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8
18화. 루센티아 (1)
검은 머리 소년이 필레스 영지를 떠나던 날 오후.
황실에서 조사단을 파견한다는 공문이 필레스 영지에 전해졌다.
그때부터는 기사들의 소문 단속도 한계에 달해 사건의 진상 일부가 영지 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영주님이 암살당했다고?”
“흑마법사였다는 소문도 있던데?”
“흑마법사? 그게 뭔데?”
“악마의 하수인…….”
“설마 우리한테까지 피해가 오는 거 아냐?”
“에이, 설마…….”
일부의 진실은 곧 흉흉한 소문으로 발전했고, 자연히 영지민들 사이에서는 외출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점차 인적이 드물어진 필레스의 거리에 회색 로브를 두른 낯선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품이 넓은 여행자용 로브를 입었다 해도 손발 정도는 드러나기 마련이고, 영지에 들어서서는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전신을 완전히 가린 회색 로브의 인영은 말 그대로 잿빛 그 자체를 뒤집어쓴 듯 유령처럼 움직였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와 마주친 몇몇 사람들도 그저 풍경처럼 자연스레 지나칠 뿐 그의 행색을 의아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기묘한 상황은 회색 로브의 이방인이 내성 입구에 다다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 정지!”
“누구…….”
“일 봐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온 한 마디.
그 순간 낯선 이를 저지해야 할 병사들의 눈이 멍하니 풀려 버렸고, 회색 로브는 그들 사이를 무심히 지나쳐 순식간에 영주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영주 대행인가?”
그렌은 쇠를 긁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에 무심코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내 시야에 들어온 회색 로브.
관내에서 보지 못한 괴상한 복장에 그렌은 곧바로 검에 손을 올렸다.
“누구냐?!”
하지만.
“묻고 싶은 게 있다.”
딱.
회색 로브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그렌의 눈이 멍하니 풀렸다.
“영주가 죽은 사건에 대해, 네놈이 아는 것을 전부 말해라.”
“시작은…….”
그는 흐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회색 로브의 물음에 순순히 답했다.
“영주의 시신은 어디에 있지?”
“황실 조사단의 요청에 따라, 관에 넣어서 영주님 침실에…….”
“좋다. 넌 지금부터 잠들었다가 1시간 후에 깨어나라.”
한참 동안 최근 영주관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던 그렌은 회색 로브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그대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1시간 후.
“으음…….”
옅은 신음과 함께 깨어난 그는 황당한 마음에 눈만 끔뻑거렸다.
‘깜빡 잠이 들었나? 하긴, 요즘 좀 무리하긴 했지.’
불쾌한 꿈을 꾼 것도 같았지만,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괜스레 찜찜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시종장이 뛰어 들어왔다.
“그렌 경! 큰일 났습니다. 영주님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뭐!?”
화들짝 놀란 그렌은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시신을 지키던 병사들은!? 다른 기사들은!?”
“그게,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고만 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끄응. 비켜, 내가 직접 가겠다.”
그가 황급히 영주의 침실로 뛰어가던 그때.
정작 그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이미 필레스의 외성 밖, 깊은 숲속에 와 있었다.
어두운 회색 로브 주위로 음울하게까지 느껴지는 검회색 마력이 넘실거리더니, 이내 한곳으로 뭉쳐지는 듯하다가 갖가지 형상으로 변해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 형상은 숲에 서식하는 각종 육식 동물들이 정체 모를 고깃덩어리를 뜯어 먹거나 물고 사라지는 모습을 그리는 듯했다.
‘칼의 주인은 이미 죽은 상태로 여기에 버려졌다.’
즉, 놈은 범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울프 패거리를 없앴다던 녀석. 그리고 이 일이 벌어진 직후 사라진 검은 머리 꼬마. ‘그 가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놈.’
범인으로 추측되는 건 그놈뿐이다.
불가능한 경우를 모두 제외하고 본다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하나의 가능성이 진실일 수밖에 없다. 비록 그것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열세 살 꼬마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다고?’
이건 영악하다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 아닌가.
아무리 뒷골목 출신이라도…….
‘어찌 그 나이에 이럴 수가 있을까.’
정말 ‘그 가문’ 출신인 걸까?
뭐, 어찌 되었건.
“……잡아서 물어보면 되겠지.”
놈이 한 게 맞는지,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그리고 정말 놈이 범인이라면, 조직의 일을 망친 대가까지 확실하게 받아 낼 것이다.
회색 로브 아래, 검붉게 타오르는 시선이 타이니가 떠난 동북부로 향했다.
* * *
푸엣취!
“흐아.”
신나게 질주하다 보니 어쩐지 코가 간질간질했다.
타이니는 흥, 하고 코를 푼 뒤, 다시금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 빠르게 지나가는 주변 경관을 감상했다.
물론 그 여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그의 아래에서는 흙먼지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파바바박.
파아아아앙.
월랑의 네 발이 땅을 ‘가볍게’ 박차는 순간 ‘무겁게’ 터져 나가는 흙바닥.
은빛 늑대는 자욱한 흙먼지 사이를 뚫고, 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 격렬한 움직임에 따라 자연히 반동이 전해질 텐데, 등에 올라타 있는 타이니의 여유로움은 깨지지 않았다.
월랑과 완벽하게 동조된 감각은 이 질주를 스스로 달리는 것처럼 느껴지게 해 주었으니, 그 질주로 소모되는 마나를 제외하면 그가 불편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안장도, 고삐도 필요 없는 질주.
자신의 몸과 월랑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바람처럼 내달리는 경험은,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본 타이니에게도 충분히 환상적이었다.
“끝내준다!”
“컹!”
파바박.
전생에 에스티나가 그 엄청난 크기의 독수리 위에서 어떻게 완벽한 균형을 잡으며 공중 전투까지 했는지, 이 한 번의 질주로 완벽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그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몸이 더 자라고 경지가 성장한 뒤 월랑까지 더 커진다면.
‘예전 같은 크기의 워해머를 휘두르면서 고속 기동 전투도 가능해지겠어.’
전생의 그에게 부족했던 점이 자연스레 보완될 듯한 가능성이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선.
– 또 너 때문에 전체가 느려지잖아!
– 살을 빼라고, 살을!
– 이게 살이 아니라. 근, 어으…… 진짜.
더 이상 에스티나를 비롯한 동료들에게 느림보라고 놀림 받지 않아도 된다.
피식.
그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졌고, 자연스레 신이 났다.
“더 빨리!”
“아우우우!”
월랑 역시 덩달아 신이 나는지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 질주는, 본의 아니게 피해자들을 양산하기도 했다.
다다다닥.
파아아아아앙!
히이이이잉!
“뭐, 뭐야?”
“말 잡아!”
길을 지나가던 말들이 놀라 방향을 틀고, 그 뒤를 흙먼지가 부옇게 뒤덮었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사람들 사이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지금 뭐가 지나간 거야?!”
“늑대 같았는데?”
“어린 애가 타고 있었어.”
“다들 약 좀 작작 처먹어! 헛소리는……!”
“아니, 진짜……!”
관도를 따라 발렌티노로 향하던 제프리 상단은 갑작스러운 흙먼지 세례에 당황하며 원인을 찾았지만, 그 원인 제공자는 이미 멀찌감치 달려 나가 점으로 화해 사라진 탓에 애꿎은 용병들만 약쟁이 취급을 받고 말았다.
그렇게 자신이 뜻밖의 민폐를 끼친 줄도 모르는 질주의 주인공은 붉게 석양이 지는 저녁, 늦지 않게 목적지에 당도했다.
저 멀리 보이는 슬슬 닫히려는 성문과 그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
필레스에서 발렌티아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대도시, 루센티아의 서쪽 성문이었다.
“수고했다.”
“컹!”
월랑 역시 뿌듯했는지, 다시 영혼 속으로 사라지면서도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들려 주었다.
술사와 정령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던 질주는 그 성과도 대단했다.
정상적으로 말을 달린다 해도 족히 사흘은 걸렸을 거리를 불과 하루 만에 주파한 것이다.
그러니 루센티아를 향하는 타이니의 발걸음은 더욱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정지! 꼬마야, 어른은 어디 있냐?”
신분패를 든 채 성문을 지나가려는데, 그를 본 병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기분 나쁜 것을 본 것처럼 찌푸려지는 인상.
이 대륙에서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는 이상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이었기에, 타이니는 담담히 대답했다.
“혼자야. 여기 용병패.”
“하!? 용병패? 꼬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아빠 어디 있는지 말…….”
– 크르르르.
“으아아악!”
작은 체구는 여전히 많은 면에서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성문에서부터 월랑이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더는 시비 거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소문으로만 들었던 정령의 등장에 감탄하는 이들만 모여들 뿐.
“저, 저게 뭐야?”
“꼬마가 웬 늑대를…….”
“아! 나 들어 본 적 있어. 설마 정령…….
이건 이거대로 귀찮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할 때쯤.
다행히 다른 곳에서 이목을 끄는 이들이 나타났다.
“어! 저기?”
“신전의 기사들이 여긴 왜!?”
“어디? 어디!?”
루센티아의 서쪽 성문에 번쩍이는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단체로 등장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은 것이다.
‘성기사들.’
그들의 긴장한 얼굴을 보며, 타이니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후우…….”
타이니는 흘깃흘깃 따라붙는 시선들을 무시한 채 현생에선 처음 와 본 도시를 둘러보았다.
대로변에 가득한 2층 혹은 3층의 건물들.
대부분은 1층에 상점이 들어서 있었고, 여관을 겸하는 음식점이나 술집들도 꽤 보였다. 필레스 같은 작은 영지보다는 확실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다만 단점이라면, 다른 냄새도 심하다는 것이었다.
“지독하네…….”
절로 코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는 고약한 냄새.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라 그런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 퀘퀘한 냄새가 온 도시에 진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농사를 짓는 영지에서는 거름으로 쓸 수 있는 대소변이, 도시에서는 거리나 뒷골목에 뿌려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이십 년 뒤라면 몰라도, 아직은 제도나 발렌티노 정도의 대도시가 아니고서야 하수도 시설이 존재하는 곳도 드물었다.
자연스레 전생에 처음 제도를 보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냄새 안 나는 도시를 처음 가 보았을 때 오히려 놀랐었지.’
그렇게 때아닌 추억에 젖어 들던 타이니는 불쾌한 냄새가 점점 심해지는 뒷골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굳이 루센티아에 들른 건 숙식을 해결하기 위함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
혹시나 하는 염려.
‘모든 게 내 생각처럼 흘러가면 좋겠지만…….’
필레스의 영주, 제국의 영주가 죽었다. 그것도 흑마법사라는 것이 밝혀진 채로.
그러니 황실 조사단은 영주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기보다는, 영주가 어떻게 흑마법사가 되었는지에 초점을 두고 조사를 진행할 것이다.
혹 그 과정에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더라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진범이 영주의 총애를 받던 뒷골목 출신 소년이라고 유추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설령 조사단이 그가 모르는 마법으로 범인이 누군지 특정해 낸대도 상관없었다. 흑마법사를 죽인 것은 오히려 공이라 할 수 있는 일,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도 귀족을 죽인 죄와 흑마법사를 죽인 공이 상쇄되어 처벌은 없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남작의 배후라는 자들이 마음에 걸렸다.
‘흑마법사들이 설마 세상의 이목도 신경 쓰지 않고 나타나겠냐마는.’
배후가 방문한다고 약속된 시간은 영주가 죽은 날로부터 나흘 뒤, 즉 지금으로부터 이틀 뒤다.
지금쯤이면 황실 조사단이 파견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기사들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리고 또 며칠 뒤면 온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할 터였다.
그 말인즉, 좀 전에 보았던 성기사들처럼 흑마법사들을 적대하는 무력 집단이 그곳에 모여들 거란 뜻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배후라는 것들은 필레스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배후라는 것들이 그 전에 필레스에 들른다면,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다면.’
그땐 정말이지 곤란해진다.
아니, 만약 들킨다 해도 월랑의 질주가 있으니 그들에게 쉽게 잡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가로 가는 내내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수는 있었다.
그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당장 쓸 장비를 마련해 놔야지.”
필레스가 상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영지라곤 해도 그 규모가 작기에, 지금 이 작은 몸에 적합한 장비와 무구를 찾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그가 원하는 무기는 일반적인 창이나 칼도 아닌 만큼, 맞춤 제작에 괜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결국 이런 대도시에 존재하는 장인 골목이나 이름 있는 대장간을 찾아가 몸에 맞는 물건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작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돈.
‘그 기사, 그렌이라고 했던가. 호의는 고맙지만.’
그렌이 건넨 은화 몇 개로는 공작가에 가는 동안의 숙식은 해결될지언정,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타이니는 돈 걱정을 하지 않았다.
대도시에는 보통 빈민가가 있기 마련이고, 통치자는 대개 빈민가의 치안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
그랬기에 타이니는 더럽고 냄새나는 빈민가를 일부러 찾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피식 웃었다.
‘적당하네.’
필레스 영주관에서 받은 옷은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비단옷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서민이 입기에는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이었다. 게다가 어린아이의 체형에 딱 맞추어 제작된 옷을 입었다는 것은 곧, 잘사는 집안의 자제라는 뜻이기도 하기에.
“어이 꼬마, 돈 좀 있냐?”
이렇게 열세 살 남짓한 꼬마에게 번뜩이는 칼을 들이대는 인간쓰레기들이 꼬이기도 쉬웠다.
“흠…….”
슥 둘러보자, 단검을 든 이빨 빠진 사내 뒤로 일행인 듯한 놈들이 몇 명 보였다.
대머리인 놈과 뻐드렁니가 툭 비어져 나온 놈, 문신으로 뒤덮인 상반신을 고스란히 드러낸 놈들까지.
“꼬마야, 형이 묻잖냐. 좋게 말할 때 옷부터 털어 줄래?”
이빨 빠진 놈이 히죽 웃으며 단검을 허공에 휙휙 휘둘렀다.
딴에는 위협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러는 너는?”
“……응?”
예상치 못한 반문에 이빨 빠진 놈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들은 돈 좀 있냐?”
살벌한 미소와 함께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