 전해 줄 재료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엘븐하임에 도착한 뒤.
엘프들의 전력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뒤에 오히려 문제가 일어났다.
정확히는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고 2주 뒤, 모든 엘븐나이트들에 대한 검열이 끝나면서부터.
“없어?”
“응, 한 명도.”
“그 말이 정말인가? 에스티나의 부대에만 셋이나 있었다면서.”
“하지만 정말 없습니다. 그렇지 월랑?”
“컹!”
에스티나와 장로 에우리나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환장하겠는 것은 타이니 본인이었다.
차라리 한두 명이라도 나왔다면 이렇게까지 찜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일주일에 걸쳐, 교대 근무를 하는 엘븐나이트 1만 명과 엘프 레인저 3만 명을 거의 전부 훑어봤음에도 악마추종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에스티나 님의 부대에만 있었던 건……. 예, 그럴 리가 없겠죠. 죄송합니다.”
듣고 있던 가렌이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지만, 모두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는 그냥 침묵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타이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X 될 뻔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만약 에스티나의 부대에서 놈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타이니는 장로 회의에서의 성과가 있더라도 엘프족을 속인 사기꾼이 되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에스티나를 만나러 직접 찾아간 게 천운이었어. 안 그랬으면 …….’
모든 일이 꼬일 뻔했다. 아니, 꼬이는 정도가 아니라.
‘최소 100년 형이라는 엘프족의 감옥에 갇히거나, 그걸 피하려다 엘프족의 공적이 되어서 분쟁, 추살, 적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타이니는 회귀한 후 생명의 위협을 겪었던 순간들보다 지금이 더욱 가슴이 서늘했다.
악마추종자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덕에 오히려 더 큰 위기를 겪을 뻔한 아이러니.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어 봐도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런데 저기, 이런 말을 해도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가렌이 에스티나와 에우리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최근에 엘븐나이트들과 어울리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몬스터 웨이브가 끝난 이후에도 전선 순찰 임무를 자원하는 엘븐나이트들이 있다고 하던데요?”
“음?”
“무슨 말이죠, 가렌 경?”
“제 친구 하루엘과 그 동료 엘븐나이트들이 그러더란 말이죠.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서 다들 피곤한데도 순찰 임무에 자원한 동료들이 있어서 자기들이 편하다고. 그들이 고맙다고 하더군요.”
“어?!”
타이니가 벌떡 일어나 탄성을 터트리며 에스티나를 바라보고.
“……제국 기사단에도 종종 있는 일이죠, 자기들끼리 비번 바꾸는 거. 보통 윗선까지는 보고 안 하고요. 그런데 여기도 그런가요?”
가렌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에스티나와 에우리나의 시선이 마주치며 불꽃이 튀었다.
“이런 빌어먹을!!! 개잡놈의 ♬♪새끼들이 장로회를 가지고 놀아!? 이런 찢어 죽일……!”
노엘프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욕설을 토해 내며 뛰쳐나가고.
“……본대를 동원해서, 임무를 바꿔 순찰 중인 이들을 싹 잡아들이겠습니다. 반항하면 즉결 처형하는 방향으로.”
에스티나가 굳은 표정으로 뒤따라 방을 나섰다.
그렇게 둘만 남겨진 방 안, 가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나 잘한 거겠지?”
“예, 엄청요. 감사합니다, 정말. 어우씨, 생각도 못 했네.”
타이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 옆에 선 가렌도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너털웃음을 내보였다.
“허허, 거참. 이렇게라도 밥값을 해서 다행이네. 나중에 돌아가면 잘 말해 주게. 특히나 드렉슬러 그 친구한테.”
“예?”
“아마 지금쯤 나를 시간 단위로 씹고 있을 거야. 어으, 그 순한 친구가 화나면 진짜 무서워. 뒤끝도 진짜…….”
소름 끼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떠는 가렌을 보며 타이니는 어색한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요?”
“아니, 그냥 말 좀 해 달라는 건데 뭘 그렇게 정색을 하나? 섭섭하게.”
“아니, 그게…… 저 제국으로 안 갈 건데요? 할 일이 많아서, 아마 가더라도 한참 뒤에나…….”
“뭐!?”
가렌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는 순간.
– 가렌 경, 계십니까?
방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엘?”
목소리의 주인을 아는지, 가렌이 타이니를 흘깃 째려보며 문을 열자 하늘빛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남자 엘프의 모습이 보였다.
평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적어도 블레이더급.
아마 엘븐나이트거나 엘프 레인저의 정예인 듯했다.
타이니가 짧은 순간 판단을 내리고 있을 때, 다른 한 인간과 엘프는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이틀 만입니다, 가렌 경.”
“오. 이 시간에 웬일인가, 친구.”
“가렌 경의 친구가 소식을 전해 달라더군요.”
“음?”
“밖에 있는 인간 상인 말입니다.”
엘프, 하루엘이 그렇게 말하며 웬 쪽지를 내밀자 가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 그 친구가?”
자연스레 타이니의 시선도 쪽지에 꽂혔다.
“예, 언제고 필요하다면 전해 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 그랬지. 고맙네, 하루엘. 조만간 다시 엘프주 한잔 사지.”
“하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루엘이 방을 떠난 뒤, 그들은 동시에 쪽지를 펴 봤고.
그 안에 담긴 짤막한 내용에 두 사람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오크족들끼리 전쟁이 일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