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다시 만난 검제
“푸하하하, 표정 한번 볼만하구나. 크크크크.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일단 거절해 놨으니. 아직 폐하와 클로이의 혼례식조차 미루고 있는 마당에 무슨 1황녀 전하의 혼사냐? 크흡.”
뭐가 그리 웃긴 건데…….
“게, 게다가 그분도 워낙 성정이 독특하셔서 아직 혼약을 안 하신 거니, 아마 얘기를 들어도 거절하실 거다. 크하하하. 녀석 표정 참……!”
뭐가 그렇게 웃기냐고!
“어우. 흐미, X발.”
검제의 너스레를 들으면서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웃고 있던 성질 더러운 영감의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
“뭔 발?”
“아으. 정말, 진짜 놀랐잖아!!”
“잖아? 어쭈……?”
“……요!”
이번만큼은 검제의 잘못이 있는 만큼 과감하게 개겨 보려 했지만, 엄습하는 기세가 아직은 버거웠다.
그것조차 테스트였을까.
이내 살벌하게 공간을 옭아매던 검제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호오, 그래도 그사이 많이 발전했구나. 역시 놀라워.”
일순간에 다시 담담하게 변하는 표정이 미친놈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그사이 미묘하게 변한 듯한 검제의 기세가 더 신경 쓰였다.
“……그러는 각하도, 그냥 놀지만은 않으셨군요.”
아직 오러익시더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거의 근접한 느낌이랄까.
경지가 높을수록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몇 달 사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감탄한 표정에 검제가 새삼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야지. 너한테만 다 맡겨 놓을 수는 없으니.”
역시나 노력하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싶었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은 속마음과 달랐다.
“하지만 아직 모자랍니다. 저릭도 벌써 오러익시더급에 올랐습니다. 분발하세요.”
그동안 당했던 갈굼과 직전까지 당했던 놀림 때문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
그 순간 ‘콰직’ 소리와 함께 검제의 손에서 책상 귀퉁이가 부서져 나갔다.
‘에이, X팔.’
등골이 섬뜩해지며 제 주둥이가 원망스러워졌지만, 어차피 깡 하나로 살아온 인생.
타이니는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잠시간 검제의 푸른 눈이 무섭게 그를 응시했지만, 예전에도 그랬듯 물리력을 동반하지 않은 영압은 그에게는 살랑이는 봄바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이내 고개를 숙인 검제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끙.
“……좀 더 노력해 보마.”
이를 갈며 힘겹게 내뱉은 검제의 목소리에 타이니는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 분발하라는 말은 반사적으로 나온 것이었지만, 그 속엔 진심도 조금은 담겨 있었다.
그래도 검제가 기운은 내게 해 줘야지.
“괴력, 신검, 신궁.”
“음?”
“전생에는 그런 말로 당신과 나, 그리고 에스티나를 비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흥, 그래. 그건 전에 들었다. 여전히 네가 나와 비교되었다는 건 못 믿겠다만.”
흥, 믿고 있으면서.
쯧 하고 짧게 혀를 찬 타이니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에스티나야 정령술사인 데다 무기부터 우리와 다르니, 실제로 가장 많이 비교당한 것은 당신과 나였습니다. 출신 신분도 극과 극이었으니까요.”
“뭐, 이제 와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실력이 나와 비슷했다고?”
아니, 내가 최강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데. 적어도 일대일로는 말이야.
‘그치만 지금은 자존심 싸움을 할 때가 아니니.’
진심은 미소에 숨기고, 가슴을 편 채 그 자부심만 내보이기로 했다.
“수명도 짧은 인간인 우리가, 대대로 이름을 잇는 오크의 대전사, 짐승의 왕, 기갑왕, 여신의 기사보다도 먼저 최고의 기사로 언급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말에 검제는 눈썹을 미미하게 떨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흥. 적어도 내가 그리드 녀석은 확실히 눌렀다는 게 기분은 좋군.”
이 양반이 솔직하지 못하게.
“뭐, 그리드 그 양반이 평가 절하된 것도 있지요. 아무래도 초월무구가 많다 보니, 무구발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뭐 그래도…….”
살짝 흔들리는 검제의 눈을 보며, 타이니는 또박또박 확언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최강에 가까웠다는 것은 분명하지요. 마지막을 함께한 우리의 최후가 말해 주듯이요.”
그 말에 잠시 방 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지만.
“뭐, 이 시대 최고의 기사가 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이제 그 영광 이상을 노리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도 그 이상을 노려 주셨으면 합니다. 꼭이요.”
나는 시대의 최고를 넘어 역사에, 세상에 내 이름을 새길 테니까.
‘반드시!’
미래의 진실과 현재의 각오는 합쳐져 흔들리지 않는 결심이 되었고.
그 결심은 그 어떤 때보다 진실된 말이 되어 검제의 눈에, 가슴에 박혀 들었다.
그러자 검제 역시 타이니와 비슷한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작은 성취에 만족하시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피식.
“아직 까마득히 밑에 있는 놈이 나를 가르치려 드는구나. 어디 그럼, 얼마나 성취가 있었는지 직접 봐주마.”
어라?
“……예?”
“왜 그러느냐? 여태까지 거창하게 폼 잡아 놓고 이제 와서 뺄 생각은 아니겠지?”
‘이, 이게 아닌데.’
하지만 마치 겁을 먹은 거냐며 도발하는 듯한 검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오기가 솟구쳐 올랐다.
“하, 하, 하. 그럽시다, 그럼.”
젠장. 그래, 한번 죽어 보자.
타이니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쥔 채 검제의 뒤를 따랐다.
* * *
“경지의 차이가 있으니 초월무구 하나 정도는 장비해도 괜찮은데?”
연무장에 있던 둔탁한 철검을 공중에 몇 번 휘둘러 본 검제가 씩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기왕이면 같은 조건으로 하죠.”
쿵.
타이니 역시 호기롭게 미소를 지으며 아니무스를 내려놓고는, 듬직한 워해머 한 자루를 손에 들었다.
파아아앙.
“좋군.”
드렉슬러 전용으로 맞춰진 듯한 워해머는 지금 그가 쓰기에는 다소 짧았지만, 날카로운 진검이 아닌 둔검을 쓰는 검제 역시 조건이 불리한 것은 피차일반이었다.
“오러는 쓰지 않도록 하지.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쓰셔도 됩니다.”
“뭐?”
“놀라게 해 드릴 것이 있어서요.”
타이니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검제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오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같은 오러나 그 이상의 권능, 혹은 몇십 배 이상의 에너지를 동원하는 물량전뿐이었다.
이를테면 마법사 수십 명이 모여 시전하는 강력한 대마법이라든가 기사단의 집단 전투 스킬 같은 것들.
당연히 그중 타이니에게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좀 멍청하긴 해도, 근거 없이 허튼소리 할 놈은 아니지.’
그러니 일단은 무슨 짓을 벌일지 지켜보기로 했다.
“……재밌구나. 뭐, 가능하다면 내가 오러를 꺼내게 해 보거라.”
“마음대로 하시지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두 사람의 얼굴에 나란히 떠올랐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알아 두거라.”
“예?”
“넌 지금까지 잘해 줬다. 그래서 네가 말했던 많은 미래를 바꿨지. 막연하게 추측했던, 악마추종자들에 대한 음모라는 것도 덕분에 확인했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던 검제가 마음에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이제 네가 말한 막연한 재앙들도 그 시기가 모조리 달라질 거다. 뭐 애초에 내용을 제대로 아는 것도 몇 없었지만.”
“……알고 있습니다.”
“인상 쓰지 마라. 널 탓하는 게 아니니까. 적어도 제국과 연합의 전쟁, 엘프와 드워프의 전쟁은 미리 막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비록 피해는 컸지만 결국 오크들도 아군으로 삼았고 말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넌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검제는 잠시 타이니의 표정을 살피더니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다만 아까 제나스와 네가 보고했던 데스 나이트……. 그런 마물은 네 이야기에는 없었다. 알고 있지?”
“……예.”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파. 현세에 초인급 마물은 대미궁의 심부에나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이야.”
“후세에서도 차원의 벽이 흔들리지 않는 이상 마계의 초인급 이상의 마물은 소환되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었지요. 그리고 그 차원의 벽을 아예 뚫고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강림’이라고, 현자들이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더 문제니까 하는 말이다.”
차원의 벽이 흔들렸다.
두 사람 다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계의 강림을 대비하려는 자로서 절대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오크족의 성물 코르와 카룬의 성물 후마니타스가 도난당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악마추종자들의 흔적을 쫓으려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는 거지.”
“그렇겠죠?”
뻔한 말을 왜 굳이 새삼스럽게 설명해 주냐는 듯한 타이니의 눈빛에, 검제는 피식 웃으며 확언하듯 말했다.
“지금 이 대련의 결과에 따라, 그리고 향후 정국의 변화에 따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해 오던 것을 조금 변형하여, 네 녀석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대비하게 만들거나…….”
“거나?”
“아니면, 일단 전생의 경지를 되찾을 때까지 죽도록 수련하거나.”
“……네?”
“그러니 최선을 다하거라. 네가 보여 주는 것에 따라 내 생각도 바뀔 테니까.”
어느 쪽이 좋은 건데?
실력이 예상 이상이면? 또 이하면 어찌 되는 건데?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진지해진 검제의 눈빛을 보니 들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실망하시진 않을 겁니다.”
타이니는 곧바로 워해머의 끝에 검은색 구체를 생성해 냈다.
바로 중력 속성의 이중 변형, 파멸 속성으로 빚어낸 소울웨폰을.
우우웅.
검은색의 구체가 불규칙적으로 커졌다 줄어들며 이상한 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과연.
‘검제는 이것에 대해 알까? 모를까?’
이 또한 중력 속성에서 파생된 수법인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검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그건?”
모른다!
‘얼씨구?’
타이니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모른다면 꽤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을지도.
“겪어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자, 먼저 들어오시지요.”
타이니가 망치 머리에 이상한 검은색 구체를 매단 채 손을 까닥이자.
“……건방진 놈.”
쿵.
검제는 피식 웃더니 이내 쏘아지듯 몸을 날리며 그대로 철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억.
마치 허공을 쪼갤 듯이 휘둘러진 철검에서 붉은 마나블레이드가 십여 미터나 뻗어 나와 타이니를 덮쳤다.
예고한 대로 오러는 쓰지 않았지만, 그냥 챌린저급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강력하고 범위가 광대한 마나블레이드.
거기다.
우우우웅.
미약하게 진동하는 마나블레이드는 분명히 ‘중력’ 속성까지 품고 있었다.
‘중압검기(重壓劍氣).’
그것을 보는 타이니의 눈이 빛났다.
그 무력을 파악해서 비슷한 양의 오러로 맞받아치면 오히려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검제 특유의 ‘무거운’ 칼날.
전생의 자신이 사용하던 소울웨폰 ‘폭진(暴殄)’에 비해 단발성 위력은 약하지만, 검제는 저런 끈적끈적하고 묵직한 공격을 지속적으로 날려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생과는 확연히 다르다.
타이니는 별 망설임 없이 그 무거운 공격을 향해 마주 망치를 휘둘렀다.
그리고.
우우우우웅.
타이니가 ‘블랙홀’이라 명명한 소울웨폰이, 그가 있던 공간 전체를 덮치려던 마나블레이드의 일부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뭐!?”
당황한 검제가 멈칫하는 찰나, 단숨에 돌진한 타이니가 그대로 그를 향해 워해머를 휘둘렀다.
“하!?”
반사적으로 휘두른 철검에서 방금보다 몇 배는 거대한 마나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왔지만.
우우웅.
슈슈슈슉.
그 공격 역시 타이니의 워해머에 부딪치는 순간 맥없이 검은색 구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근거리에서 이루어진 믿기 어려운 공방.
‘이게 무슨?!’
평생 겪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
“조심!”
삽시간에 무방비 상태가 된 검제의 머리 위로 워해머가 떨어진 순간.
검제의 전면에서 붉은 ‘오러’가 솟구쳐 올랐다.
– 꽈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