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슈페리어
– 워로드를 도와!!!!
“하…….”
제나스는 전장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아마도 그의 뒤를 따르는 정예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국 유수의 기사단, 발렌티아의 블루윙에게 그들의 주 적대 종족인 오크족의 대전사를 도우라 하다니.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단장님, 이건 좀…….”
블루윙의 부단장 중 하나, 타이니와 친분이 있는 드렉슬러마저 말을 바짝 붙이며 난색을 표해 왔다.
하지만.
“각하께서 타이니 구…… 후, 타이니 경의 지시를 우선하라 하셨다. 우리는 그 명을 따른다.”
“……예.”
그렇게 어렵게 결정을 내린 가운데, 어느새 전장이 눈앞에 다가왔다.
딱 보기에도 눈이 돌아간,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오크 전사들.
코뿔소를 탄 오크 기병에 보병까지 더하면 그 수는 얼추 천은 될 듯했다.
아무리 정예라 한들 지금 여기 있는 20명의 블루윙 기사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군.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길을 뚫겠다. 뒤처리를 부탁한다.”
– 물론.
변조된 목소리의 짤막한 대답에 제나스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불편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신분을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임무이니만큼 얼굴을 가리고 표식까지 지운 것은 피차일반이니, 급박한 상황에서도 동지애 따위가 생길 틈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차치하고 나더라도.
‘어째, 그날 크레임 궁에서 각하를 습격한 놈들 같단 말이지…….’
이런 의심까지 들었으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무려 황실에서 붙인 손들.
대충 봐도 백 명은 넘어 보이는 복면인들은 이 상황에서 꼭 필요한 전력이었다.
결국 제나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전면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가자!!!”
“하!!”
제나스의 고함에 드렉슬러를 비롯한 기사들이 일순간에 가속을 시작하며, 각자의 무기에서 길쭉한 마나 블레이드를 뽑아냈다.
모두가 차징 돌격을 하면서도 마상창 따위는 필요 없는 블레이더급 이상의 강자들.
블루윙의 최정예가 일시에 뿜어낸 마나 블레이드가 제나스를 중심으로 묘한 패턴을 그리며 ‘얽혀’ 들어갔다.
우우우웅.
이내 나타난 것은 20기의 기마를 모두 감싸는 거대한 푸른 날개.
“우오오오오!”
푸른 날개를 두르고 한순간에 몇 배로 가속한 기사단이 하나가 되어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선두에 선 제나스의 검에서 뿜어진 은빛 마나 블레이드를 중심으로 뭉친 그들의 모습은 마치 푸른 날개를 단 거대한 은빛 독수리 같았다.
“가자아아아!!”
“우아아압!”
이것이 바로 블루윙 기사단의 정체성이자 모태인 ‘푸른 날개’.
육체적으로 월등한 오크 전사들에게 인간족의 기사단이 경계 대상이 되는 이유. ‘집단 전투 스킬’. 푸른 날개는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절기였다.
그리고 그 절기는 이름값을 충분히 해냈다.
–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진짜 거대한 독수리가 오크족 군대의 측면을 후려친 것처럼 수십의 오크 전사가 한순간에 피 보라가 되어 흩뿌려지고, 뒤이어 그 이상의 숫자가 초 단위로 분쇄되며 진형이 꿰뚫렸다.
그렇게 성과를 낸 푸른 날개가 사라지기 직전.
그 뒤를 따라온 검은 복면인들 백여 명이 일순간 말 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끄, 끄륵!”
“컥!?”
“끄악!”
이성을 잃고 저릭에게 돌진하던 오크 중 다수가 갑자기 목이나 눈을 감싸 쥐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뒤쪽으로 번개처럼 움직이는 복면인들의 모습에 제나스의 시선이 살짝 돌아갈 때.
– 어딜 보나? 당신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이곳은 부하들에게 맡겨라.
그림자의 수장이 보기 드물게 길게 말하며 전장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은빛 오러와 섬뜩한 검은 마기가 충돌하고 있는 중심부로 돌진하는 타이니의 모습이 있었다.
‘저런!?’
그 모습을 보자 자연스레 떠오르는 주군의 명령.
– 타이니의 지시를 따르되,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녀석을 구출해서 빠져나와라. 녀석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빌어먹을. 타이니 군, 이게 뭐 하는 짓인가요.”
제나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내심 대전사가 오크 전사들을 열심히 상대하다 힘이 다해 죽길 바랐건만.
– 빌어, 먹을?
왜인지 말꼬리를 잡는 그림자 수장의 목소리는 깔끔히 무시했다.
이래서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오크 대전사와 흉측하게 변형된 거인 오크, 그리고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뼈다귀 말을 탄 갑옷 기사 둘.
어느 하나 만만해 보이는 이가 없었지만.
“그래, 한번 죽어 봅시다. 후.”
제나스는 가슴에 힘을 빡 주고는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 잠깐 사이, 그를 재촉하던 그림자의 수장은 이미 그 살벌한 전장 안으로 뛰어든 뒤였다.
* * *
타이니는 이를 갈며 전장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제나스와 사신의 등장으로 한숨 놓는가 싶었더니, 금세 저릭이 위태롭게 밀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젠장, 오러는 아직 무리인데.’
그래도 자신이 끼어드는 수밖에.
우우우웅.
“원거리에서 깔짝대는 것은 취향이 아니지만…….”
파바바박.
적어도 놈의 신경 정도는 긁을 수 있길 바라며.
“타압!”
파아아아앙.
월랑을 타고 달리며 해머 끝으로 날린 노을빛 구체가 쏜살같이 날아가, 저릭을 공격하던 데스 나이트의 뒤쪽을 가격했다.
하지만 흘깃 뒤를 돌아보는가 싶던 놈은 이내 그를 무시한 채 저릭을 향한 공격에 집중할 뿐이었다.
쓰읍.
‘역시나.’
자신의 마나 장악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마법사가 아닌 이상 원거리 공격력에 큰 위력이 담길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도 무시할 수 있는지 보자!”
“컹!”
파아아아앙.
가속에 다시 가속, 모든 마나의 힘을 속도에만 집중한 은빛 늑대와 기수가 그야말로 번개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수백 미터의 거리를 한순간에 좁혀드는 순간.
‘지금!’
그의 결심에 따라 중력 속성이 극단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6분의 1로 가벼워진 몸으로 돌진하던 월랑과 타이니의 무게는 그 순간 원래의 묵직한 상태로 돌아온 뒤, 곧바로 다시 16배 더 무거워졌다.
속도를 유지한 채 무게만 극단적으로 증폭한 그 충돌 직전의 순간, 좀 전까지 그를 무시하던 대검을 든 데스 나이트가 뒤로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몸에서 만지면 묻어 나올 것 같은,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꽈아아아아앙!
“큭!”
충돌의 순간, 놈에게 돌진했던 타이니와 월랑은 오히려 십수 미터를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그가 가진 최고의 돌진기가 오히려 스스로에게 불쾌한 타격을 선사한 것.
게다가 잠깐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몸속에 침입한 기운이 빠르게 체내의 마나를 변질시키며 내상을 심화시켰다.
그럼에도 상대가 받은 타격은 고작 해골마가 몇 걸음 물러선 것이 고작이었다.
– 방해자!
게다가 조금의 이성은 남아 있는 듯,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과 함께 해골마가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 왔다.
그와 동시에 휘둘러지는 대검.
조금 전보다 더욱 짙고 불쾌하게 끈적이는 기운이 그 위에서 일렁이자, 타이니의 안색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암흑 오러.’
상서로운 빛을 뿜어내는 중간계의 오러와는 달리 오히려 빛을 빨아들이는 마기의 정점.
지금 몸 상태로는 피할 수도 없는 속도였다.
그렇다고 그대로 정면에서 막아 낸다면.
‘그대로 박살이 날 거야.’
어깨에 걸친 초월무구 아니무스라면 어떻게든 받아 낼 수 있겠지만, 그 아래 자신의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집중력이 극대화되고, 가속된 사고가 체감되는 시간의 흐름을 늦추었다.
‘큭, 일단 이것부터!’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그의 마나 장악력이 암흑 오러의 침습을 가까스로 고정시키고, 경지를 초월해 강화된 육체가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느릿하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
쓸 수 있는 수는 이제 하나뿐이었다.
우우우웅.
‘제발 견뎌 줘라, 스탬프.’
타이니는 자신의 애병을 향해 그렇게 기도하며 억지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우우웅.
그의 손에서 갈라져 나간 붉은색 마나와 노란색 마나가 서로 반대되는 중력 속성을 품고 스탬프의 망치 머리에서 섞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스탬프에서 불쾌한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꽈드득.
대수림을 나올 때 받은 습격에서 단 한 번 써 봤던, 파멸 속성을 이용한 제대로 된 공격.
그 대가는 그란돌이 만든 아티팩트, 스탬프의 파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파멸 속성에 대한 통제력이 그때보다는 나아졌다는 것.
타이니는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한 스탬프를 어떻게든 움켜쥐고서 모든 마나와 육체의 힘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으아압!”
다가오는 대검을 향해 그대로 망치를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엄습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몸을 훅 밀어 내는 충격파와 함께 손아귀가 왠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짜릿한 충격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며 일순간 육체의 통제력을 상실했다.
충격파 속에서 월랑 역시 자연스레 역소환되고.
쿵.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이 흙바닥에 몇 번이나 튕기고 나뒹굴며 자연스레 의식이 흐려져 갔다.
하지만.
‘지금 정신을 잃으면 죽는다!’
다행히도 필사적인 의지력으로 간신히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가볍게 머리를 털어 다시 한번 정신을 다잡은 타이니는 염체에 남은 미약한 마나를 바탕으로 대기에서 느껴지는 마나를 최대한 끌어모으려 노력했다.
어느새 주변에 만연한 마기 특유의 그 끈적끈적한 느낌이 그것을 방해하려 했지만.
‘대미궁에서도 해 본 일이야.’
우우웅.
그의 마나 감응력과 영혼의 힘은 이미 상식을 초월한 지 오래.
원래부터 8단계 오러익시더급의 격을 가진 그의 영혼은 정령술을 통해 4번의 질적 상승을 이루었고, 심지어 그 힘이 초월무구 아니무스로 인해 한층 더 증폭되기까지 했다.
그 덕분에 오버리바운드를 걱정하지 않고 일격, 일격에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던 최근의 경험은 염체의 마나 회복 속도를 더욱 강화시켰으니.
또 다른 자신이라 할 수 있는 염체는 그것을 토대로 다시금 주변의 마나를 무섭도록 빠르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내 다시 짜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끄으으…….”
지금 주변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몸의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의식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영맥에 쌓인 더러운 마기를 밀어 내고 깨끗한 마나를 받아들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온몸의 불순물을 씻어 내고 다시 깨끗한 마나를 채우는 과정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어느 순간 타이니는 확 달라진 감각과 함께 주변의 상황을 조금씩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의미인즉.
‘넘어섰다!’
전생의 경험이 있다 한들 본래대로라면 수없는 고련을 통해 차근차근 다시 쌓아 나아가야 할 경지를 한순간에 뛰어넘었다는 것.
마나유저 5단계, 세간에서 슈페리어급이라 부르는 경지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일순간 더욱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한 마나가 그 짐작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이내.
‘저릭, 사신, 제나스……. 이런…….’
그는 상황이 생각보다 더욱 좋지 않음을 인식하고는 삐걱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큭.”
신체가 막 회복된 참인 데다 오른손에 남은 것은 스탬프의 자루뿐.
경지가 상승했다 한들, 당장 이 상태로는 직전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움이 될 방법은 있었다.
‘……가능해.’
슈페리어급의 특징은 바로 속성과 마나 블레이드를 결합한 ‘소울웨폰.’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보통은 제나스처럼 마나 블레이드에 속성을 싣고 중장거리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가 다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다르다.
몇 번이고 이중 중력 속성의 충돌을 이용해 온 몸이다.
스스로 파멸 속성이라 이름 붙인 이 괴상한 현상도 엄연히 자신이 다루는 속성.
“충분히, 가능해.”
우우우우웅.
타이니는 정신을 집중해 자루만 남은 전투 망치의 끝에 검은색 구 모양의 에너지체를 생성했다.
주변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며 기묘한 패턴으로 응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에너지체.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타이니의 몸이 이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