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42
142화. 마계의 변화
– 운명이 비틀렸다. 이유를 찾아라.
드넓은 마계의 전역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는 일곱 대공에게 지배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도 선대에 이루지 못한 중간계 정벌을 눈앞에 둔 지금.
그에 일곱 대공이 회의를 열었다.
크르르르.
“운명의 비틀림이라……. 어쩐지 차원의 장벽이 약해졌던데, 이러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닙니까?”
7개의 뿔을 가진 거대한 야수 괴물이 그리 주장하는 순간, 사방에서 비웃음이 실린 정신파가 날아들었다.
– 굴라(Gula), 아무거나 처먹느라 머리도 나빠졌나? 모르면 닥치고 있을 것이지. 흐흐.
– 굴라라니? 이젠 글러터니다, 라스(wrath). 뭐, 확실히 선대보다 더 무식해진 것 같긴 하다만.
– 크크. 선대를 잡아먹고 대공이 되는 것이 폭식의 전승 의식이니 무식할 수밖에요. 누가 자기를 잡아먹을 후계자에게 지식을 가르칠까요.
– 강림하는 즉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인간족들에게 습격이라도 당해 봐야 정신이 번쩍 들 텐데. 그놈들, 뭉치면 꽤 성가시잖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여실하게 느껴지는 상위 군단장들의 비웃음에 글러터니는 이를 꽈드득 물었다.
“모를 수도 있잖소.”
기나긴 거리를 격하고 정신파로만 나누는 대화에 실린 한마디는 얌전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이 썩을 것들이…….’
크르르르.
마수왕 글러터니가 말없이 분노하는 순간.
그의 둥지인 검은 숲을 비롯해, 강대한 마수가 가득한 시끄러운 주변 일대가 단숨에 침묵에 잠겨 들었다.
어마어마한 살기에 주변의 모든 마수들이 그대로 고개를 처박은 채 벌벌 떨고, 격이 떨어지는 약한 마수들은 그대로 검은 피를 토해 내며 꼬꾸라졌다.
반경 10km가 넘는 공간을 단숨에 휘감는 기세.
그것이 정말 살의가 담긴 공격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러나 정신파로 그와 대화하고 있던 이들이 그것을 알 리 만무했다.
– 낄낄낄.
– 모를 수도 있어? 마계 대공이? 어이가 없어서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군.
– 하등한 짐승 출신은 어쩔 수가 없군요. 거참.
– 다들 그만해라. 어차피 자신을 잡아먹을 후계에게 지식을 전할 자는 없으니, 폭식이 대대로 무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진리다.
그 비웃음 섞인 도발들에 마수왕이 결국 포효했다.
“캬아아아아아아!”
쿵.
‘타고난 핏줄만으로 자리를 이어받는 나약한 놈들이 이 마수왕을 비웃는가? 감히!? 한 입 식사 거리밖에 안 될 놈들이!!!!’
우르르르르르릉.
글러터니가 앞발을 땅에 내려치는 순간, 일대가 지진을 만난 듯이 흔들렸다.
그저 깊게 내딛는 앞발 하나로 주변을 온통 뒤흔들어 버리는 괴력.
우르르르르릉.
쩌저저저적.
끼루룩!
캬륵.
크롸!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숲의 땅이 갈라지고, 마수왕의 둥지 멀리에서 영문 모를 재난을 만난 약한 마수 떼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소리가 사방을 소란하게 만들었지만.
후으으으으.
이내 글러터니는 용암 같은 숨결을 흘려 내며 다시금 억지로 분노를 잠재웠다.
그리고.
“무식한 본 대공은 모른 척할 테니, 그럼 다른 상위 서열분들께서 일을 처리하시구려.”
애써 차분하게 말을 토해 내는데.
– 뭐라?
– 서열 최하위가 감히!
– 역시 짐승이…….
다시금 여기저기에서 정신파가 날아들 때.
– 그분의 명을 어찌 수행할지 논하는 자리다. 불필요한 논쟁은 삼가도록. 특히 너, 이름을 받은 짐승아.
여태까지 침묵하던 누군가의, 나른하게까지 느껴지는 정신파가 끼어들었다.
그 순간, 글러터니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며 꽈드득 이를 갈았다.
실로 몇백 년 만에 듣는 목소리지만, 그 주인을 잊을 수야 없었으니까.
“슬로스(Sloth)…….”
뭐라 위협이라도 하려 했지만, 그 뒤의 말이 차마 이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여태 정신파로 떠들던 다른 군단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나태의 목소리는 정말 오랜만이군요.
– 그만큼 폐하께서 이 일에 신경을 쓰신다는 겁니까?
– 진지하게 논의해 보도록 하지.
마계 대공 서열 1위 슬로스의 등장에 그들의 마찰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이내.
– 귀찮지만, 군주의 명을 확실히 전하겠다.
정말 귀찮아하는 것 같은 한마디 이후에 다시금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 운명의 비틀림으로 차원의 장벽이 약해졌다. 강림의 시간이 빨라지는 것은 좋으나, 그에 상응하는 변수가 생기는 것은 좋지 않다.
느릿느릿한 목소리는 또 한 번 끊어지고.
– 중간계의 하수인들에게 힘을 더 부여하라. 그로 인해 강림의 시간이 조금 더 늦어져도 감수하겠다. 어차피 운명의 비틀림으로 인해 예정보다는 빨라질 테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나른하게 들리기만 했다.
– 놈들로 하여금 비틀림 이상의 업(業, Karma)을 반드시 확보하도록 하고, 가능하다면 변수를 없애도록 지시하라.
한 번 말할 때마다 긴 침묵의 시간을 갖고 이어진 나태의 말.
그리고 마지막 말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가장 참을성이 없는 글러터니가 슬그머니 한마디를 보탰다.
“……끝인가?”
그 말에도 더 이상 나태의 정신파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이들 역시 다시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 지금 말룸의 수장에게 위계를 내려 준 이가 누구죠?
– 그린 아이(Green-Eye).
– 흐, 하필? 내 카르마 손실은?!
– 그래서 명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질투?
– ……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충실히 수행할 것입니다. 제 명예를 걸고.
– 그럼 이것으로 논의는 끝이군.
마계 대공 서열 2위 휴브리스(Hubris)의 말에 원거리를 격한 정신파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러자 침묵하던 짐승의 왕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놈들이 그렇게 무시해 봤자, 선봉장은 대대로 폭식의 몫이다.”
쿵.
글러터니의 나직한 분노가 또다시 앞발을 내려치는 것으로 표출되고.
우르르르르르릉.
그것이 다시금 검은 숲의 지반을 조금 가라앉히는 재앙을 일으켰지만, 글러터니는 그런 사소한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몸이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중간계의 카르마를 먹어 치운 다음, 네놈들도 하나하나 전부 먹어 치워 주겠다. 내 선대에게 그랬듯이…….”
우르르릉.
글러터니, 마왕에게 이름을 받으며 이성을 얻은 짐승이자, 선대의 마수왕을 잡아먹고 스스로 대공의 위에 오른 최강의 마수는 그렇게 상한 자존심을 달래며 다시금 인고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 * *
그그그그그긍.
어두운 지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린 벽 사이로 어두컴컴한 통로가 나타났다.
마치 지옥으로 들어서는 문처럼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통로를 보는 1호의 표정은 암울하기만 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사안이 사안인 만큼,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는 순간 바로 목을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문을 열어 놓았으면서도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귓가에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 무슨 일이지, 1호?
“헙!?”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던 1호가 오히려 화들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섰다.
“대, 대법이 벌써 끝나……?”
자신도 모르게 존대도 잊은 채로 더듬거리는데, 그 실수를 자각할 사이도 없이 목소리가 이어졌다.
– 보고할 일이 있다면 들어와라. 마침 좋은 소식도 있으니.
좋은 소식이라니?
“예, 예. 알겠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가 다시 울리는 순간, 1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섬주섬 통로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통로의 끝, 어슴푸레 옅은 빛만 겨우 비치는 공간에서 엄청난 마기를 분출하며 서 있는 해골을 보았다.
– 왔구나.
두개골 위로 뿔처럼, 혹은 왕관처럼 솟구친 뼈가 좀 특이할 뿐, 그저 사람 형태의 뼈다귀에 불과해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해골은 멀쩡히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눈두덩이에서는 푸른 귀화(鬼火)를, 전신에서는 넓은 지하 광장 전체를 휘어감는 압도적인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저 움직이며 자연히 방출하는 마기만으로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위압감.
새파랗게 질린 1호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허, 허윽. 대, 대법을 무사히 마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크라켄의 마기에 의한 돌이킬 수 없는 중상.
그 때문에 인간으로서 삶을 포기하고 리치(Lich)가 되어 불완전한 영생을 택한 조직의 수장이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다.
얼핏 뿜어내는 마기만 해도 생전의 그가 전력을 다한 수준에 육박할 지경이라니.
‘리치의 비술이 이 정도였던가? 어떻게 이런……?’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마법 처리한 용기(容器, Vessel)에 담아 영생을 누리는 비법.
그에 따라 죽음의 기운만 남은 육체는 오감을 비롯한 대부분의 생물학적 특성을 잃지만, 그 대신 흑마법에 훨씬 적합한 신체가 된다.
그러니 더 강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지금 수장이 뿜어내는 마기는 그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당혹스러울 정도의 결과에 1호가 눈알만 굴리는데, 그 심정을 짐작하는 듯 해골이 검은 마기에 휩싸인 영체를 얼굴 위에 덧씌우며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 위대하신 분들이 은혜를 베푸셨다. 우리가 옳았다! 내가 옳았다는 말이다! 크하하하!
무슨 말일까 머리를 굴리는데, 바로 수장의 말이 이어졌다.
– 생전에도 닿지 못했던 8서클의 경지에 오르게 되다니. 실로 망극한 은혜로다!
“8, 8서클!?”
그 말에 1호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7서클의 마도사가 속성을 한 가지 이상 지배함으로써 마법사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라면, 8서클의 대마도사는 네 가지 이상을 지배하며 현상 자체를 다스리는 자연재해와 같은 존재.
흑마법사의 계열 역시 그리 다르지 않으니, 8서클이라 함은 실제로 대공 미만의 고위 마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1호가 알기로는, 인간 출신의 대흑마도사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은혜라니?’
그런 그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리치가 된 수장의 해골만 남은 얼굴 위에는 살아생전의 모습과 비슷한 검은 영체가 투영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연출하고 있었다.
– 게다가 그분의 사자께 목소리까지 들었으니, 우리의 사명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뜻이다.
쇠를 긁는 듯한 듣기 싫은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그 말에 담긴 만족감만은 듣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만 문제라면, 그 임무의 실패를 알리러 온 길이라는 것.
– 네게 맡긴 임무는 어찌 되었지?
“무, 무슨 이, 임무 말씀입니까?”
식은땀을 흘리는 1호의 표정은 그저 창백하기만 했다.
그에 1호를 보는 해골의 눈 부분에서 푸른 귀화가 피어올랐다.
– ……이 기쁜 날에, 네놈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 또 잘못된 것 같구나. 내 짐작이 맞느냐?
순식간에 장내를 장악하는 검은 마기.
‘주, 죽는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1호가 다시 넙죽 엎드려 바로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어떻게 변론할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1호는 그간 있었던 실패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변명을 떠올리기에는 눈앞에 칼날을 드리운 듯한 소름 끼치는 마기가 너무나도 무서웠으니까.
자연히 황실의 계획이 처참히 실패했으며, 엘븐하임의 추종자들은 아무것도 못 해 보고 뿌리를 뽑혔다는 말이 다급하게 흘러나왔다.
물론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했으나, 놈의 무력이 상식을 벗어났습니다. 최소 오러유저급……은 아니겠지만, 챌린저급 중에서도 최강급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애초에 정보가 잘못됐다는 뜻.
그의 영혼 깊숙이 박힌 비겁함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도 자신도 모르게 남 탓을 하고 있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즉시 즉결 처분되는 조직의 생리상 당연한 습관.
하지만 그 정보를 준 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 수장이라는 것을, 공포에 젖은 뇌가 일순간 잊어버린 것이다.
– 하…….
나직이 흘러나온 수장의 한숨을 듣고서야 그것을 깨달은 1호는 다시 한번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찍었다.
“요, 용서를! 제, 제가 말이 헛나왔습니다!”
쿵. 쿵.
계속 머리를 찧는 바람에 로브의 후드가 벗겨지며 짧은 흰 수염이 돋아난, 간사한 인상의 노인 얼굴이 드러났다.
흥건한 핏물이 흘러내리는 이마를 치켜들며 1호는 연신 다른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그래도 오크족의 몰락은 무사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놈이 워로드를 설득한다 해도 소용 없……!”
이마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다급히 말을 보태며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어필하는 1호.
그런데.
– 뭐,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좋은 일이 훨씬 큰 날이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 주마.
조직, 말룸(Malum)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관대한 용서의 말이 튀어나왔다.
“예?!”
죽었다 생각하고 있던 1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