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설득
이곳에 오면서 생각했던 최선의 경우는 이미 물 건너갔다.
그러니 차선책을 찾아야 했다.
“율법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타이니의 입에서 나온 질문에 저릭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감히 인간이 오크의 율법을 입에 담는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고함과 함께 그에 걸맞은 살기가 그들이 있는 공간을 가득 채우자, 볼드와 나른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바로 무릎을 꿇었다.
“대전사님! 분노를 거둬 주십시오!”
“대전사시여, 그런 뜻이 아닐 것입니다. 잠시만 더 대화를……!”
그들이 그렇게 소리치는데, 타이니는 저릭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크가 과도한 투쟁심에 빠져 몰락하지 않도록, 문명인임을 잊지 않게 만드는 족쇄이자 도구. 그것이 율법 아닙니까?”
그 말에 볼드와 나른이 눈을 부릅뜨고 타이니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 신성한 율법을 뭐라……? 족쇄? 도구?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느낌이랄까.
“타이니 경!”
“친구, 어찌 그런 말을……!”
그들의 뜨거운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짐에도 타이니는 흔들리지 않고 저릭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만! 오크의 전사들은 조용히 하라. 그리고 인간의 영웅이여, 누가 그리 말하던가?”
저릭은 다시 차분해진 얼굴로 반문했다.
물론 오크 중에서도 유난히 험악한 얼굴은 폭발 직전에 간신히 분노를 달랜 것처럼도 보였지만, 연 단위의 시간 동안 전우로서 서로의 목숨을 지켜 주며 지내 온 사람의 눈에는 그 감정이 또렷이 읽혔다.
‘호기심……. 됐어.’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조금은 사라진 느낌이랄까.
다만 ‘네가 나한테 해 준 말’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당장은 진실의 일부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아는 오크 친구가 늘 하는 말입니다. 그 의견이 틀린 것입니까?”
등 뒤의 일행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저릭의 입만 바라보는데.
“……틀리지 않다. 그것이 율법의 존재 의의니까.”
그들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전사님!?”
“아, 아니. 그게 무슨……?”
오히려 볼드와 나른이 놀라 눈을 부릅뜰 정도.
그들로서는 율법의 집행자인 바토르의 전사들, 그중에서도 수장인 대전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타이니는 그 대답을 듣고서야 비로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혹시나 했는데…….’
그가 아는 저릭의 가치관이 오크족의 몰락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한 것이다.
덕분에.
“인간이 그리 말하니 놀랍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지?”
그는 이어진 저릭의 물음에도 여유롭게 대답할 수 있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오크족의 몰락을 지켜보기만 한다면, 율법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말인즉, 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 오크족이 몰락할 것이라는 뜻인가?”
저릭의 전신에서 다시금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나를 투사한 게 아닌데도 눈에 보일 정도의 살기라. 성격도 여전하고…….’
광기에 가까운 투쟁심을 가진 오크족이나, 광기 그 자체를 지닌 수인족 중에서도 특출난 전사들이 분노했을 때나 나타나는 현상.
하지만 이미 그를 잘 알고 있는 타이니를 놀라게 하기에는 부족했으니.
“물론입니다.”
이어진 너무나도 태연한 대답에, 저릭이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쾅!
파아아아앙.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한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바닥이 움푹 꺼지고, 폭풍처럼 일어난 기세가 실내에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기세의 폭풍 속에서도 타이니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당장 율법을 어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말장난……!”
쿵.
다시 한번 내디딘 발걸음에 압박은 더욱 심해지는데.
“종족에 위기가 닥쳐올 가능성이 있다면! 한 번쯤 융통성을 발휘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입니다! 그냥 율법을 어기라는 것이 아니라!”
“……융통성?”
그 말에 저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기세도 점차 줄어들었다.
“검은 코뿔소족의 족장을 찾아가 확인해 보시지요. 만약 아니라면, 그냥 돌아오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설마 그런 것조차 율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 텐데요?”
솔직히 그 율법이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기에, 그 말을 하면서도 약간의 불안감은 있었다.
그런데.
“……찾아가 확인해 보라? 흠, 하지만 그조차 무언의 압박이 될 수 있다.”
저릭의 말투가 한결 누그러졌다.
“혹시나 하는 위험을 방비한다 생각하십시오. 말씀드렸듯, 최악의 경우 오크족은 이 전쟁으로 몰락하게 될 겁니다. 악마추종자들의 계략에 의해.”
“……만약에 네 말이 사실이 아니라서, 정당한 투쟁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게 된다면?”
같은 종족끼리의 전쟁이 정당한 투쟁이라 묘사되다니?
여전히 오크족을 이해하기란 어려웠지만, 지금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제 목…… 아니…….”
싸우다 죽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오크에게 목숨을 건다는 맹세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니.
“……이름을 걸겠습니다.”
“음?”
“인간족의 재앙을 두 번이나 극복하고 얻은 광휘의 기사, 타이니. 제 이름을, 그 명예를 걸겠다는 말입니다.”
상대에 맞게,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건다.
하지만 저릭은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족이 우리처럼 명예에 집착하지 않음을 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던 저릭은 이글거리는 타이니의 눈빛을 보고는 이내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난 마왕의 골통을 깨고, 이 땅에 불멸의 이름을 새길 사람이니까.’
그 명성이 하늘에 닿을 수 있도록.
그 각오를 담은 검은 눈이 저릭의 노란 눈을 잠시간 응시하자, 저릭의 사나운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비치기 시작했다.
“……너는 진심인 것 같군, 인간. 허…….”
놀랍게도 한발 물러선 저릭이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론 그럼에도.
“융통성이라…….”
생소한 단어를 연신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에는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타이니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만약 제 말이 틀렸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이 내가 굳이 인간 하나에게…….”
“이래 봬도 아스란 제국에 제법 빚을 남겨 놓았으니까요. 아스란을 적이라 말하는 오크족의 대전사님, 그 빚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 마지막 말은 저릭의 무거운 목을 끄덕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 *
타이니가 바토르에서 저릭을 만나고 있을 무렵.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 아스란을 대표하는 초인이자 귀족인 검제는 날이 저물어 가는 황도 아세리안의 중심부에서 황제를 독대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장인어른. 이리, 이리 앉으십시오.”
황제의 집무실, 새로이 황제로 등극한 전 황태자 브레들리는 화려한 책상 앞에서 일어나 편안한 말투로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신하로서 주군의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검제는 정중한 자세로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일주일 만에 뵙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황제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 일정이 끝나자마자 바로 오시는군요. 혹시 오늘도 같은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감추기 위한 한 모금.
하지만 그것을 모를 리 없음에도 검제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황궁에서 일어난 이변으로 인해 미뤄진 결혼식.
공식적인 제위 계승식을 포함한 행사는 준비해야 할 것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그랬기에 황궁과 발렌타인 가문의 시종들은 오늘도 날밤을 새우고 있었지만, 지금부터 이들이 논의할 사항은 그 축복받은 행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 머리를 질끈 부여잡은 황제가 먼저 이야기를 쏟아 냈다.
“그 이야기는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악마추종자들이 무슨 일을 벌이건, 오크족의 일은 오크족의 일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설령 오크족이 패망한다 한들 우리 제국에는 오히려 이득이 될 뿐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에 검제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크족이 전력을 보존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댈 핑계가 없었다.
‘인류애라는 말은 어림도 없을 테고.’
‘인류’라는 단어도 귀족들에게는 생소한 이 시대. 하물며 먼 고대의 전설로나 여겨지는 마계 대전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내가 타이니의 말을 믿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설령 시간 회귀의 진실을 알리는 게 그 전설적인 천재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작 그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터였다.
나아가, 다른 사람이 그에 호응하게 만드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
하물며 그것이 황제라면…….
“제국의 이익을 위한 말씀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시는 겁니까?”
황제의 말처럼 이미 얘기가 끝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소식이 있었다.
“타이니 경이 바토르로 향하는 길에 큰 기습을 받은 것 같습니다. 대수림에 남아 있던 제 사람들이 대수림 일각을 초토화시킨 산불을 목격했고, 그곳에서 마기에 썩어 버린 땅과 시체를 발견했다고 알려 왔습니다.”
“……타이니 경이요?!”
황제 역시 그 젊은 천재에게 빚을 진 상태고, 따라서 지극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공략해 볼 만한 것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오크족의 대전사와 바토르의 오크 군만이 이 분란을 종식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또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감싸 쥐는 황제.
하지만 잠시간의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여전히 검제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악마추종자들의 원한 때문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역시…….’
황제는 이 혼란의 시기에 제국군을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검제는 굳이 인류애나 초원의 평화 따위를 언급하지 않았다.
귀족들을, 특히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다른 단어가 더욱 효과적이었으니까.
“어느 쪽이라도 놈들의 흔적이 타이니 경의 길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실합니다. 손상된 황실의 체면을 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 효과적인 두 단어. 황실의 체면.
그 말에 황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호르륵.
차분하게 차를 들이켠 황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검제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보시지요, 장인어른. 어째서 오크족을 살리기 위해 제국의 힘을 쓰려고 하시는 겁니까? 설마 로히터 공작의 말처럼, 오크족을 이용해 황실 전복이라도 노리시려는 겁니까?”
“……예?”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검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벌떡 치켜들었다.
‘……그 X새끼가?’
무심결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스릉.
뒤에 존재감을 죽이고 서 있던 호위 기사 익실란이 굳은 얼굴로 검을 빼 드는 것을 보고서야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으로 제 딸의 원망을 듣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실책을 깨닫고 다급히 둘러댔지만, 그리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그 말에, 처음으로 황제의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굳건한 충성 운운하는 것 보다 그 말이 오히려 더 믿음이 가는군요.”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클로이 공녀가 그만큼 사랑스럽기도 하니까요.”
잠시간 두 팔불출의 얼굴에 비슷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이내 대화의 원래 주제를 떠올린 장인과 사위는 동시에 헛기침을 하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악마추종자들이 벌일 재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전 인류를 대상으로 말입니다. 그 전에 놈들의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제국도 황실도 다시 위험에 빠지게 될 겁니다.”
“……타이니 경이 그리 말하던가요?”
“제 판단 역시 똑같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같은 대답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장인어른.”
그 말에 검제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데.
“하지만 이렇게 연달아 증거가 나오는 마당에 계속 무시할 수도 없지요. 아직은 보는 눈이 많아 공식적으로 나설 수는 없지만, 일단 황실의 그림자들을 파견하겠습니다. 타이니 경이 전에 부탁한 ‘그 인재’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아……!”
“발렌티아에서도 소수의 정예 정도는 지원하시지요. 장인어른이 직접 나서는 것만 아니라면, 설령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더라도 제가 뒷일을 감당하겠습니다.”
황제가 보탠 말에 검제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미래에 닥쳐올 재앙을 알면서도 타이니만 위험에 몰아넣은 것 같아 적잖은 부담감을 느꼈던 검제.
그 부담이 조금 덜어지면서 심리적인 틈을 보인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린 겁니다, 장인어른. 알고 계시지요?”
황제가 무거운 눈으로 그 틈을 찔러 왔다.
그에 검제가 다시금 표정을 관리했지만, 한번 틈을 확보한 황제는 그를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타이니 경에게 진 빚도 있으니 이리하는 겁니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제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장인어른.”
“…….”
“개인적인 인연을 떠나, 황제로서 발렌티아 공작에게 하는 명이기도 합니다. 아시겠지요?”
“……명심, 하겠습니다.”
검제의 입에서 힘겨운 대답이 흘러나왔고,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
‘계속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어쩌면 타이니의 말처럼, 전생처럼 자신이 제국을 장악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잠시간 그런 불경한 생각을 떠올린 검제는 이내 그 생각을 가슴속 깊숙이, 깊숙이 묻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