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다시 제국으로
– 성물 코르(Cor)가 사라졌다.
저릭을 찾아 바토르에서부터 달려온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복귀를 서두르던 오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제는 단순히 설화의 파편 정도로 치부되는 성물의 실종 그 자체보다는, 그 과정에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검은 기사가 쳐들어와 성물을 지키던 전사들을 참살했다던데.”
“바토르의 전사들이 그렇게 쉽게 당했다고?”
“오러 비슷한 걸 쓰는 괴물이었다고…….”
검은 기사, 데스 나이트 단 한 기가 쳐들어와 경비를 서던 전사들을 죽이고 성물을 강탈해 갔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
단 한 놈에게 성지가 침범당하고 성물이 강탈당했다는 사실이 오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데스 나이트라고 하던데.”
“악마추종자 놈들이 벌인 일이라고…….”
“역시 그 해충들이 오크족을 노리고 있는 거야!”
오크족 전체가 커다란 모욕을 당했다는 데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수백 연래 최악의 희생자를 만들어 낸 부족 전쟁이 종식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 그 피해자인 8대 부족의 정예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상황.
그 분노는 그들 모두에게 빠르게 공감대를 형성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의 시기, 모든 게 음모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면서도 아직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지 못했던 여덟 부족.
그중 네르구이를 제외한 일곱 족장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놈들을 박살 내야 한다!”
“이건 오크에 대한 도전이오, 대전사!”
애초에 검은 코뿔소족에 대항해 싸웠던 세 부족의 장, 바타르, 텐거, 누다르가가 앞장서 목소리를 높이며 상석의 뼈 의자에 앉은 저릭을 바라보았고.
“동의하고 따른다. 우리 흰 코뿔소족이 선두에 서겠다!”
커다란 뼈 투구를 쓴 건장한 체격의 전사, 울이 그에 호응했다.
“우리 붉은 랩터족 역시 선두에 서길 원한다!”
뒤이어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전사 탈바가 커다란 뼈의 창으로 바닥을 찍으며 호기롭게 말을 받았다.
“네르구이에게 호응한 어리석음의 대가를 그리 치르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푸른 하마족 역시 따르겠습니다.”
주름이 선명한 피부에 푸른 문신을 새긴 노년의 주술사, 우하락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스승님이 그리 말씀하시면, 저도 따라야지요. 푸른 랩터족 역시 선두에 서겠습니다.”
마찬가지로 푸른 문신으로 뒤덮인 젊은 여자 오크, 트세그 역시 자신의 단창을 들어 보이며 호응했다.
그에 저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의 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족장들의 뜻은 잘 들었다. 나 역시 그대들의 분노에 공감하는바, 이미 천명한 대로 오크족은 악마추종자들을 섬멸할 때까지 어떤 분쟁도 허가하지 않겠다!! 이 세상의 해충들을 뿌리 뽑자!!!”
“우와아아아아!”
대형 천막 밖으로도 고스란히 들리는 분노 어린 함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크 전사들이 그 열기에 움찔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세였다.
그리고 그 뜨겁고 거센 분노에 휩쓸린 오크들은, 그들의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빠졌다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전령이 온 타이밍으로 보면, 내가 바토르를 떠난 직후에 받은 습격이다.”
“……그렇겠지.”
“그 쓰레기들, 악마추종자들의 본거지가 발견되면 오크족 전체가 달려가서 박살을 낼 분위기다.”
저릭이 콧김을 내뿜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딴에는 그 회의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해 주려는 목적이었는지 몰라도, 데스 나이트가 성물을 강탈해 갔다는 소식을 접한 타이니는 사라지지 않은 두통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쥘 뿐이었다.
“그래서 놈들을 어떻게 발견할 건데?”
“음?”
“……생각 안 해 봤어?”
“네가 아는 거 아니었나, 친구?”
그 태평한 대답에 타이니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바보, 오크’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루나에게 저릭이 사나운 눈빛을 보냈지만.
“내가 알면! 어떻게 해서건 그놈들 먼저 박살 냈겠지!!”
이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타이니의 모습에 그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끙, 젠장. 그렇겠군. 그럼 어떻게 하지?”
어흐흐, 이 오크 새끼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 중요한 사안은 왜 논의를 안 한 건데!?”
“……다들 화가 나서 분노를 표출하기 바빴다. 음, 방법이야 알아서들 생각해 보겠지.”
“그게 회의냐! 그냥 궐기 대회지!!”
“궐기 대회가 뭐냐?”
“……허으.”
타이니의 신음에 이어, 그의 옆에 기대고 있던 루나가 ‘역시 바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다시 한번 저릭의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저릭은 잠시 루나를 째려보고는 끙, 하며 짧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공용어 아직도 가끔 어렵다. 아무튼, 방법은 알아서들 생각할 거다. 바타르도 그렇고, 똑똑한 오크들도 많으니.”
“대전사가 주도해야 하는 거 아니냐?”
“오크의 대전사는 대표하는 자일 뿐 오크로드가 아니다. 율법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부족의 모든 일은 족장들이 정한다.”
너무나도 태연한 대답에 타이니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저릭은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뭘 그리 급하게 생각하나? 네 말대로라면 일단 우리 종족의 몰락은 막았다. 그리고 이제 놈들이 무슨 수를 쓰든 부족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오크는 단순하지만, 단순한 만큼 결정을 쉽게 바꾸지도 않는다.”
“성물을 잃었잖아…….”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어차피 몇백 년간 써먹을 일도 없었던 고대의 유산일 뿐이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초인급 미만의 마물들을 불태울 수 있는 게 성물이야. 앞으로의 전쟁에서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태평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타이니가 목소리를 높이는데, 저릭이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그래서? 우리 오크 부족의 전력이 그 성물들보다 못할 거 같은가?”
“……그건 아니지.”
그 떨떠름한 목소리에 저릭도 쓴웃음을 지으며 타이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럼 된 거다. 너는 잘 해낸 것이니 너무 자책 마라. 굳이 따지자면 성물을 잃어버린 것은 내 책임이니까. 내 잘못이다.”
그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 타이니의 가슴속 끓어오르던 불길을 어느 정도 식혀 주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루나가 ‘오! 오크. 제법.’ 하고 속삭이자 저릭이 ‘크르르.’ 맹수 같은 신음을 토하며 그녀를 노려봤고, 그에 루나는 모른 척 딴청을 부리며 타이니의 등에 슬쩍 숨어들었다.
그 작은 트러블이 타이니의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만들었다.
“그래, 그건…… 그렇지.”
“……뭐?”
루나에게 살기를 내뿜고 있던 저릭의 시선이 제게 옮겨 오자, 타이니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네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라는 말이지.”
현자의 마탑에서 나온 결론에는 무언가 다른 게 있었던 것 같지만, 당장은 그게 뭔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그걸 감안한다 해도 성물들이 현재 오크 종족의 전력 이상의 가치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부수지 않고 강탈해 갔다는 게 마음에 좀 걸리는데…….’
그 거대한 수정을 그대로 들고 사라졌다는 데스 나이트.
그 얘기를 듣자마자 카룬에서 성물의 핵을 바다로 던졌던 흑마법사의 행동이 떠올랐다.
후셀이 튀어나와 자신을 공격하던 그때, 놈은 사실 성물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대체 왜……?’
놈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성물을 가져간 것일까.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에 다시금 한숨이 나오는데, 갑자기 천막의 문이 열리며 굳은 표정의 제나스가 터덜터덜 걸어 들어왔다.
“타이니 군, 안 좋은 소식이 또 있어요.”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작은 수정구였다.
한 방향 통신밖에 안 되면서 값은 너무나도 비싼 일회용 통신구가 실시간으로 푸른빛을 잃으며 새하얗게 변해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상황 보고를 드리려고 통신을 했는데, 나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카룬의 왕실에 대규모 테러가 있었다고…….”
“뭐라고요!?”
타이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고.
“거기서도 성물 후마니타스가 도난당했다는 소식입니다. 거대한 수정 모습 그대로 커다란 악마의 품에 안겨서 하늘로 사라졌다는군요.”
“……빌어먹을.”
타이니는 이를 악문 채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전사가 자리를 비운 바토르, 그리고 하나뿐인 마도사 초인을 잃은 카룬.
하나같이 허점을 제대로 공략당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확실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놈들의 목적은 분명 성물이다.
어쩌면 전생에 벌어진 무수한 재앙의 이면에는, 인류의 전력을 감소시키는 것과 더불어 놈들이 성물을 노린다는 사실을 감추려는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왜……? 왜일까?’
혼란스러웠지만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이제 제가 아는 미래가 완전히 바뀌겠…… 아니 바뀌었군요. 하, 씨X…….”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한 생각만 드는데, 제나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타이니 군.”
“예?”
“오크족과 카룬의 성물이 연이어 털리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덕에 세상의 모든 왕국이 놈들이 성물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거야 이미 앞서 카룬과 제국에서 벌어진 일만 해도…….”
“아니, 아니에요. 타이니 군이 전부 막아 낸 만큼, 이전까지는 그냥 뜬소문 취급하는 나라가 대부분이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워로드 님?”
제나스의 갈색 눈동자가 저릭을 응시하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하…….”
타이니가 어이가 없다는 눈길로 저릭을 쳐다보고, 루나도 들으라는 듯 ‘역시 오크는, 바보다’ 하고 중얼거렸지만, 그는 얼굴을 살짝 붉힐 뿐 입을 떼지 못했다.
“이제 실제로 성물이 두 개나 탈취당했으니, 세간에서도 제대로 경각심을 가질 겁니다. 그리고 남은 성물들이 있는 곳의 방비는 이미 성물을 잃어버린 두 곳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무슨! 바토르에도 내가 있었다면……!”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없었고, 급했잖아.”
“쩝…….”
“내가 생각했어야 했어. 젠장, 아무리 급해도 방비를 하라고 했어야…….”
그 자책을 본 제나스가 다시 웃으며 타이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타이니 군은 정말 잘해 줬어요. 아무도 타이니 군한테 머리 쓰는 걸 기대하지 않아요.”
“이런 씨…….”
정색하는 타이니를 보며 제나스가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농담입니다. 영웅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한 농담. 하하하.”
그런데 재미는 더럽게 없는 그 농담이, 정확히는 그 말 가운데 한 단어가 타이니의 마음을 건드렸다.
“영웅……이요?”
“네, 영웅. 카룬도 망하지 않았고, 오크족은 희생자가 많긴 해도 몰락하지 않았죠. 제국은 아예 건재합니다. 아니, 오히려 저 같은 천재가 살아남았으니 훨씬 나은 상황이죠.”
뜬금없는 자기 자랑이 섞이기는 했지만, 제나스의 눈빛은 좀 전과는 달리 진지하기만 했다.
“스스로, 천재래. 쟤도, 바보야?”
“정상은 아닌 듯하다.”
루나와 저릭이 작은 소리로 비웃었지만, 제나스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타이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타이니 군이 애쓴 일이 결코 허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깨 펴세요. 당당하게.”
그 조금은 과한 듯한 위로가 흔들리던 마음을 다시금 다잡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사람은 타이니 군이 아니라 우리죠. 아니, 세상의 모든 사람이겠죠. 뭐, 대다수는 타이니 군의 공로를 모르겠지만.”
제나스가 쓴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
타이니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일단은 제국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호오?”
“저는 지금 분명 방향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검제 영가…… 흠, 흠, 공작 각하께서 돌아오라고 하신 걸 보면 무슨 생각이 있으신 걸 테죠. 거기에 기대를 걸어 보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겁니다.”
제나스는 타이니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바로 전장을 떠나기로 했다.
다음 날 새벽.
아직도 정리가 끝나지 않은 어수선한 전장을 떠나려는데.
“전사들이여! 오크의 은인을 배웅하라!”
“윽!? 저릭!?”
멀리 천막의 중심에서부터 저릭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전장 전체에 울려 퍼지더니, 쿵 하며 동시에 내디딘 발소리가 일대를 뒤흔들고.
– 은인을 향해 경의를!
전장의 모든 오크 전사들이 동시에 공용어로 복창하며 그들을 향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온 세상을 진동시키는 듯한 엄청난 목소리.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수십만의 전사들이 그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모습은 살벌함보다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웅장함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 가장 안쪽에서.
“기억해라. 내 친구, 타이니! 오크는 은혜를 생명으로 갚는다!! 내 목숨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라!”
오크의 대전사가 초월무구 아너를 꺼내 들며 허공에 거대한 은빛 늑대를 그림과 동시에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우와아아아아아!
천지를 떨어 울리는 엄청난 규모의 함성 속에서 제국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일행.
그 선두에 선 타이니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